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고공농구의 서막을 열다 국내 최초의 트윈타워 한기범·김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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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구 최초의 트윈타워를 한 자리에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두 분의 농구 시작 배경이 궁금합니다.
한기범 키가 커서 농구를 시작한 거죠. 전 태어날 때부터 키가 컸다고 해요. 천안입장중학교에서 농구부원을 모집했었는데, 그 때 처음 시작을 하게 된 거죠. 소년체전 충남 대표로 서울에서 대회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거의 게임을 뛰지 못했죠.
김유택 아버지 아시는 분 아들이 농구계에 있었어요. “우리 아들이 큰데 운동 한 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해서 중학교 3학년 때 소개를 받은 거죠. 삼선중학교에서 현진석 선생님께 두 달 정도 배우면서 농구를 시작하게 됐어요.
두 분 모두 고등학교 진학을 농구 특기생인 아닌 시험을 보고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한기범 중학교 3학년 때 겨울 훈련이 정말 혹독했어요. 10년만의 강추위가 왔었거든요. 그 때 고생을 엄청 하면서 ‘운동이 정말 힘든 거구나’ 생각을 하고, 다시는 농구 안 한다는 마음으로 포기를 했죠. 시험을 봐서 천안북일고등학교로 진학을 했어요.
김유택 저도 마찬가지예요. 당시 선수 등록이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공부해서 성일고등학교로 진학을 했죠.
명지고로 전학하게 된 동기가 있었나요?
한기범 당시 명지고 김영석 선생님이 집까지 찾아오셔서 저를 꼬드기신 거죠. 정말 안 하려고 했는데, 넘어가고 말았어요. 그러면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다시 3학년 때 유급생 제재로 인해 경기를 뛰지 못하면서 방황을 많이 했어요. 농구 대신 당구 치러 다녔어요. 하하.
김유택 명지고로 가게된 배경이 재밌어요. 경복고에서 제가 너무 말라서 받아주질 않은 거죠. 당시 명지고가 창단 3주년이 돼서 장신자 수급이 필요했거든요. 한기범 선배는 이미 가있던 상태였고, 그 뒤를 이어 제가 들어가게 된 거죠.
농구를 늦게 시작했는데, 처음 농구에 대한 매력을 느낀 건 언제였나요?
김유택 시대적 배경상 재미로 농구를 할 수 없었어요. 키가 컸기 때문에 집안 사정도 어려워 먹고살기 위해 농구를 시작한 것이었거든요. 재미를 느낄만한 그럴 정신이 없었죠. 아마 대학교에 가서 처음으로 농구대잔치 우승을 경험하면서 ‘이런 기분이 있구나’라고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 같아요.
한기범 고등학교 2학년 때 재미를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긴 했지만, 방황을 많이 한 시기이기 때문에 저도 대학가서 흥미를 느꼈다고 봐야죠. 사실, 재미보다는 죽기 살기로 했던 기억밖에 없네요.
연·고대 진학 대신 한기범이 있는 중앙대로 결심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요?
김유택 사실, 주위에서 중앙대 진학을 많이 말렸어요. 이미 한기범 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둘 중 한 사람은 희생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당시 중앙대가 성적을 잘 내지 못하면서도 명지고에 도움을 많이 줬어요. 그 때만 해도 연·고대가 우승을 다 독식했기 때문에 다른 학교에서 우승을 하고 싶은 마음도 많이 있었고요.
서로 다른 스타일의 농구를 추구했는데, 가장 중점을 두고 연습을 했던 것이 있었나요?
한기범 유택이는 신장에 비해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돌파 능력이 뛰어나다면 전 슛이 정확했죠. 작은 선수들에게도 뒤쳐지지 않도록 신장을 배제한 모든 부분을 강화하는데 모든 초점을 맞췄어요.
김유택 한기범 선배는 신장에 비해 슈팅 능력이 좋아 장점이었죠. 전 몸이 말랐기 때문에 스피드를 늘릴 수밖에 없었어요. 같은 팀에 한기범 선배가 있었기 때문에 4번을 보면서 속공에도 참여를 해야 했거든요. 김주성 같은 그런 역할이었죠.
중앙대 시절 ‘쌍돛대’라는 수식어를 달고 중앙대 장기 집권 체제를 이루셨어요.
한기범 명지고 시절을 포함해서 유택이와 함께 제대로 대회에 나간 것은 중앙대 2학년이 돼서야 가능했죠. 보통 허재가 들어오고 나서 중앙대가 우승을 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미 그 전 해부터 우리는 대회에서 패배를 한 적이 없었어요.
