10. 중앙대학(中央大學) 시절 [1956-1959]
(1) 중앙대학교(中央大學校) 교수(敎授)
1956년에 나의 거주지가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짐에 따라, 경상남도 도민증(道民證)을 가졌던 내가 서울특별시 시민증(市民證)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 시민증 소유자들의 우월감이 컸었는데 GNP가 100 불도 안되던 지구상의 중앙집권적 최빈국 국민들의 시대적 착각이었겠지.
내가 부산에서 흑석동(黑石洞) 중앙대학으로의 초행길은, 비행기는 없었고 경부고속도로도 없었으며, 교통기관으로는 오직 일제(日帝)가 남겨둔 단선(單線) 경부선(京釜線) 철도뿐이었기에, 그것을 부산에서 타고 서울역에 내려서는 전차(電車)로 노량진(鷺梁津)까지 갔었고 거기서는 도보(徒步)로 목적지를 찾아갔었다.
당시의 경부선은 이 사진처럼 상행선과 하행선이 따로 없는 단선이었다. |
6.25 때 이 승만 정권은 우리 군대로 하여금 인민군을 막는다고 인도교를 폭파해서 수많은 서울 시민을 수장시켰다. 그곳을 임시로 수리한 상처가 보인다. |
유람강산(遊覽江山)의 기분으로 가졌던 카메라로 차창너머 단선이던 선로(線路) 사진도 찍고, 노량진에서 한강 둑길을 걸으면서는 6.25 때 우리가 우리의 인도교(人道橋)를 폭파했던 그 상처도 보였기에 카메라에 담았다.
처음 본 중앙대학은 동아대학과는 비할 바가 아닌 큰 학교로 보였다. 최 호진(崔 虎鎭) 부총장을 만났고, 그의 소개로 임 영신(任 永信) 총장도 만나 즉석에서 교수의 구두발령도 받았다. 또 직계상사인 백 철(白 鐵) 문리대학장도 만나고 연구실(硏究室)도 배정 받았다. 그리고 그날 교문을 나와서는 임시로 기거할 하숙집도 대학 근처에 하나 정했던 것이다.
1950년대 말기의 중앙대학교는 교주이자 총장(總長)이던 임 영신(任 永信) 여사(女史)가 전권(全權)을 쥐고 있었는데, 대한민국의 초대(初代) 상공부장관(商工部長官)을 역임한 관록과 이(李) 대통령(大統領)의 후광으로 그녀의 정치적(政治的) 파워는 막강했다.
이 승만 대통령 내교 1957?
내가 중앙대학 재임 시에 이 승만(李 承晩) 대통령이 중앙대학에 온 일이 있다. 이 사진은 필자가 그때 찍은 사진인데, 이 대통령의 왼쪽에 나란히 선 여인이 임 영신(任 永信) 총장이다.
그녀는 여자 단과대학(單科大學)이던 중앙대학(中央大學)을 하루 아침에 법정(法政), 문리(文理), 약학(藥學)의 3개 대학과 대학원(大學院)으로 구성된 남녀공학 종합대학(綜合大學)으로 승격시켜 스스로 총장(總長) 자리에 앉고, 경제학계(經濟學界) 태두(泰斗)이던 최 호진(崔 虎鎭)*1 박사를 부총장(副總長)에 앉혔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그녀의 뜻대로 진행되었건만 교수(敎授) 인사(人事)만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부총장의 말에 따르면 문리대(文理大)에 수학과(數學科)는 신설(新設)해놓고 교수(敎授)가 없어서 학생모집을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부총장인 최(崔) 박사는 빨리 교수를 데려오라는 임(任) 총장의 독촉을 받았는지라, 그는 "대학 후배 중에 수학(數學)을 전공한 사람이 한 사람, 부산(釜山) 동아대학(東亞大學)에 있는데 불러올까요?"라고 했고, 그녀는 "빨리 그렇게 하세요."라고 했는데, 그것이 내가 중앙대학(中央大學)으로 가게 된 동기가 된 모양이다.
