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09년 06월 12일(금) 오전 03:11
감았던 눈을 뜨자 큰 붓을 잡은 그의 손이 백지 위를 달렸다. '유우예(游于藝)', 예(藝)에 노닌다는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의 잠언이, 자유롭지만 기백 넘치는 고전체(古篆體·한자의 고대 서체)로 살아났다. 말로만 듣던 '일필휘지'다.
그에게 물었다. "서예란 무엇입니까?" 그가 말했다. "예술이기 이전에 그 사람의 희로애락을 기탁하는 과정입니다." 흰 구레나룻을 기른 이 예인은 초정(艸丁) 권창륜(權昌倫·66)이다.
초정은 20세기 한국 서예의 양대 산맥으로 꼽혔던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1921~2006),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1927~2007) 형제의 학맥을 계승한 국내 대표적 서예가다. 청와대 인수문과 춘추관, 운현궁의 현판도 그가 썼다. 그런 그가 국내 처음으로 10일 경북 예천 용문면에 서예 체험관을 열었다. 한글, 한문, 사군자의 실기와 서예 이론과 작품을 체계적으로 전승하는 서예의 전당이다.
그의 고향집은 체험관 바로 옆이다. 6·25가 끝날 무렵 그는 시골 부잣집을 돌아다니며 병풍 글씨를 써 주는 노인들의 글씨를 어깨너머로 무작정 따라 쓰며 배웠다.
"어린 것이 기특하기도 하지." 그는 어른들의 찬사에 이승만 대통령의 85세 생일 기념 작품전 응모를 위해 1960년 상경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낙심한 그를 붙잡은 것은 1960년대 초 중앙대 국문학과 재학 때 우연히 접한 신문의 문화면 1단 기사였다. 동방연서회가 마련한 서화 특별강습회였다. 노산 이은상, 월탄 박종화 같은 문인이나 심산 노수현, 청전 이상범 같은 화가들도 곧잘 찾던 그곳에서 마주친 두 스승이 김응현과 김충현이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뭐냐?" 그의 글씨를 본 두 스승은 혼부터 냈다. 왕희지(王羲之)나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에서 비롯된 정통 서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굵어야 할 부분에서 가늘었고 길어야 할 부분은 짧았다.
스승들은 "좋은 책들을 많이 임모(臨摸·글씨를 보고 그대로 옮겨 씀)해야 속태를 벗을 수 있다"고 말했다. 매일 아침 열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책 한 권 분량을 쓰고 또 썼다.
2~3년이 지나 손에 스며든 먹물이 빠지지 않고 중지에 혹이 생길 지경에 이르자 스승들은 "한 번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며 한 줄씩 쓱쓱 쓴 뒤 밖으로 나갔다.
그는 놀랐다. "나는 겉모습만 따 쓰려고 하고 있는데 선생님들의 글씨에는 골격이 있구나! 글씨에도 골격이 있다니?"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던 권창륜은 경인에너지에 다니던 1977년 마침내 국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때가 왔다고 느낀 그는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초정 권창륜은 현재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이사장이자 한국전각학회 회장이다. 일본 사람들은 회원만 돼도 일주일 동안 잔치를 연다는 중국 항저우(杭州)의 서화·전각 연구단체 서령인사(西��印社)의 명예이사이기도 하다.
그의 서예관을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을까? 그는 "서여기인(書如其人·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이라고 했다.
"자기가 아는 만큼, 생긴 것만큼 나오는 게 글씨입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곧바로 가식(假飾)이 되는 겁니다."
[예천=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