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불황,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레퍼토리 시스템 도입·지역분산·관립극단

구조조정 통해 해법 찾아야


한국연극의 불황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불황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만성적이다. 그러나 오늘의 불황이 더욱 심각한 것은 연극이 사회적 크기를 상실했다는 사실에 있다.


1960~70년대만 해도 극장의 수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밖에 되지 않았고, 그래서 한 극단의 공연에 1주일 이상 대관이 되지 않을 정도로 공간부족이 심했다. 하지만 새 공연이 막을 올릴 때마다 신문에서 큰 화두로 삼을 만큼 사회적 크기를 갖고 있었고, 연극인들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가난했지만 연극을 한다는 자부심만큼은 갑부 못지않았다.


그런데 오늘의 불황은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철학적이다. 글로벌 차원의 경제적 위기 때문에 연극의 불황은 이제 정당성마저 획득해서 사회적 정치적 지원을 받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고 기업들은 문화홍보예산부터 긴축할 것이 틀림없다. 철학적 불황과 경제적 불황이 겹친 이 겹 불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연 해법은 있는가?


원론적 처방을 피해달라는 편집진의 청탁을 존중해서 철학적 불황에 대해서는 그간에 여러 차례 여러 지면을 통해서 발표한 글을 참조해달라는 요청으로 대신하겠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연극은 시대의 정신과 시대의 미학으로 소통하지 않으면 연극의 생명인 현장성을 살릴 수 없고, 직접적이며 즉각적으로 소통되는 현장성이 없는 연극은 죽은 연극이며, 죽은 연극이야말로 연극 불황의 제1원인이라는 점, 이 세 마디는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점 양해를 바라며 이 글에서는 몇 가지 현실적인 불황타개책을 제안하는 것으로 목적을 삼겠다.


첫째, 진정한 의미의 레퍼토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제법 여러 극단들이 이름에 레퍼토리 극단임을 천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이름만의 표방일 뿐 극단의 공연정책이나 운영방식까지 레퍼토리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는 극단은 한국에 하나도 없다. 연극문화가 가장 발달한 유럽에 가보면 대부분의 극단들이 레퍼토리 시스템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일별로 공연목록이 다르다. 오늘 햄릿으로 출연했던 배우가 내일은 로미오로 출연하고 그 다음 날은 또 다른 현대극에 출연한다. 같은 극장에서 1주일에 3편 내지 많으면 5편까지 올리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무대장치가 설치는 물론 전환이 쉬워야 한다.


오늘날 유럽의 많은 연극들이 무대에 세트를 세우는 대신 몇 가지 상징적인 도구들로 시각적 환경을 표현하는 것이나, 조립과 해체가 쉬운 무대 디자인을 자주 구사하게 된 것도 사실은 이와 같은 레퍼토리 시스템을 운영하는 필요에 의해 형성된 관행일 수 있다. 배우들도 콜이 있으면 하루 연습으로 출연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늘 몇 가지 카드를 상비하고 있어야 한다.


동구권의 많은 주요 배우들은 대개 10개 이상의 레퍼토리를 구비해놓고 늘 대기하고 있다.


지난 10월 캐나다에 국제 심포지엄이 있어 다녀왔는데 스트래트포드 셰익스피어 연극제와 나이아가라-언-더-레이크의 쇼 연극제 모두 레퍼토리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극단적인 경우 낮에 한 극장에서 버나드 쇼의 <워렌부인의 직업>에 출연했던 배우를 저녁 때 다른 극장에서 릴리언 헬만의 <작은 여우들> 공연에서 보기도 했다.


레퍼토리 시스템은 한국처럼 관객의 층이 얇고 제작비가 많이 드는 곳에서는 대단이 유용한 대안일 수 있다. 관객의 불황은 한 마디로 관객이 부족하다는 것인데, 관객의 수효를 늘려서 불황을 타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관객들로 하여금 더 자주 극장을 찾아오게 해서 극복하는 것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어쩌면 더 중요할 수 있다. 레퍼토리 시스템은 무대전환이 용이한 세트를 필수로 한다. 그런 무대는 제작비가 덜 든다. 경제적 효율을 높이는 것도 불황의 크기를 축소하는 정당한 방법이다. 레퍼토리 시스템은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금 한국연극이 과감하게 시도해볼 만한 대안이다.


