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향적 진보 노선은 시나브로
의지만 앞세운 말잔치로 변질되고 독선·배타형으로 비쳐
오만한 무능력자가 될 것인지
협력자와 동역자를 구하는 겸손한 실천가가 될 것인지는
순전히 文 정부의 몫
2018년도 끝자락에 섰다. 적잖은 기대가 있었고 그만큼 안타까움도 많았던 한 해가 저문다. 나는 묘하게도 올해 1월 1일자 칼럼을 썼는데 이어 12월 31일도 칼럼으로 마무리한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볼 겸 올 첫 칼럼 ‘2018년 우리의 시선이 가야 할 곳은’을 들춰봤다.
“~2018년 새해 아침, 우리는 각각 어떤 시선을 구축할 것인가. 그 시선이 가야 할 곳, 멈춰서야 할 곳은 어디일까. … 이런저런 모습으로 산적한 문제들의 겉모습에 주눅 들 건 없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꼼꼼히 살피는 시선이 우선 필요하다. 제대로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꿈을 꾸고 비전을 볼 때 마침내 미래는 열리는 것이니.”
올해 문재인정부는 시선의 중심을 한반도 평화에 뒀고 그에 오로지했다. 막혔던 대화가 다시 시작됐고 남북 정상회담도 11년 만에 재개됐다. 뿐만 아니라 문 정부의 열심은 첫 북·미 정상회담의 물꼬를 텄다. 한반도에는 금방이라도 비핵화와 평화·번영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국민들은 열광했고 문 정부의 지지율은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미 한반도 문제는 남북만의 의제가 아니다. 북한의 핵·미사일은 미·중·일·러를 비롯해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슈다. 남북의 열망보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의지가 더 중시되는 지경이다. 문 정부의 선한 시선과 열정적 의지조차 제한적으로 작동될 뿐이다. 결국 우리는 미국과 국제사회의 변화를 유도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6·12 북·미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비핵화 논의가 교착상태에 빠진 지금 한국의 처지는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문 정부가 주장해 온 한반도 종전·평화선언, 김정은 위원장 서울 답방 역시 현재로선 희망 섞인 전망이 됐다. 독자적으로 쟁취 가능한 게 거의 없는 현 상황은 문 정부 지지율이 40%대를 위협할 정도로 추락하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지지율 얘기가 나왔으니 좀 더 짚어보자. 교착상태에 빠진 비핵화가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긴 하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다. 경제정책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 탓에 경제주체들의 불만이 쌓인 측면도 크다.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의 부조화, 사실상 혁신성장의 부재 등의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당장 남북 관계가 진전된다고 해도 지지율이 바로 반등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지난 8월 27일자 칼럼 ‘경제 흔들리면 남북 관계 풀기 어려워’에서 남북 관계를 풀기 위해서라도 경제 문제가 먼저 정상적으로 작동돼야 한다고 썼다. 경제 문제 탓에 지지를 잃은 정부라면 무슨 정책을 앞세우든 추진력 상실은 시간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 정부 지지율은 과연 남북문제와 경제정책 성공 여부에 좌우되는 것일까. 사실 남북 관계와 경제 이슈는 문 정부 출범 이후에 나타난 부차적인 것이다. 높은 지지율의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문 정부 탄생 과정에서 새 정부가 잘살게 해줄 것이라거나 남북 평화공존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을 터다.
문 정부에 대한 기대감은 촛불 정국에서 확인된 것처럼 이전 정권의 불통과 폐쇄적인 태도에 대한 혁신에 있었다. 이를 그림으로 살펴보자. 예컨대 x축의 왼쪽 끝을 ‘보수’로, 오른쪽 끝을 ‘진보’로 상정해 나타낸다면 촛불 정국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개방적이고 전향적인 진보적 가치, 즉 오른쪽에 호응했다. 물론 그 수혜는 고스란히 문 정부가 누렸다.
국민들의 가치기준은 진보와 보수만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y축의 아래쪽 끝을 ‘독선·배타형’으로, 위쪽 끝을 ‘소통·포용형’으로 가정한다면 촛불 정국에서 사람들이 크게 공감했던 것은 ‘소통·포용형’ 사회였다. 문 대통령이 말끝마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외칠 때 사람들은 ‘소통·포용형’ 이미지에 공감했고 그것이 정권창출의 동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문 정부 초기 높은 지지율은 진보 노선과 소통·포용형 태도에 공감한 이들이 많았던 덕분이다. 그 지지자들은 앞의 x축과 y축을 결합한 좌표 위에서 보면 오른쪽 윗부분인 제1사분면에 속한 이들, 즉 ‘진보 및 소통·포용형’ 가치에 공감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문 정부의 전향적인 진보 노선은 시나브로 의지만 앞세운 말잔치로 변질되고 소통부재의 독선·배타형으로 비치면서 제1사분면에 속했던 이들이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다.
지지율 회복은 남북문제나 경제정책 성공 이전에 정부의 태도 전환에 달렸다. 기회는 아직 있다. 비록 답답한 채 2018년을 보내지만 이게 끝은 아니다. 끝은 다시 시작으로 이어질 것이며 한반도 평화를 향한 행진은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오만한 무능력자가 될 것인지, 협력자와 동역자를 구하는 겸손한 실천가가 될 것인지는 순전히 문 정부의 몫이다.
대기자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