김유택 제가 1학년 때 5관왕인가를 했는데, 아무튼 한기범 선배와 함께 뛴 이후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었으니까요. 우리 둘이 먼저 중앙대 전성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죠. 허재가 워낙 큰 인물이라서….
후배인 허재-강동희에 가려 빛을 못 본 부분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쉬움 같은 것은 없었나요?
한기범 아무래도 조금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둘 다 워낙 잘하는 선수들이었고 타고난 능력이 정말 좋았죠. 서로 할 수 있는 부분이 달랐기 때문에 센터와 가드가 윈-윈이 가능했던 거죠.
김유택 한기범 선배의 죄가 커요. 무릎과 발목 부상으로 일찍 은퇴를 해서 그래요. 프로에서 저와 함께 조금만 더 뛰었어도 빛을 더 낼 수 있었을 텐데요. 하하.
한국 농구의 역사가 되기까지, 부단한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같아요.
한기범 가장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두 발이 쉰 적이 없었다는 거죠. 쉬는 날도 빠지지 않고 연습을 했거든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선수들이 많은 반면, 저 같은 경우는 후천적인 노력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김유택 방열 감독님이 속옷 비화를 자주 말씀하시는데, 사실이에요.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투 백차(에어볼)를 했었죠. 제 기억으로는 자유투를 넣었어도 상황이 어렵긴 했던 것 같은데, 그 경기 이후 자유투 연습에 매진했죠. 자유투는 운동화를 신지 않아도 연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에게 방해될까봐 맨발로 속옷만 입고 자유투를 던지고 공이 떨어지기 전에 달려가서 잡는 것을 반복했었어요.
한기범 그런 일이 있었어? 난 전혀 몰랐네. 야간에 자유롭게 운동을 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대학시절부터 두 분 경쟁이 치열했다고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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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범 개인 운동이 밤 10까지였는데, 선수들이 들어가면 항상 유택이와 저만 남았어요. 서로 이기려고 연습에도 경쟁이 붙은 거죠. 승부욕이 강한 유택이가 더 심했어요. 연습할 때도 죽기 살기로 붙었죠. 시작은 항상 유택이었고요. 포스트에서는 워낙 전투적으로 해서 우리 근처로 오면 다른 선수들이 다칠 정도였죠. 대학 내내 선의의 라이벌이 됐기 때문에 기량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김유택 코트 안에서는 선후배가 없어요. 1대1 연습도 승자패자가 가려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선의의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었죠. 선배가 온순한 편이고 난 악악거리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거칠어지면 선배 입장에서 짜증이 나겠죠. 나쁘지 않은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악의가 있는 게 아니니까요.
명지고-중앙대-기아를 함께 뛰었던 단짝이셨는데, 추억거리도 많을 것 같습니다.
김유택 그런 질문을 많이 받지만 의외로 특별한 에피소드는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남대문에 있던 백화점에서 에스컬레이터가 신기해서 한기범 선배가 한 번 더 타자고 한 기억도 나고, 종로 1가를 둘이 같이 걸으면 너무 키가 크니까 창피하다고 길 양쪽 끝으로 떨어져서 걸어 다니고 그랬죠.
키가 커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면요?
김유택 키 커서 좋은 것은 운동할 때 빼고 없죠. 옷 사 입는 것도 불편하고…. 고등학교 다닐 때는 검정색 학생화도 275mm까지 밖에 나오지 않아 다른 운동화 신었다가 학생 부장한테 걸려 혼도 하고 그랬죠.
한기범 저는 맞는 운동화가 없어서 거의 뒤를 접어신고 다녔어요. 다른 선배한테 농구화를 빌려 신은 적이 있는데 정말 푹신푹신 하더라고요. 김유택 그 때는 지금의 스니커즈처럼 천으로 된 발목까지 오는 운동화를 신었거든요. 아식스 타이거 같은 농구화 선물 받으면 경기 때만 신는 거죠.
같은 센터 포지션이라 겹치는 부분은 없었나요?
김유택 한 공간에 한 명이 움직이는 경기를 하다가 둘이 들어가서 하다 보니 연습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죠. 그래도 서로 스타일이 달랐기 때문에 엉키는 일은 잘 없었어요.
한기범 한 번 연습하면 적용이 잘 되는 편이었죠. 자연스럽게 연습한 습관대로 서로 로테이션이 잘 됐어요. 중앙대가 맞추는 단계였다면 기아에서는 눈빛만 봐도 통하게 된 거죠.
