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압에 의한 기억의 타살과 권력의 공포 앞에서 택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의 자살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제주 4·3의 죽임이 우리의 아픈 역사임을 더불어 고백하고 함께 아파하며 위로하고 새겨야 할 터
“봐서는 안 돼. 입을 열어 말해서는 안 돼. 귀로 들어서는 안 돼. 외부에서 온 무서운 국가권력에 의한 기억의 타살. 권력에 대한 공포 탓에 섬사람 자신들에 의한 기억의 자살. 말살된 기억은 깊은 무의식 세계로 가라앉아 마침내는 잊히고 죽음에 가까운 침묵에 이른다.”
대하소설 ‘화산도’의 저자 김석범이 제주 4·3 사건 60주년을 기리면서 2008년 4월 17일자 아사히신문에 쓴 기고문의 한 대목이다.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의 기쁨’이란 제목의 글은 기억의 말살을 고발하고 아픔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는 꼭 보장돼야 한다고 맺는다.
마침 그즈음 나는 일본 체류 중이었는데, 1948년 제주 4·3 사건과 그 이후를 기억의 자살과 타살로 요약하는 김석범의 일갈에 무릎을 쳤다. 화산도에 전율했던 유학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85년 봄 도쿄의 한 다큐멘터리 전용극장에서 80년 5월 광주의 현장을 만나 큰 충격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함께 간 일본친구가 비슷한 사례라며 화산도를 소개했었다.
제주가 고향인 재일 작가 김석범은 주로 제주 4·3 사건을 주제로 소설을 썼다. 그는 57년 소설 ‘까마귀의 죽음(鴉の死)’을 통해 처음으로 제주 4·3을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4·3이 사실상 금기였기에 아픔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그의 소설들은 일본어로 먼저 발표됐지만 그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뒤늦게나마 국내에서도 현기영이 78년 중편소설 ‘순이 삼촌’을 발표하고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다양한 장르에서 제주 4·3이 거론됐다. 이어 2000년 4·3특별법과 함께 정부 내 진상조사기획단이 구성돼 4·3진상보고서를 공식화했다. 마침내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에 가서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그럼에도 김석범은 2008년 기고문에서 왜 ‘기억의 타살과 기억의 자살’을 고발했을까. 당시, 아니 지금도 그렇지만 아마 제주 4·3에 대한 엇갈린 시선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달 30일부터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제주 4·3 70주년 기념특별전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가 열리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비판의 소리가 들린다.
4·3의 시작은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48년 5·10선거에 반대하는 남로당의 준동에 있다. 그런데 남로당 수뇌부는 무장투쟁을 주동해 주민들을 유도해 놓고 정작 사태가 심각해지자 섬을 빠져나갔다. 애꿎은 주민들만 적잖이 사지로 내몰렸다. 하지만 경찰의 조기 발포, 이어 벌어진 군·경의 과도한 토벌작전이 비극을 불렀다.
군·경의 강경대응과 주민 반발, 무장투쟁과 극단적인 토벌작전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죽임은 일상적으로 벌어졌고 버려졌다.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그 와중에 제주 주민의 10%에 가까운 2만5000∼3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토벌군에 의한 희생자가 전체 희생자의 80%가 넘고,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는 10여%에 이른다.
적으로 간주된 사람을 누가 더 많이 죽였는가로 잘못의 크기를 따질 수는 없다. 본질은 그게 아니다. 아픈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는 죽임과 학살 그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과잉진압에 나선 토벌대나 철저하게 짓밟힌 채 무장투쟁에 나선 주민들이 이념을 제대로 알기나 했을까. 그 모두가 이념 과잉시대의 비극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죄가 아니라 고백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을 약속하는 일이다.
어쩌면 70년 전 그들이 궁극으로 추구했던 것은 해방 후 제대로 된 평화로운 삶이었을 터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념과 이념이 우선되면서 전혀 엉뚱한 죽임의 역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죽임의 역사가 대부분 그러했듯 신념 이념 민족 국가의 이름으로 기억은 망각의 저편에 유폐됐었다. 하지만 평화와 살림을 갈망하는 기억은 끝내 모든 제약을 뚫고 나온다.
45년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 오키나와전투에서 일본군은 미군에게 항복할 바에는 차라리 자살을 해야 한다고 주민들을 닦달했다. 이른바 강요된 집단자살이다. 집단자살은 전후 오랫동안 감춰졌었지만 결국엔 당시 주민들의 가슴앓이를 통해 어렵게 알려졌고 일본사회는 경악했다. 민족이나 국가, 아니 신념보다 생명, 죽임에 대한 아픔이 더 우선하기 때문이다.
70년 전 제주 4·3의 죽임을 막지 못했다면 적어도 우선 그 아픔이 우리의 역사라고 고백해야 맞다. 더불어 그 죽임을 아파하며 위로하고 새기는 것이 최선이다. 아픈 역사를, 숱한 죽임과 그 과정을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평가하는 일은 그만 내려놓자. 삶은 신념보다 질기고 생명과 평화는 이념보다 진하다. 한 사람의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다(마태복음 16:26).