내가 최 박사한테서 그 연락을 받은 것은 1955년의 어느 날이었는데, 당시의 나는 동아대학(東亞大學)에서 학장사무취급(學長事務取扱)이란 직함으로 실질적인 그 대학 운영(運營) 책임자(責任者) 구실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부터 서울로 갔으면 하는 희망은 가졌었기에 잘 되었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즉석에서 중앙대학(中央大學)의 초빙(招聘)에 응할 수가 없어서 주저하다가, 다음해인 1956년 4월의 신학기(新學期)가 되어서야 겨우 부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1) 자서전 6, (3) *7 참조.
(2) 대학원위원(大學院委員)
당시의 중앙대학교에서는 대학원위원회(大學院委員會)가 있어서 매주(每週) 1 회씩 정기적으로 총장실에서 회의를 했는데, 대학원(大學院)에 관한 업무(業務)는 물론이고, 대학교(大學校) 전반의 운영에 관한 중요 사항을 여기서 의논했다. 이 대학원위원회는 각 대학에서 나온 2 명씩의 대표로 구성(構成)되어 있었는데, 문리과대학(文理科大學)에서는 학장(學長)과 내가 그 위원이었으므로, 나는 취임(就任) 초기부터 교무(校務) 전반에 참여(參與)하게 된 셈이었다.
호놀루루에서 최 호진(崔 虎鎭) 박사와 필자 1967
이 사진은 훨씬 훗날인 1967년경에 하와이 호놀루루 공항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중앙에 화환을 목에 건 것이 필자이고 그 왼쪽이 최 호진 박사인데, 그곳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와서 연구하는 바쁜 몸이었건만 옛 우정을 잊지 않고 이렇게 시간을 할애해 주셨다. 필자의 오른쪽 분은 최 박사의 제자인데 자기 차를 가지고 와서 나와 최 박사를 여러 명승지로 안내까지 해주었다. 이 사진을 여기 붙인 것은, "중앙대학" 하면 나로서는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최 박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회의(會議)에 나감으로써 몇 안되는 위원들과 자주 만나게 되었는지라, 자연(自然)이 임 영신 총장(總長), 최 호진 부총장(副總長) 겸 대학원장(大學院長), 소 진덕(蘇 眞悳)*1 법정대학장(法政大學長), 백 상건(白 尙健)*2 법정대학 교수, 양 형호(梁 瀅鎬)*3 약학대학장(藥學大學長), 백 철(白 鐵)*4 문리과대학장(文理科大學長) 등과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 구주제대(九州帝大) 출신.
*2) 자서전 6, (3), *11 참조.
*3) 자서전 6, (3), *5 참조.
*4) 백(白) 학장은 나의 직속 상사이었는데, 문단(文壇)의 거성(巨星)이었다.
(3) 서울로 이사(移徙)
중앙대학(中央大學)으로 옮긴 후 중학교(中學校) 수학교과서(數學敎科書)의 첫 인세(印稅)도 받아 혜화동(惠化洞)에 집도 쉽게 구해서 이사(移徙)를 했다. 궁했던 옛날과는 달라서 생활에 제법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이사할 때 정원수(庭園樹)가 많았는데, 철도(鐵道) 화물차 하나에 가득히 실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정원수를 옮긴 것이 잘못이었다. 부산의 정원수를 서울로 옮기면 월동(越冬)을 못하고 태반이 얼어 죽는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싣고 온 것을 어떻게 하랴. 좋아하는 그 나무들을 버릴 수는 없어서 응접실 앞뜰에 간이 온실을 만들어, 금목서(金木犀), 침정향(沈丁香), 동백(冬柏), 화치자(花梔子) 등은 그 안에 심기도 했다.