국내 농구 최초의 더블-포스트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었는데요.
한기범 당시 방열 감독님의 지도 방식이 아주 새로웠어요. 전혀 몰랐던 시스템이었죠. 플레이도 쉽고 점수도 쉽게 얻어낼 수 있는 패턴이었죠. 훈련방법도 특이했죠. 보통 대학 때까지 코트에서 뛰는 훈련이 먼저고, 그 다음에 공을 만지는 게 순서였죠. 하지만, 방 감독님은 저희에게 처음부터 공을 만지게 하고, 포스트 플레이에만 집중하게 만들었죠. 중앙대 시절 전체적인 부분을 배웠다면, 기아에서는 득점을 할 수 있는 패턴을 배운 것 같아요.
김유택 방 감독님은 원래 불필요한 훈련 방식을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그냥 맨몸으로 뛰는 것보다 공을 들고 뛰어야 된다는 생각이셨죠. 체력 훈련은 따로 해야 한다는 주의였죠. 사실, 대학시절 정봉섭 부장님이 방 감독님께 자문도 많이 얻어 가며 미리 더블-포스트를 준비하셨던 거죠. 그런 부분이 기아 때까지 연결이 된 거죠.
당시로서는 볼 수 없었던 덩크슛으로 재미를 주셨어요.
한기범 그 당시는 덩크를 해도 욕먹는 분위기였죠. 덩크를 할 줄 아는 선수가 있어도 안 했어요. 유택이도 머뭇거리고 잘 안 하더라고요. 중앙대는 그런 부분이 자유로워서 전 틈만 나면 덩크를 시도했었죠.
김유택 고등학교 때 김봉배 선생님이 덩크를 하면 자장면 사준다고 해서 처음으로 성공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 때 가서 힘이 붙으면서 덩크를 할 수 있었지만, 경기 중에는 체력적인 부담이 많아 잘 안 되더라고요. 덩크 하다가 실패하면 또 우스워지잖아요. 한기범 선배는 러닝 점프가 좋았죠. 예전에 프로스펙스 대형 광고 표지로 한기범 선배 덩크 장면이 있는데 그 아래 수비보고 있던 사람이 이충희 선배였죠. 하하. 그 사진은 정말 잘 나왔어요.
기아 시절 고려대와 연세대 멤버가 화려했잖아요?
김유택 고려대는 전희철, 김병철, 현주엽, 신기성이 있었고, 연세대는 서장훈,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이 있었죠. 우리가 말년 때였기 때문에 정말 힘들었어요. 고려대와 만났던 농구대잔치 4강 3전 2선승제 경기에서 1승을 먼저 거두고 너무 힘들어서 못 뛰겠더라고요. 그래서 2차전은 아예 포기하고, 3차전을 다시 이기고 올라갔던 기억이 나요. 2차전 끝나고 병철이와 주엽이가 형들이 좀 이상하다고 그러더라고요. 하하.
고려대와 연세대, 어떤 팀이 더 상대하기 힘들었나요?
한기범 연세대가 더 힘들었죠. 서장훈이 크기는 크더라고요. 한 번은 속여도 그 다음에는 블록을 당했죠. 서장훈 같은 경우는 체격도 좋고, 외곽 능력까지 좋아서 상대하기 힘들었어요.
김유택 연세대가 힘들었던 것은 문경은과 우지원 때문이기도 해요. 슛이 너무 좋으니까요. 속공을 나가면 드라이브 인을 하는 게 정석인데, 양쪽 코너에 문경은과 우지원이 서 있는 거죠. 쏘면 다 들어갔으니까 힘들 수 밖에요.
당시 방열 감독과 최인선 감독의 스타일은 어떻게 달랐나요?
김유택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달랐죠. 방 감독님은 코트에서 장악하는 스타일이셨고, 최 감독님은 코트에서는 순했지만, 작전지시는 날카로웠죠. 방 감독님한테는 농구 기술을 많이 배웠어요. 생전 처음 보는 것을 자꾸 시켜서 형들이 짜증을 낼 정도였으니까요. 워낙 치밀하고 계산적인 농구를 하셨기 때문에 상대 분석력도 뛰어났죠. 최 감독님도 많은 영향을 받으신 것 같아요.
두 분을 막기 위해 현대와 삼성의 견제도 정말 심했던 것으로 아는데요.
김유택 그 때 엄청 맞았죠. 현대에는 임정명 선배, 삼성에는 박종천 선배가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노쇠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죠. 스크린 가면 주먹이 배로 들어오고, 중요 부위를 맞아 대굴대굴 구른 적도 많았죠. 한기범 눈을 맞아 찢어지는 건 일도 아니었죠.
