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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가 만난 사람-허재(체교 39)

관리자 | 조회 수 2222 | 2009.07.17. 17:10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3차전이 열렸던 지난 4월22일. 서울 잠실체육관 라커룸에서 기자들과 만난 허재 감독은 예의 입담을 펼쳤다. “회사에서 주최하는 김연아 아이스쇼가 있는데, 오늘 이기면 회사에서 내일 김연아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 나를 초대해 주겠다는거야.”

“김연아가 감독님을 알까요?” “왕년의 농구 대통령이 김연아와 식사 자리를 걱정해서 되겠어요?” 기자들의 농반 핀잔이 이어졌다. 허 감독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한때는 나하고 밥 한번 먹자고 조르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말이야.”

케이씨씨는 그날 경기에 이겼고, 허 감독은 김연아 선수와 식사를 했다. 그리고 이후 허재 감독은 최종전까지 치르는 격전 끝에 감독으로 첫 우승을 차지했다.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프로농구에서 우승한 첫 감독도 됐다.

요즘 허재 감독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프로농구 첫 우승에 이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아시아 최강 중국을 격파했다.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즐거운 비명을 지를 지경이다. 선수 시절 그의 화려한 명성을 모를 김연아 선수 또래 세대들에게도 그의 이름 두 글자를 각인시키고 있다.


■ 농구대통령, 국가대표 감독에 오르다 프로농구 시즌이 끝난 지난 5월, 대한 농구협회로부터 국가대표 감독이란 중책을 맡은 허 감독의 앞에는 곧바로 아시아선수권대회 출전권이 걸린 동아시아대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선수 선발부터 차질이 빚어졌다. 대표팀에 발탁된 선수들 대부분이 몸이 아프다며 손사래를 쳤다. 김주성, 하승진, 방성윤, 김승현 같은 주력들이 대거 빠졌다. 그는 “선수들에게 실망도 하고, 야단도 쳤다”고 했다.

시간이 빠듯해 훈련도 제대로 못한 채 국가대표팀은 대회가 열리는 일본으로 향했다. 허 감독 스스로 “망신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는 생각에 비행기 안에서 절로 뒷목이 뻐근했을 정도”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국가대표 감독 데뷔전인 첫 경기는 게다가 최강 중국이었다. 팀은 신예들 위주여서 경험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런데 극적인 승부가 나왔다. 3쿼터까지 질질 끌려가던 한국팀은 경기 막판 ‘아르헨티나 특급’ 김민수가 3점슛 세 방을 내리 꽂아넣으며 극적으로 역전승을 거뒀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을 꺾은 이후 홈경기 말고는 무려 27년 만의 중국전 승리였다.

“처음엔 아시아선수권 출전권(2장)만 따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어요. 첫 경기에서 중국을 이기고 나니 욕심이 생겼고, 운 좋게 우승까지 했습니다. 그저 선수들에게 고맙죠.”

이 여세를 몰아 요즘 허 감독은 진짜 승부를 준비중이다. 다음달 중국 톈진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대회다. 내년 터키 세계선수권대회 출전권 3장이 걸렸다. 한국은 1998년 이후 10년 넘게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여세를 몰아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다.

■ 허재, 알고 보니 메모광에 소통의 달인 강사까지 세계선수권 티켓을 따기 위해선 개최국 중국에 이란과 레바논, 요르단 등 중동의 모래바람을 뚫어야만 한다. 농구계는 허 감독이 특유의 작전 능력으로 이를 돌파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왕년의 슈퍼스타 허재는 다혈질에 감성적인 천재 이미지였지만, 감독 허재는 실은 치밀하고 분석적이다. 프로팀 감독으로 4년차를 맞는 그의 무기는 꼼꼼하게 직접 작성한 그만의 비밀노트. 변화무쌍한 공격 패턴, 선수 훈련일지 등을 항상 꼼꼼히 적어놓은 노트가 12권에 이른다. 또 겉으로는 독불장군처럼 보이지만 선수들과의 소통을 염두에 두는 ‘소통의 달인’인 점도 그의 숨은 강점이다. 늘 선수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고 익히는 데 신경을 쓴다.

“항상 기를 살려주려고 고민하죠. 내가 너무 억압하는 건 아닌지, 선수들이 나를 어렵게 받아들이는 건 아닌지 되돌아봅니다.” 때론 설득하고, 때론 격려하는 대화가 중요하다며 그는 이를 ‘언어의 돌파구’라고 표현했다. “50의 기량을 가진 선수를 100에 도달하지 못하느냐고 다그쳐봐야 소용없어요. 60, 70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해야죠. 50을 가진 선수와 100을 가진 선수를 잘 조화시켜야 하는 게 제 몫입니다.”

최근에는 전주지검에서 ‘소통의 리더십’을 주제로 검사들을 앞에 놓고 강연까지 했다. 그는 “예전엔 검찰청 문턱에도 오기 싫었는데, 이젠 여기서 강연까지 하게 됐다”며 웃었다.