그 때의 그 나무들은 그후에 인천(仁川), 약수동(藥水洞), 구의동(九宜洞)으로 또 마지막으로는 울산(蔚山)으로까지 나에게 끌려 다니다가, 대부분은 죽어버렸는데, 살아남은 것 중의 하나인 재래종 붉은 동백(冬柏)은 원줄기는 잘렸지만 40 년이 지난 오늘까지 현관 앞에서 그 가지를 크게 뻗어 장수(長壽)를 자랑하고 있다.
(4)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교수를 겸무
1956년에 서울로 이사(移徙) 와서 처음으로 맞이한 손님이 안 승태(安 承泰)*1 군이었다. 안 군을 동아대학(東亞大學)에서 수학과(數學科) 수석으로 내보낸 후로는 보질 못했는데, 육군중위(陸軍中尉)의 제복을 입은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교관(敎官)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안 군이 혼자 온 것이 아니고 육사(陸士)에서 상사(上司)로 모시는 수학과장(數學科長)인 문 원(文 源) 소령(少領)과 함께 왔다. 문 소령은 나와 같은 경상도(慶尙道) 출신이었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의기상투(意氣相投)했는지라 그 후로 각별히 친하게 되었는데, 그 날의 용무는 나를 육사(陸士) 교수(敎授)로 초빙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중앙대학(中央大學)으로 온지 불과 몇 달만에 또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설왕설래(說往說來)했는데 중앙대학(中央大學) 교수(敎授)로 있으면서 육사(陸士)에 주당(週當) 3 일씩 나와 달라고 하면서, 이미 상사와도 의논이 되어 있으니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교수(敎授)로 발령(發令)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지금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허용(許容)이 되어, 결국 나는 중앙대학(中央大學) 교수(敎授)와 육사(陸士) 교수를 겸하게 되었다.
태릉, 육군사관학교 정문 1957
필자가 문 원 소령과 안 승태 중위를 어느날 퇴근 때 찍은 것이다.
육사(陸士)는 해사(海士)와는 또다른 분위기(雰圍氣)였다. 모든 편제(編制)가 미국(美國) 육사(陸士) 그대로라 했고, 강의(講義) 방식도 미국 군대식(軍隊式)이라고 했다. 사관후보학생(士官候補學生)들은 진도표(進度表)에 따른 학습내용(學習內容)을 미리 예습(豫習)해와야 하고, 강의(講義) 직전에 학생들이 그것을 발표하며, 교수는 그것의 시비(是非)를 가려가며 지도한다.
사관후보학생(士官候補學生)들은 모두가 열심히 공부했다. 그때까지 대부분이 놈팡이 같은 학생들을 보아온 나는 육사가 있는 태릉(泰陵)에 가면 별천지(別天地)에 온 기분이 되어, 무엇인가 이 나라의 앞날이 밝게 느껴지기도 했다.
*1) 자서전 8, (3), *1 참조.
(5) 교내외서 만난 사람들
나는 중앙대학에 와서 전술(前述)한 대학원위원 외에도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대학에는 최 호진 씨가 불러 모았는지, 구주제대(九州帝大) 출신이 여러 사람 있었는데, 앞서 말한 동창들 외에도 법정대학(法政大學)에 백 창석(白 昌錫) 선배가, 그리고 또 문리과대학 화학과(化學科)에 문 병렬*1 군이 있었다.
또 자연과학 계열의 동료들에는 수학과(數學科)에 김 성일(金 星一) 씨, 물리학과(物理學科)에 윤 일병(尹 日炳) 씨, 화학과(化學科)에 정 재기(鄭 在基) 씨, 생물학과(生物學科)에 김 준민(金 遵敏)*2 씨와 오 계칠(吳 桂七)*3 씨 등이 있었다.
또 나는 통근하면서 혜화동(惠化洞)과 흑석동(黑石洞) 사이를 운행하던 마이크로 버스를 잘 이용했는데, 여기서 자주 만나던 사람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시인(詩人)이자 후일 인하대학교(仁荷大學校) 부총장을 역임한 조 병화(趙 炳華) 씨이고, 또 한 사람은 후일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총장을 역임한 김 옥렬 양이었다.