조용래 대기자 jubilee@kmib.co.kr
제주 4·3의 죽임이 우리의 아픈 역사임을 더불어 고백하고 함께 아파하며 위로하고 새겨야 할 터
“봐서는 안 돼. 입을 열어 말해서는 안 돼. 귀로 들어서는 안 돼. 외부에서 온 무서운 국가권력에 의한 기억의 타살. 권력에 대한 공포 탓에 섬사람 자신들에 의한 기억의 자살. 말살된 기억은 깊은 무의식 세계로 가라앉아 마침내는 잊히고 죽음에 가까운 침묵에 이른다.”
대하소설 ‘화산도’의 저자 김석범이 제주 4·3 사건 60주년을 기리면서 2008년 4월 17일자 아사히신문에 쓴 기고문의 한 대목이다.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의 기쁨’이란 제목의 글은 기억의 말살을 고발하고 아픔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자유는 꼭 보장돼야 한다고 맺는다.
마침 그즈음 나는 일본 체류 중이었는데, 1948년 제주 4·3 사건과 그 이후를 기억의 자살과 타살로 요약하는 김석범의 일갈에 무릎을 쳤다. 화산도에 전율했던 유학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85년 봄 도쿄의 한 다큐멘터리 전용극장에서 80년 5월 광주의 현장을 만나 큰 충격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함께 간 일본친구가 비슷한 사례라며 화산도를 소개했었다.
제주가 고향인 재일 작가 김석범은 주로 제주 4·3 사건을 주제로 소설을 썼다. 그는 57년 소설 ‘까마귀의 죽음(鴉の死)’을 통해 처음으로 제주 4·3을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4·3이 사실상 금기였기에 아픔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그의 소설들은 일본어로 먼저 발표됐지만 그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뒤늦게나마 국내에서도 현기영이 78년 중편소설 ‘순이 삼촌’을 발표하고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다양한 장르에서 제주 4·3이 거론됐다. 이어 2000년 4·3특별법과 함께 정부 내 진상조사기획단이 구성돼 4·3진상보고서를 공식화했다. 마침내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에 가서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그럼에도 김석범은 2008년 기고문에서 왜 ‘기억의 타살과 기억의 자살’을 고발했을까. 당시, 아니 지금도 그렇지만 아마 제주 4·3에 대한 엇갈린 시선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달 30일부터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는 제주 4·3 70주년 기념특별전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가 열리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비판의 소리가 들린다.
4·3의 시작은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위한 48년 5·10선거에 반대하는 남로당의 준동에 있다. 그런데 남로당 수뇌부는 무장투쟁을 주동해 주민들을 유도해 놓고 정작 사태가 심각해지자 섬을 빠져나갔다. 애꿎은 주민들만 적잖이 사지로 내몰렸다. 하지만 경찰의 조기 발포, 이어 벌어진 군·경의 과도한 토벌작전이 비극을 불렀다.
군·경의 강경대응과 주민 반발, 무장투쟁과 극단적인 토벌작전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죽임은 일상적으로 벌어졌고 버려졌다. 정부 보고서에 따르면 그 와중에 제주 주민의 10%에 가까운 2만5000∼3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토벌군에 의한 희생자가 전체 희생자의 80%가 넘고,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는 10여%에 이른다.
적으로 간주된 사람을 누가 더 많이 죽였는가로 잘못의 크기를 따질 수는 없다. 본질은 그게 아니다. 아픈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는 죽임과 학살 그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과잉진압에 나선 토벌대나 철저하게 짓밟힌 채 무장투쟁에 나선 주민들이 이념을 제대로 알기나 했을까. 그 모두가 이념 과잉시대의 비극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죄가 아니라 고백이다. 생명에 대한 존중을 약속하는 일이다.
어쩌면 70년 전 그들이 궁극으로 추구했던 것은 해방 후 제대로 된 평화로운 삶이었을 터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념과 이념이 우선되면서 전혀 엉뚱한 죽임의 역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죽임의 역사가 대부분 그러했듯 신념 이념 민족 국가의 이름으로 기억은 망각의 저편에 유폐됐었다. 하지만 평화와 살림을 갈망하는 기억은 끝내 모든 제약을 뚫고 나온다.
45년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 오키나와전투에서 일본군은 미군에게 항복할 바에는 차라리 자살을 해야 한다고 주민들을 닦달했다. 이른바 강요된 집단자살이다. 집단자살은 전후 오랫동안 감춰졌었지만 결국엔 당시 주민들의 가슴앓이를 통해 어렵게 알려졌고 일본사회는 경악했다. 민족이나 국가, 아니 신념보다 생명, 죽임에 대한 아픔이 더 우선하기 때문이다.
70년 전 제주 4·3의 죽임을 막지 못했다면 적어도 우선 그 아픔이 우리의 역사라고 고백해야 맞다. 더불어 그 죽임을 아파하며 위로하고 새기는 것이 최선이다. 아픈 역사를, 숱한 죽임과 그 과정을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평가하는 일은 그만 내려놓자. 삶은 신념보다 질기고 생명과 평화는 이념보다 진하다. 한 사람의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다(마태복음 16:26).
조용래 대기자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