사건사고도 많았잖아요? 현대와의 결승전에서 폭력사태도 있었고요.
한기범 그 사건이 비화 돼서 그렇지 다 김유택 싸움이에요. 대걸레도 싸움을 말리려고 다가오지 말라고 휘둘렀던 건데 사진이 제대로 잡혔죠.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지면 바로 제명이죠.
김유택 형 그런 사진 나오기 힘들어. 하하. 그 당시 임정명 선배와 마찰이 많았죠. 선배 입장에서는 저랑 맞붙으면서 기분이 많이 상했을 거예요. 골대 밑으로 같이 넘어졌는데 얼굴을 마주보고 쓰러진 거죠. 바로 귀싸대기가 올라오더라고요. 저도 열 받아서 때렸죠. 일반인이 생각하는 그 정도의 폭력사태는 아니에요. 언론에서 부풀려진 게 많았죠.
김유택 코치는 예전에 눈도 찢어졌죠?
김유택 박수교 선배한테 맞았던 건데, 말싸움하다 시작이 됐죠. 제가 “마음대로 해보라고”했다가 바로 어퍼컷이 들어오더라고요. 예전에는 심판이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각지대가 많았어요. 선배들은 사각지대도 잘 알고 있더라고요. 퇴장 당하면 젊은 우리만 손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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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시절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국제대회에서는 더블포스트를 잘 활용하지 않았습니다.
김유택 웨이트에서 중국 선수들에게 상대적으로 밀리다보니까 힘 좋은 박종천 선배나 이문규 선배를 많이 활용했죠. 한기범 선배는 힘도 있고 신장도 좋아서 센터를 봤지만, 저는 4번을 보면서 신장과 스피드를 살린 수비에서 장점이 있긴 했죠.
국내와는 다르게 국제대회에서는 쌍돛대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어요.
김유택 세계선수권에서는 바로 ‘깨갱’ 이었죠. 그 때만 해도 센터는 비행기 타는 순간 없어진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까요. 그 때 샤킬 오닐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데 뒤에 서 있는 아이재이아 토마스가 안 보였으니까요. 충격이죠. 마이클 조던이 제 키에 가드보고 있는데, 할 말이 없죠.
한기범 키도 크고 몸도 두꺼운데 그 몸매에 그렇게 빨랐으니까 정말 산이었죠, 산. 역시 농구는 운동능력과 체격이 중요해요. 우리는 센터이면서도 말랐으니 통하지가 않았죠.
국제대회 나가서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김유택 스페인 세계선수권 대회 나갔는데, 이민현 선배가 현지 팬이 싸인 해달라고 해서 별 그려준 일도 있었죠. 한글을 모르니까 아무 싸인이나 한 거죠. 하하. 그 때는 라면이나 김치 같은 것도 갖고 다녔었는데, 막내가 센터 네 명이었어요. 방에서 끓이면 냄새나니까 화장실에서 코드 꼽고, 코일로 되어 있는 옛날 버너로 라면을 네 번에 나눠 끓였어요. 다 끓이고 우리 먹고 자면 4시간이 넘게 걸렸죠. 손빨래도 모두 우리 몫이었죠.
한기범 그 당시는 돈까스도 귀해서 그런 거 한 번 먹으면 다 같이 모여서 먹었죠. 소스도 케첩이 전부였는데도 정말 맛있었죠.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센터가 있었다면요?
김유택 외국 선수들은 다 힘들었던 것 같고, 국내에서는 한기범 선배 빼면 임정명, 김성욱, 서장훈이 까다로웠어요.
각 포지션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했는데, 통제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김유택 힘들었죠. 허재가 굉장히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밀어붙이는 기질이 있었거든요. 태릉선수촌에서 한 번 허재가 규율을 어겨서 이문규 선배가 운동장 100바퀴를 돌라고 시킨 적도 있었으니까요. 대학 때는 허재가 대장이었죠. 뭐. 정봉섭 부장님이 정말 무서웠는데도 한 번 우기면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죠. 반면, 강동희는 털털하고 온순해서 통제할 일이 없었어요.
후배들과의 술자리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한기범 운동 생활하면서 숙소에서만 생활을 하다 보니까 가끔 술자리를 통해서 편안하게 단합대회를 가졌어요. 그래야 진솔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까요.