서울에 와서 뜻밖에도 거리에서 조 좌호*4 형을 만났다. 부산형무소(釜山刑務所) 안에서 서로 눈인사만 나누었던 그 친구도 다행하게 살아남아 나보다 먼저 서울에 와서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에 있었다. 흑석동(黑石洞)의 대학 주변에 집을 물색 중이던 나에게 그 친구가 한사코 명륜동(明倫洞)인 자기 집 근처로 오라는 바람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을 헤아리며 혜화동(惠化洞)에서 집을 구하기도 했다.
또 조(曺) 교수한테서 박 흥수*5 군과 독일어(獨逸語) 교수 박 인수(朴 仁守) 씨가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에 와있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달려갔었다. 거기서는 또 동경물리(東京物理) 동창을 많이 만났는데, 함경도(咸鏡道) 출신으로서 수학부(數學部)를 나온 이 용두(李 容斗)*6 형도 그때 만났다.
또 문교부(文敎部)에는 대구사범(大邱師範) 후배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기숙사(寄宿舍)에서 실장(室長)을 할 때의 2 년 후배인 이 창갑(李 昌鉀)*7 군이 경남중학(慶南中學) 교감을 거쳐, 경상남도 학무과(學務課)에 장학사(奬學士)로 있다가 올라 와서 장학관(奬學官)으로 있었고, 3, 4 년씩 후배인 허 선간(許 善杆), 홍 순철(洪 淳徹) 양 군은 국가고시(國家考試)에 합격한 엘리트로서 문교부(文敎部) 내의 실무진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 세 사람에게 "문교부의 삼총사(三銃士)"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기도 했다.
*1) 자서전 6, (3), *3 참조.
*2) 후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전직. 졸저(拙著) "수학교실에서 본 옛날이야기"를 어디서 보았는지, 명작이라면서 그런 책을 많이 어린 아이들에게 읽게 해야겠다고 했다.
*3) 전임강사, 후에 교수. 1961년에 미국으로 유학. 내가 1963년에 인하공대(仁荷工大)를 맡아 교세(校勢) 확장(擴張)의 일환으로 가정교육학과(家政敎育學科)를 두었는데, 그 학과의 책임자(責任者)를 임명(任命)해놓고 보니, 오 계칠 씨의 부인(夫人)이었다.
*4) 자서전 9. (4), *4; 동 (2), *1 참조.
*5) 자서전 9. (4), *10 참조.
*6) 이(李) 형과 나와는 특별히 친한 사이였다. 최 윤식 박사와 세 사람이 공저(共著)한 책도 있다.
*7) 이(李) 군은 그후 서울시 교육감(敎育監)도 역임했다. 울산(蔚山) 출신 박 상선(朴 相善) 씨의 처남이기도 하다.
