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대홈페이지 '중앙인문학관' 임하연의 글방 <숲새네 노란벤치>의 작품들을 다시 정리하여 올립니다.
상수리 숲에 돌아와
임 하 연
가난한 손아귀들이 힘겹게 움켜쥔 호박돌로
상수리나무 허리춤을 때려 열매 털어낸 흔적
화들랑거리는 가지를 놓치고 소리칠 틈도 없이
와스스 떨어졌을 빡빡머리 상수리 열매들은
껍질 벗기고 물에 실컷 불어 맷돌에 갈린 뒤
묵이나 죽으로 또는 붉은 국수나 밥으로 익어
오랜 굶주림 끝에 헛김만 남은 백성을 살려냈지
옛날 얘기가 그리워지는 오늘의 깊은 허기
쓸쓸하고 허전하고 으스스한 한기를 덜어내고파
내려앉는 볕뉘를 제 몸에 덮으며 윤기를 바르는 아침
물기 말라버린 나뭇가지의 가느단 등줄기를
투사의 패기로 우죽우죽 기어오르는 벌레들
절도 있게 구부리고 펴는 무수한 몸짓의 박음질
양말처럼 벗어 던진 셀 수 없는 생명의 껍데기들
낙엽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느새 대지를 삼켜버린 겨울
꿈속에 촉수를 벼리며 가슴엔 심지 샛별 같이 돋우고
미지근한 체온을 데우는 상수리는 그 열로 겨울을 난다
울퉁불퉁한 상처를 다독여 너울대며 위로의 옷을 기우는 동안
진물은 꼬들꼬들 솔고 아픔은 뭉근하게 잠든다
옹송그린 채 지워짐을 기다리는 너와 나, 우리
푸서리에 떨어진 상수리와 도토리가 맨가슴 비비며 뒹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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