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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는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오랜 불신에서 벗어나
신뢰구축 위한 첫걸음을 시작했다
김 위원장이 핵·미사일에만 의존해온 한계 인식한 듯…
그건 어쩌면 CVID보다 더 중요할 수 있어


고 백화종 전 국민일보 주필은 생전에 평론집 ‘상주보다 서러운 곡쟁이의 사설’(2002)을 썼다. 백 전 주필의 평소 지론을 담은 제목이 퍽 인상적이다. 상주보다 더 서럽게 우는 곡쟁이가 바로 자신이고 기자의 임무 또한 그렇다는 얘기다. 요즘 6·12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내외 매체들의 평가를 보면서 백 주필의 곡쟁이가 떠올랐다.

곡쟁이는 동서고금을 통해 나타난다. 고대 중동에서는 곡쟁이 수로 고인의 위상을 가늠했다. 일본에서는 곡쟁이를 나키온나(泣き女)라고 부르는데 ‘5홉 나키온나’ ‘1되 나키온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받는 보수에 따라 우는 정도가 달랐다. 성서(예레미야 9:17)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곡쟁이의 존재는 그 뿌리가 무척 깊다.

슬픔에 겨워 울음조차 잃은 상주 대신 곡쟁이가 우는 셈인데, 문제는 곡쟁이의 호곡(號哭) 정도가 좀 과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침 이번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매우 크다. 한국뿐 아니라 미·일 미디어의 평가가 비슷하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내용 없는 공동합의문’ ‘구체성 결여’ ‘어이없다’ 등.

핵심의제로 기대됐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와 그 시간표가 제대로 거론되지 않았다. 예컨대 4·27 남북 정상회담 직후 ‘완전한 비핵화’의 내용이 약하다는 비판이 나오자 한국 정부는 그 건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다룰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북·미 정상회담은 거꾸로 ‘4·27 판문점 선언 재확인’을 거론했다. 돌려막기나 다름없다.

수없이 되뇌어왔던 CVID가 공중에 떠버린 형국이다. 또 하나의 핵심의제인 ‘북한 체제 보장’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거론은 없었다. 두 정상의 구두 약속을 소개한 게 전부다. 정상회담 직전까지 북·미 실무진이 조율을 거듭했음에도 당장 CVID와 체제 보장을 묶어낼 수 있는 현실적인 동력 부족을 얼버무린 듯한 합의문이다.

그러면 북·미 정상회담은 실패했나. 나는 아니라고 본다. 기대에 못 미쳤을 뿐이다. 지난해 11월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남북, 북·미 간 대결구도는 분명 반전됐고, 일촉즉발의 전쟁공포도 사라졌다. 그간 북·미 간 가장 큰 우려는 상대에 대한 불신이었는데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간 신뢰구축의 첫걸음이 시작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맞다.

합의문에 핵심의제에 대한 구체성이나 로드맵이 결여돼 있음을 현 단계에서 걱정할 일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이번 합의가 ‘19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9·19 합의’ 수준에도 못 미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양국 정상의 공개적인 약속과 함께 후속 실무협상이 예정돼 있고 추가 북·미 정상회담도 예상되고 있는 만큼 시간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정상회담 전후로 트럼프 대통령의 질펀한 쇼맨십과 성과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듯한 모습은 눈엣가시다. 게다가 공은 미국이 취하고 비핵화에 필요한 비용은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에 떠미는 발언도 마뜩잖다. 무엇보다 한·미동맹의 근간을 흔드는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나선 대목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좌충우돌 제 몫 챙기기에 혈안인 트럼프 대통령의 존재가 있었기에 작금의 변화가 가능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적 행보를 통해 그간 간과돼 왔던 미국의 속내를 냉철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됐다. 한·미동맹만 앞세워 모든 것을 미국에 기댈 수는 없다. 정부와 국민 모두가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미국에 대한 섭섭함을 말하기보다 한국이 감당해야 할 몫에 대한 분명한 각성과 실천노력이 필요하다. 한·미동맹을 적극 활용하더라도 머잖아 본격화될 한반도 해빙을 위해 일·중·러와의 협력은 더욱 절실해졌다. 현 상황과 관련한 국내의 엇갈린 문제인식 조율도 적잖은 과제다. 섣부른 대북 경제협력을 경계하고 지나친 안보불안 심리도 감싸 안아야 한다.

한반도 문제의 본질은 결국 북한의 정상국가화에 있다. 핵·미사일에 의존해온 북한은 비정상적일 뿐 아니라 고립될 수밖에 없다. 최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그 한계를 인식하는 듯하다.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어쩌면 CVID보다 중요하다. 그에게 지난 60·70년대 한국의 압축성장, 이른바 ‘한강의 기적’의 성과를 꼽아보며 ‘대동강의 기적’을 상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동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핵·미사일은 무의미한 곁가지일 뿐이다. 이제 한국이 맡아야 할 역할은 분명하다. 북한이란 상주를 대신해 울어줘야 할 뿐 아니라 상주의 미래 비전도 비춰내는 한반도판 곡쟁이 노릇을 감당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가 그 길밖에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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