(6) 정부(政府)가 보낸 각종 위촉장(委囑狀)
내가 서울로 올라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각사무처(內閣事務處)*1, 문교부(文敎部), 유네스코 한국과학정보(韓國科學情報)센터, 아세아반공연맹(亞細亞反共聯盟) 등에서는 각종 위원(委員) 직을 위촉해왔다. 특히 문교부에는 전술(前述)한 "문교부의 삼총사"가 있었기 때문인지 문교부에 무슨 위원회(委員會)가 생겼다 하면 반드시 "김 병희 교수를 필두로" 하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참고로 1950년대 후반기(後半期)경에 문교부에서 나에게 보내온 각종 위촉장(委囑狀)을 내가 가진 "요(要)보존(保存)서류철"에서 20 개만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1955. 12. 24. 검인정(檢認定) 교과용 도서(圖書) 내용 사열 임시위원[문교부장관]
2. 1956. 5. 23. 4289학년도 수학담당 장학위원(奬學委員) [문교부장관 리 선근]
3. 1957. 4. 18. 4290학년도 수학과(數學科) 장학위원(奬學委員) [문교부장관]
4. 1957. 4. 19. 4290학년도 국비장학생(費奬學生) 선발 시험위원 [문교부장관]
5. 1957. 6. 4. 4290학년도 고등학교 교원자격(敎員資格) 고시위원 [문교부장관]
6. 1957. 10. 30. 교수요목(敎授要目) 제정심의회(制定審議會) 위원 [문교부장관]
7. 1957. 11. 25. 대학입학(大學入學) 자격검정고시 중앙위원회 위원[문교부장관]
8. 1958. 4. 1. 4291학년도 장학위원(奬學委員) [문교부장관]
9. 1958. 4. 9. 4291학년도 국비장학생(國費奬學生) 선발 시험위원 [문교부차관]
10. 1959. 4. 10. 4292학년도 중앙 장학생(奬學生) 자격심사위원회 시험위원[문교부차관]
11. 1959. 4. 20. 4292학년도 장학위원(奬學委員) [문교부장관]
12. 1959. 9. 16. 4292학년도 중학교 교원자격(敎員資格) 고시위원 [문교부장관]
13. 1959. 9. 16. 4292학년도 고등학교 교원(敎員)자격 고시위원 [문교부장관]
14. 1960. 7. 9. 4293학년도 고등학교 교원자격(敎員資格) 고시위원 [문교부장관]
15. 1961. 6. 21. 4294학년도 장학위원(奬學委員) [문교부장관]
16. 1961. 7. 4. 교육과정심의회(敎育課程審議會) 위원 [문교부장관]
17. 1961. 8. 18. 4294학년도 고등학교 교원자격(敎員資格) 고시위원 [문교부장관]
18. 1961. 8. 18. 4294학년도 중학교 교원자격(敎員資格)고시위원 [문교부장관]
19. 1961. 11. 21. 교육과정심의회(敎育課程審議會) 위원 [문교부장관]
20. 1962. 7. 28. 국정(國定) 교과용 도서(圖書)편찬심의위원 [문교부장관 김 상협]
위에 적은 것 외에도 기억에 남는 위원직으로서는 해외유학생(海外留學生) 자격 고시위원 직과 학술용어(學術用語) 심의위원회(審議委員會) 수학분과위원회(數學分科委員會) 위원 직이 있었는데, 특히 후자(後者)는 국정교과서(國定敎科書)나 검인정교과서(檢認定敎科書)에 씌어질 수학(數學) 학술용어(學術用語)를 심의(審議) 제정(制定)하는 기관의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위원회는 수학(數學)에 관한 학술용어(學術用語) 하나하나를 심의(審議)했으므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고, 수없이 많은 회의(會議)를 가졌던 기억도 난다. 또 그 위원들 중에는 동경물리학교(東京物理學校) 동창(同窓)들이 많이 있어서, 나보다 훨씬 연세가 높아 보이는 어느 중등학교 교장으로 계신다는 심 형필, 유 창식 두 선배가 있었고, 서울대학교 교수 이 성헌 선배도 있었는데 모두 대단히 열성적이었다.
*1) 지금의 총무처(總務處) 구실을 하던 당시의 정부 기관이었는데, 여기서는 나에게 "제1 회 5급공무원 임용고시위원"을 위촉해왔었다.
경포대(鏡浦臺)에서 열렸던 해외유학생 관계 회의 1960?
이 사진은 문교부(文敎部) 주관 해외유학생 선발위원회의 회의를 강릉(江陵) 경포대에서 가졌을 때의 기념사진이다. 오른쪽 끝에 중절모를 쓴 필자가 보이고, 옆으로 외국 여인 한 사람을 뛰어 이 정환(李 定煥) 교수(후일 재무부장관)가 보인다.