둘째, 연극의 지역분산이 필요하다. 한국연극의 대부분은 지금 대학로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간이극장들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150개가 넘는 극장들이 대학로를 도배하고 있지만 무대와 객석과 시설을 제대로 갖춘 극장은 10개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조악한 공연장들은 문화적 관심이 적은 임대업자들의 배만 불려줄 뿐 연극의 선순환을 돕지 못한다. 이런 불편한 극장에서 빈궁하게 제작된 연극을 본다는 것은 연극을 업으로 삼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고통일 수밖에 없다.


한 번 극장을 찾은 사람을 놓치지 않는 것이 관객의 층을 넓히는 확실한 길인데, 이런 환경에서 아무리 좋은 연극을 해보인들 관객들이 경험한 고통을 잊게 하기란 쉽지 않다. 미국의 연극이 브로드웨이의 지나친 상업화로부터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지역으로 지역으로 분산해갔듯이 우리의 경우도 이미 유흥지가 되어버린 대학로로부터 벗어나 지방으로 지역으로 중심을 옮겨야 할 때가 되었다.


꼭 정해진 극장에 가서 정해진 시간에 공연을 봐야 하는 연극의 특성상 극장의 물리적 접근성을 높여주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 각 지방도시마다, 서울의 각 구마다 외관이 화려한 문화회관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화려한 건물들은 그 공간을 채울 프로그램이 없어 아깝게 놀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 문화회관들을 공연친화적으로 개보수한 다음 수준 높은 제작이 가능한 극단들을 상주 극단으로 초청해서 문화예술위원회나 지역문화재단의 집중지원을 받게 한다면, 허구한 날 시위대나 술 취한 무리들에 점령당하는 대학로까지 먼 길을 굳이 나오지 않더라도 가까운 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질 좋은 연극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러면 관객의 저변은 당연히 확대되지 않겠는가.


극장공간의 수요가 분산되면 대학로의 나쁜 공연장들은 자연 구축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학로도 변변한 극장들 위주로 새로운 연극문화를 형성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국립극단과 시립극단 등 관립극단이 진정으로 국가와 해당도시를 대표할 만한 작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현재의 정체된 구조를 조정해야 한다.


한국연극의 여건상 이들 관립극단은 전용의 극장과 연습실과 제작 인프라를 갖춘 유일한 직업극단이다. 여기서 당연히 최상의 연극이 생산되고 창조되어야 하는데 우리의 실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정단원제가 갖고 있는 함정이다. 이 제도는 새로운 재능의 발굴을 어렵게 만든다.


늘 같은 사람들이 늘 같은 방법으로 만드는 연극은 피터 브룩의 용어를 빌리자면 죽은 연극이기 쉽다. 특히 ‘새로운 것’과 ‘젊은 것’에 열광하는 현대의 시대정신을 고인 물 같은 정단원제로는 구현할 수 없다. 과감히 정단원제를 해체하고 예술감독과 제작 인프라만을 갖춘 관립극단으로 성격전환해야 한다.


오디션이나 초청을 통해 최고의 예술가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제공하면서 이미 갖추어져 있는 최고의 인프라를 이용해 최고의 작품을 제작하면 그런 연극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연극이 불황인 것은 무엇보다도 볼만한 연극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융통성 없는 고정단원제로는 볼만한 연극을 생산해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국립극단, 시립극단들이 1년에 두 편씩만 문제작을 생산해낸다 해도 3,4년 후에는 1년을 가동할 레퍼토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한국처럼 1 시즌 공연으로 거의 모든 연극이 생명을 다하게 방치하는 나라는 적어도 연극 선진국가들에는 없다. 지금 서울국제연극제에 초청되는 유럽의 문제작들은 대부분 3년 이상 공연되어온 것들이다.


어느 경우에는 5년, 10년, 심지어 20년이 넘도록 레퍼토리로서 살아남은 것들도 있다.


그런 연극을 창조해내는 구조가 우리한테는 절실히 필요한 것이고 그것을 가장 성공적으로 시도할 집단은 역시 관립극단밖에 없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관립극단이 주인인 국민을 위해서 과감한 구조개혁으로 연극불황 타개에 앞장설 수 있기를 희망한다.


◇ 김윤철 약력

중앙대 예술대학원(석사), Brighan Young University(Ph.D)


미국 브리검영대학교 조교 및 시간강사, 세종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학처장 역임,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한일 연극교류협의회 회장 역임, 국제연극평론가협회(I.A.T.C)부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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