김유택 한기범 선배는 술을 즐기지는 않는데 아마 한 번 마시면 가장 주량이 셀 걸요. 강동희는 대학 때 술을 못 먹다가 허재 따라다니면서 배웠고, 저도 담배를 한기범 선배한테 배웠는데, 본인은 담배를 끊더라고요. 술은 이충희 선배 따라다니면서 많이 먹었죠.
술자리에서의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기아 시절 ‘혈서 사건’도 있었잖아요?
김유택 기아에 있을 때 94년도인가…. 농구대잔치를 치를 때였어요. 중앙대한테도 지고 팀 분위기가 좋지 않았어요. 그 때 한기범 선배와 김영만, 강동희 등과 강남의 한 술집에서 술 한 잔을 하면서 의기를 투합했죠. 술이 걸쭉하게 취해서 누군가가 매번 말로만 잘한다고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이자고 했죠. 사실, ‘혈서 사건’이라고 말하기에는 부풀려진 거고요. 경기를 뛰어야 하니까 칼로 할 수 없고,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서 나름 혈서를 썼어요. 하하. 뭐라고 썼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 해 결국 우승을 이끌어냈죠.
보통 장신 선수들이 부상 때문에 고충이 많잖아요?
김유택 의외로 우리는 부상이 많지 않았어요. 대학 4학년 때 헤모글로빈 수치가 9.6(일반인의 경우 13 정도)까지 떨어져서 종아리가 딴딴하게 굳어진 적이 있었어요. 근육통인 줄 알고 있었는데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였죠. 악성 빈혈이었던 거죠. 갑자기 쓰러져 죽을 수도 있다는 병원 진단 받고 철분 약 먹으면서 6개월 정도 쉬었어요.
한기범 저는 은퇴 직전에 부상으로 고생을 좀 했어요. 90년도에 국내에서 무릎 수술을 받고, 계속 통증이 있어 일본으로 건너갔더니 수술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죠. 재기하는데 1~2년이 걸렸는데, 다시 발목이 아팠죠. 당시 대포주사(당시 진통주사를 일컬음)를 맞고 뛰는 경기가 많았는데, 이제는 그 주사도 효과가 없어서 결국 은퇴를 택했죠. 유택이가 계속 뛰라고 권유했지만, 원 없이 뛰어 봐서 후회는 하지 않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다면요?
한기범 83년에 있었던 춘계대학농구연맹전이 가장 기억에 납니다. 첫 우승을 이끌었던 경기죠. 우린 무명 선수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지만, 고려대는 최철권, 김진, 전창진 등이 있었고, 연세대는 오세웅, 유재학 등이 있었거든요. 당시 정호영 선배가 가드를 맡았었는데, 군대를 현역으로 갔다 와서 뛴 선배였죠. 아마 우리한테 올려준 앨리웁 패스만 해도 유택이한테 10개, 저한테 5개씩 어시스트를 했을 겁니다.
김유택 저도 그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전반 끝나고 10점을 뒤졌었는데, 후반 끝날 때 10점을 이겼죠. 우리가 높이가 있으니까, 상대가 체력이 떨어진 후반에는 안 되더라고요.
김유택 코치의 경우 국내 최초로 영구결번 및 은퇴 경기의 영예를 안기도 했어요.
김유택 당시 은퇴 경기를 할 때 비용이 꽤 많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선수 자격이 없어서 잠깐 뛰기로 했었는데, 많이 뛰었죠. 선수로서 영예롭고, 의미도 컸습니다. 아마 제가 하고 나서 프로야구에서도 영구 결번 이야기가 나왔을 거예요.
농구인 한기범은… 1964년 6월 7일 출생인 한기범은 1980~90년대를 대표하는 당대 최장신 센터다. 그는 명지고와 중앙대, 기아를 거쳐 김유택과 함께 국내 최초로 한국 농구의 센터 르네상스를 이뤄냈다. 1983년부터 1993년까지 대표팀에서 활약했으며, 최근 두 차례의 ‘말판증후근’ 대수술을 받고, 어린이 농구교실 및 방송 등 폭넓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농구인 김유택은… 1963년 10월 10일 출생인 김유택은 한국 농구 최초로 영구결번이 된 1980~90년대를 풍미한 명센터 출신이다. 명지고, 중앙대, 기아에서 현역 선수로 뛴 그는 한기범과 함께 트윈타워로 중앙대 전성시대를 열었고, 프로화 이후 기아에서도 우승을 이끌었다. 2005년부터 엑스포츠 해설위원으로 활동했고, 2008년부터 남자국가대표팀 코치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