(7) 이런 일 저런 일
1950년대 후반기의 서울은 임시수도(臨時首都)였던 부산에서 수복(收復)한 직후였기에 도시(都市)로서의 면목이 말이 아니었다. 마침 충무로(忠武路)에 6.25동란 때 해운대(海雲臺)에서 알게 되었던 친구 하나가 전파사(電波社)를 하고 있었기에 나는 가끔 그 점포에 들렸었다. 그 점포는 길 남쪽이었는데 거기서 길 건너로 보이는 북쪽 일대는 동란 때의 폭격(爆擊)으로 모두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살풍경(殺風景)이었다.
하루는 그 점포에 들렸더니 친구의 하는 말이 미국에서 귀국한 누군가가 들고 온 중고품(中古品) TV가 하나 있는데 들여 놓으라고 권했다. 물론 흑백(黑白)이었고 화상(畵像)도 찌그러져 지금 같으면 완전 폐품(廢品)이었지만, 국내 생산이 안되던 당시는 그것도 품귀해서 너도나도 서로 사려고 했을 때였다. 그래서 그것을 사서 집에다 안테나도 세워, 당시 서울에 300 명 정도이던 TV 시청자(視聽者)의 한 사람이 되었다.
중앙대학(中央大學) 시절의 나는 그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경제적(經濟的)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텔레비전도 가지게 되었던 것인데, 또 당시로서는 신기하다고 느껴졌던 녹음기(錄音器)까지도 가질 기회가 찾아왔다.
하루는 연구실(硏究室)로 자주 출입하던 상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새로운 상품을 소개한다면서 미국 제 녹음기(錄音器)를 사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값을 물으니 18만 원이라고 했다. 당시의 18만 원은 여간 큰돈이 아니었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대학 교수의 월급이 3만 원 정도였던 기억이 나는데, 그것은 5, 6 개월 분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 비싼 녹음기를 샀는데 그것은 여러 동료 교수들에겐 선망(羨望)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랬는데 그 TV도 그 녹음기도 모두 도둑을 맞았으니 당시의 서울 치안(治安)도 알아볼 만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녹음기는 영영 찾지 못했지만 TV는 동대문경찰서(東大門警察署)에서 연락이 와서 찾아왔는데, 알고 보니 내 집을 찾아온 외가(外家)쪽 먼 친척이 묵고 있다가 그 신기한 기계가 얼마나 탐이 났던지 야음(夜陰)을 이용하여 들고 도망치다가 그만 순찰 중이던 순경에게 잡히고 말았던 것이었다.
TV와 녹음기가 있었고 다른 동료들이 가지기 어려웠던 냉장고(冷藏庫), 오르간, 피아노 등도 가지게 되어 나는 제법 문화생활(文化生活)을 하는 양 착각했던 모양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형편 없었던 것 하나가 난방시설(煖房施設)이었다.
지금은 기름을 때는 온돌방을 당시에는 장작을 때고 있었다. 물론 나만이 아니었고 서울의 서민층이면 전부가 그러했다. 월동준비(越冬準備)의 하나가 땔감의 비축(備蓄)이었다. 그래서 왕십리(往十里)를 지나 뚝섬 쪽으로 나가면 통나무를 야적(野積)해놓고 파는 데가 있었는데, 트럭으로 한 차 분을 사와서 뒷마당에 부려놓고 일꾼을 시켜 아궁이에 알맞게 자르고 쪼개는 것이 중요한 연중행사의 하나였다.
월동준비(越冬準備)라면 잊을 수 없는 또 하나가 쌀을 몇 가마 구해 두는 일이었다. 가을에 사 둔 쌀이 이듬해 봄이면 영락없이 그 값이 천장 모르게 뛰었으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시절이 물가 상승이 심했던 인플레이션(inflation) 시대였음을 뜻한다.
