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금천구 시흥동 주택가. 다세대 주택 골목 사이 아담한 2층 집이 서울에서 유일한 호스피스 전문 의료기관인 전진상 의원이다. 4월 18일 기자가 찾았을 때 말기암 환자 전모(71)씨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다. 따스한 봄볕이 그리워서다.
“여기 오시니까 어떠세요.”(기자)
“많이 좋아졌어. 병실이 집 같아서 편하고 좋아요.”(전씨)
[안성식 기자] | |
전씨는 말기 식도암 환자다. 말을 하기 힘든지 힘들게 답변했다. 2년 전 말기 선고를 받고 대학병원에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3월 말 병원에서 “더 이상 할 게 없다”며 호스피스를 권했다. 여기에 와서 잠깐 병세가 호전됐다. 전씨는 식사대용 음료를 보이며 “이것밖에 못 먹어서 열심히 먹는다”고 삶에 대한 의욕을 보였다.
기자가 찾기 며칠 전에도 “나는 더 살아야 합니다”라며 배현정(의학 36) 원장에게 매달렸다고 한다. 배 원장은 “두려워 마세요. 저희들이 꼭 함께 있을게요”라며 그를 달랬다. 질병 치료는 하지 않고 통증 완화만 돕는다. 수시로 환자의 손을 잡고 얘기했다. 가족·친구·인생 등 주제가 제한이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환자는 서서히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종교를 갖게 됐다. 5월 말 가족 곁에서 편안히 세상을 떴다.
10여 년간 전진상 의원에선 이렇게 300여 명이 삶과 작별했다. 이들의 마지막 길을 도운 사람은 배 원장을 비롯한 6명의 ‘여성 천사’들이다. 의사 정미경(50)씨, 약사 최소희(71)씨와 간호사 김영자(69)씨, 사회복지사 최혜영(51)·유송자(65)씨가 그들이다. 이들은 결혼 대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택했다. ‘온전하게(全), 참된 사랑으로(眞), 늘 기쁘게(常)’ 환자를 돌본다는 상호에 맞춰 10년가량 한 팀을 이루고 있다.
병원이 문을 연 것은 1975년. 병원 갈 돈이 없는 이를 위해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판자촌 한복판에 공간을 마련했다. 추기경은 배 원장, 최 약사, 김 간호사, 유 복지사 등 4명의 국제가톨릭형제회 회원에게 병원을 맡겼다. 봉사단으로 한국에 온 26살의 벨기에 간호사 마리헬렌 브라셔는 중앙대 의대를 마치고 한국인 배현정 원장이 됐다. 의사 정씨가 97년, 복지사 최씨가 2000년에 합류해 ‘드림팀’이 완성됐다.
2005년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한 최혜영·정미경·김영자·배현정·최소희·유송자씨(왼쪽부터). | |
맏언니 최소희씨는 김수환 추기경이 “교회가 좀 더 어려운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할 텐데”라며 걱정하던 모습에 영향을 받아 이 길을 택했다. 유송자씨는 이화여대 사범대를 나온 뒤 교사가 되려 했으나 학교보다 더 어려운 곳에 있는 이웃을 찾아 이 길로 접어들었고 30년 동안 매주 한 번 죽음을 앞둔 환자의 가정을 방문한다.
전진상 의원이 가정방문 호스피스 활동을 시작한 건 97년부터다. 수시로 들러 격려하던 김수환 추기경의 바람이기도 했다. 그 전에는 저소득층 진료에 매달렸다. 죽음 앞에 선 이들은 대개 어려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외로움과 분노가 목까지 차올라 호흡 곤란을 겪는 사람도 있다. 추기경은 자신처럼 다른 이의 마지막이 평화롭길 원했다. 지난해에는 10개의 병실을 만들어 말기 입원환자를 돌보고 있다.
6명의 천사들은 말기 환자의 병든 몸뿐 아니라 ‘가난한 마음’에 위로의 손을 얹었다.
“죽음을 앞둔 환자의 고통은 단순하지 않아요. 병에 대한 분노, 사회에서의 소외, 가족 내에서 자리를 잃었다는 불안감이 뒤섞이죠. 때로는 병보다 두려움의 고통이 더 커요. 의사 혼자 힘으로는 이들의 고통을 달랠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 여섯 명이 다 필요하죠.”(배 원장)
최근에는 20대 말기 암환자가 “나를 죽여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다. 그는 모든 치료를 거부했지만 의료진은 5분씩이라도 들러 손을 잡아주는 ‘마음의 진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두 달의 시간이 있으면 대부분의 환자는 스스로 죽음을 준비한다. 환자들은 모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뜬다고 한다.
배 원장은 “죽음에서 해방시킨다는 핑계로 환자를 포기하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문제”라며 “죽음과 대면하고 준비하는 것이 진정한 존엄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