■ 낙천적 성격으로 매번 위기를 극복했던 최고의 스타 항상 최고 선수였지만 그의 농구 인생은 영광과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는 그런 부침 속에서 늘 되살아났다. 스스로도 “내 인생이 좀 극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부침 속에서 늘 되살아났던 원동력은 낙천적 성격이다. 선수 시절 다친 왼쪽 갈비뼈를 매만지면서 “언제부턴가 오른쪽 갈비뼈가 아픈데, 양쪽 밸런스가 맞으니 이제 됐다”며 웃곤 한다. 그가 요즘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도 어려움 속에서 항상 ‘희망’을 꿈꾸기 때문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선수 시절 그의 별명은 ‘농구 대통령’이었다. 한국 스포츠 스타 중 ‘대통령’이란 별명은 그뿐이었다. 중앙대 4학년이었던 1987년 단국대전에선 혼자 75점을 올리기도 했다. 기아 소속이었던 1995년 농구대잔치에선 삼성전자와의 챔프 4차전에서 종료 7분 전부터 혼자서 연속 17득점을 올리며 역전승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터지는 음주운전과 코트 폭력 등으로 그는 신문 스포츠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종종 등장했다. 잠시 코트를 떠나기도 했고, 프로농구 원년인 1997년 챔피언결정전 마지막 순간에는 최인선 감독과 불화를 빚어 코트에 서지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듬해 대전 현대와의 챔프전에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마가 찢어진 채로 코트에 서는 ‘투혼’을 보여줬다. 경기에선 졌지만 준우승팀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전 최우수선수(MVP)가 됐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낸 원주 티지(TG)에서는 불혹의 나이에 우승컵을 거머쥐는 ‘유종의 미’를 거두고 은퇴했다.

■ ‘복많은 감독’ 별명 뒤에 숨은 승부사 기질 감독을 맡은 뒤에도 부침은 심했다. 허 감독은 2005년 케이씨씨 감독에 취임하자마자 팀을 4강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이듬해엔 꼴찌로 추락했다. 2007~2008 시즌엔 4강전에서 맞수 삼성에 3전 전패를 당했다. 이번 시즌엔 그야말로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펼쳐졌다.

개막전 서장훈과 하승진을 보유한 케이씨씨는 우승 후보 0순위였다. 그러나 서장훈과 팀이 조화를 못 이루는 바람에 8연패를 당하며 9위까지 추락했다. “허 감독이 곧 잘릴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허 감독은 국보급 센터라는 서장훈을 루키 강병현과 과감히 맞바꾸고 최고참 추승균을 중용하는 결단을 내렸다. 시즌 도중 ‘높이의 팀’을 ‘스피드와 조직력의 팀’으로 바꾸는 승부수를 던졌다. 그 뒤 케이씨씨는 순식간에 치고 올라가 3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리고 더욱 극적인 드라마를 썼다. 케이씨씨는 6강전, 4강전, 챔피언전에서 모두 최종전까지 가는 혈전을 벌인 끝에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8연패를 한 팀이 우승한 것도, 3연속 최종전까지 치르고 우승한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케이씨씨가 우승하던 날,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허 감독이 울었는지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샴페인이 눈에 들어가 눈가를 닦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물을 보였다고 오해할 만큼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날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쏟아부었어요. 우승해서 기쁘긴 한데 이상하게 몸에서 기가 다 빠지는 느낌이었죠.” 포스트시즌 동안 담배는 하루 3갑으로 늘었고 역전패를 당한 날엔 맥주와 소주를 사발에 부어 마신 뒤 잠을 청해야 했을 정도였으니 힘이 빠질 만도 했다.

그런 마음고생을 알 수 없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복이 많다며 ‘복장’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낙천적인 그는 껄껄 웃는다. “복장이건, 명장이건, 덕장이건, 그런 말은 다 필요없습니다. 그저 우승만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 허재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내 몸이 두 개라면 좋겠다”

지난 1일 허재 감독은 새벽 6시에 경기 용인 케이씨씨 농구단 숙소를 나섰다. 전주지방검찰청에서 오전 강연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한 뒤 오후 4시 용인 숙소로 돌아왔다. 잠시 숨을 돌린 뒤 다시 승용차에 올라 경기도 일산 <문화방송>(MBC)) 스튜디오에서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방송 녹화를 마쳤다. 그리고 그가 숙소로 되돌아온 시간은 새벽 2시가 넘어서였다.

요즘 허 감독의 일정은 그야말로 숨가쁘게 돌아간다. 챔피언결정전이 끝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아직 집에서 자본 적이 없다. 밀려드는 인터뷰, 각종 축하 행사, 언론사 순방 등으로 서울 후암동 집을 코앞에 두고도 못 가는 처지다. 일본에서 열린 동아시아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날에는 인천공항에서 곧바로 비행기를 갈아타고 소속팀 케이씨씨가 우승 기념 여행을 떠난 괌으로 향했다.

요즘 부인 이미수(43)씨와 두 아들(웅, 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용인 케이씨씨 숙소로 허 감독을 찾아와 ‘면회’하고 간다. 허 감독 본인도 “군대도 아니고, 교도소도 아니고 이거 원 참…” 하며 쓴웃음을 짓는다.

지난 5월에는 ‘큰일’도 치렀다. 대장에 생긴 용종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시즌 중 몸에 이상을 느꼈지만 병원 갈 엄두를 못 내다가 우승한 뒤 병원에 갔더니 대장에서 커다란 용종이 발견된 것이다. 대표팀 훈련 때문에 수술을 받고도 사흘 뒤 바로 코트로 향했다.

국가대표팀 훈련이 다시 시작된 최근에도 여전히 각종 스케줄로 짬이 없다. “요즘엔 커피 마실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할 정도다. 16일엔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떠났다. 프로농구 외국선수 드래프트 때문이다. 이 기간 대표팀이 대만 존스컵국제대회에 참가한다. 프로팀 감독으로서 팀 전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용병 선발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탓에 존스컵은 강정수 코치에게 맡겼다. 허 감독은 “요즘 같으면 몸이 딱 두개 있었으면 좋겠다”면서도 “언제 또 이런 날이 오겠느냐”며 다시 껄껄 웃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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