(8) 중앙대학(中央大學)과 육사(陸士) 교수직 사임
1959년 3월의 어느 날,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에 있는 이 용두(李 容斗) 형이 만나자고 해서 을지로 6가의 어느 다방에 나갔더니, 그는 한양대학교(漢陽大學校)의 이 두겸(李 斗謙) 교무과장(敎務課長)을 소개했다. 이(李) 과장은 이(李) 형과 같은 함경도(咸鏡道) 출신으로서, 이번에 한양공대(漢陽工大)가 종합대학으로 승격했으므로 미구(未)에 교무처장(敎務處長)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이(李) 과장은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나한테 하는 말이 승격된 자기네 대학교(大學校) 문리과대학(文理科大學)의 학장(學長)으로 올 의향이 없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좋겠다고 했고, 그것으로 나는 학장(學長)의 발령이라도 받은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헤어져서 바로 중앙대학(中央大學)으로 가서 요로에 나의 사의(辭意)를 표명했고, 또 학장을 맡았으니 타교(他校) 출강(出講)의 시간적 여유도 없겠기에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에도 신 학년부터는 나갈 수 없음을 알렸는데, 그 때가 1959년 3월의 어느 날이었다.
(9) 서울서 대구사범 동창회
뜻밖에도 서울 진출 익년인 1957년에는 대구사범(大邱師範) 동창회가 연거푸 두 번이나 열렸다. 첫째 번은 5월에 봉은사(奉恩寺)에서 열린 재경(在京) 대구사범 동창회였고, 같은 해 6월에는 전국(全國)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동창회가 창경원(昌慶苑)에서 열렸다.
서울에 있는 대구사범 동창들이 한 50 명 정도 모인 것 같다. 5 기생 신 상묵 군이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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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동창회는 모두 창경원에 모여서 몇 사람씩 자유롭게 앉았는데, 이 사진에서는 신 현길 선생님과 이 성조 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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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범이 내가 나온 후에 심상과(尋常科) 17 회 졸업생까지 내고는 전문학교로 승격이 되었는데, 그것이 그 후 다시 사범대학이 되더니 경북대학교가 생길 때 그 대학교에 속하는 사범대학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들 대구사범 심상과 졸업생들의 학적부(學籍簿)는 부속고등학교에 있는 모양이고, 그 부속고등학생을 모두 동창이라 부르는 것 같다.
5월의 모임 때는 집을 부산에서 혜화동(惠化洞)으로 이사와서 얼마 안되었을 때였는데, 혜화동 집을 나와 동대문(東大門)에서 시외전차를 갈아타고 뚝섬까지 가서 거기서는 나룻배로 한강(漢江)을 넘은 기억이 난다.
당시는 5.16혁명 후에 제3한강교가 생기기 전이니까, 한강에 철도교 외에는 인도교(人道橋)와 2차선 광진교(廣津橋)가 있었을 뿐이었으므로, 강남에 있는 봉은사(奉恩寺)로 가려면 나룻배를 타야 했고, 그것도 손님이 적을 때는 장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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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섬에서 강남으로 다니던 나룻배. 노 젓는 사공을 한 손님이 도우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필자가 봉은사에 갈 때 찍은 사진이다. |
두 번의 동창회에 모두 참석해서 참으로 오래만에 동기를 비롯한 많은 재경(在京) 동문들과 몇 분 은사님을 만났다. 나도 교직을 떠났지만 많은 동창들이 교편(敎鞭)을 던져 버리고 그리고 또 서울에 많이 모여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사범 출신들의 본연의 자세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1) 자서전 6, (3) *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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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굴사이트에서 '임영신' 박사로 검색을 하는 도중,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던 김 병희 교수의 블로그에 올려진 글이 있기에 퍼왔습니다.
개인이 갖고 있던 기록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블로그에 올리신 것입니다.
'승당 임 영신 박사 추모 강연회'에 가면 임 영신 박사에 관한 자료를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했건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습니다.
임 영신 박사의 녹음된 육성도 듣고 싶고, 사진 자료도 보고싶습니다.
어디에 연락을 해야 구체적으로 자료를 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