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 이제는 부산에서 유소년과 함께 농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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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선수 시절 김희선은 포인트가드와 슈팅가드 자리에서 뛰었다. 중앙대를 거쳐 실업팀 삼성전자(현 서울 삼성)에 입단했을 때만 하더라도 득점력이 뛰어난 가드 겸 포워드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와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최근 들어 코트에 나가서 뛰는 시간보다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러나 김희선은 결코 실망하지 않았다.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코트에서 뛴 마지막 무대가 된 지난 시즌 주장을 맡아 코트 안팎에서 후배들을 잘 이끌었다. 주전은 아니었지만 상대의 발 빠른 가드나 슈터를 막아야 할 때 코칭스태프는 김희선을 찾곤 했다. 그는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 뛰었다. 김희선은 챔피언결정전에서 모비스의 가드 양동근을 조성민, 신기성과 번갈아 가며 수비했다.
모비스의 우승으로 마무리됐지만 김희선이 챔피언결정전 내내 보여준 투혼은 후배 선수들에게 본보기가 됐다.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 양동근은 “(김)희선이 형의 체력은 정말 대단했다. 어떻게 저런 체력을 유지했는지 모르겠다. (신)기성이 형도 그렇고. 내가 아직 많이 모자라고 배워야 할 게 더 많다는 걸 두 형이 가르쳐 줬다”고 말했다.
미련은 없다
김희선은 준우승 이후 2주 동안의 짧은 휴가를 마치고 5월 중순 팀에 복귀했다. 더 이상 선수 신분은 아니었지만 김희선의 표정은 밝았다. KTF가 운영하는 유소년농구캠프를 맡게 됐다. 지도자 연수나 코치직을 보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25년 동안 자신이 해온 농구를 쉽고 재미있게 어린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부산 사직체육관에 있는 구단 사무실에서 유니폼 대신 평상복을 입고 농구캠프 준비에 한창인 김희선을 6월 20일 만났다.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농구공을 잡았으니까 25년이나 농구를 했다. 선수생활 연장에 대해선 미련이 없다. 후회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운동했다. 2006-07시즌이 열리는 동안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몸이 아프거나 더 이상 뛸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 은퇴를 결심한 건 아니다. 이제는 물러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시즌을 치르는 동안 직간접적으로 추일승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진로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주위에서도 ‘이제 그만 뛰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반응이 많았다. 2005-06시즌이 좀 아쉽다. 그때는 정말 준비를 잘했는데…. 어쩐 일인지 운동도 안 되고 설상가상 무릎까지 다쳐 수술을 했다. 재활운동과 치료를 하느라 3,4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팀에 복귀했는데 내 포지션에 젊은 후배들이 넘쳤다. 그때 무릎이 안 아팠다면 아마 계속 뛰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무척 마음이 편하다. 다음 시즌부터는 벤치에 앉아 마음을 졸이면서 동료선수들이 뛰는 걸 안보게 됐다. 관중석에서 편안하게 경기를 봐야겠다.
2006-07 챔피언결정전이 결국 마지막 경기가 됐다.
준우승한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다. 2005-06시즌과 지난 시즌 우리 팀은 약체로 평가 받았다. 그런데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좋은 경기를 했다. 챔피언결정전까지 갔고 또 7차전까지 승부를 끌고 가지 않았는가. 나는 이제 팀을 떠났지만 남아 있는 선수들과 코칭스태프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승을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모비스도 우승할 때가 됐다. 2005-06년 챔피언결정전 때 모비스는 삼성에게 내리 4경기를 내주면서 물러나지 않았나.
굳이 아쉬운 장면을 들자면 7차전이다. 6차전까지 팀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챔피언결정전이 시작될 때는 2006년 모비스처럼 우리도 4경기를 내리 질 것 같았다. 하지만 4월 25일 홈구장인 사직체육관에서 열린 4차전에서 이기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됐다. 편하게 경기 하자.’
4월 29일 6차전을 이겨 3승3패가 되자 팬들이 열광했다. 챔피언결정전 내내 모비스보다 관심을 덜 받던 우리 팀이 집중조명되기 시작했다. 그게 오히려 독이 된 것 같다. 선수들도 7차전을 앞두고 부담을 많이 느꼈다. 그전까지는 우승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않았는데 6차전을 승리하자 ‘우승’이라는 단어가 바로 다가왔다. 7차전에서 난 선발로 나서지 않고 벤치에 있었다. 우리 선수들이 뛰는 걸 보니까 ‘오늘 힘든 경기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1쿼터 초반부터 실수가 나왔고…. 나도 경기 중간에 뛰었는데 모비스 선수들 움직임을 보니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수들이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어 했고. 내 자랑은 아니지만(웃음) 챔피언결정전을 치르면서 준비를 많이 했다. 경기가 끝난 뒤 혼자 훈련을 했다. ‘1,2살만 나이가 적었어도 (양)동근이를 더 잘 막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5,6차전 때 우리가 양동근을 수비한 방법을 모비스 유재학 감독이 잘 파악하셨다. 양동근에게서 크리스 윌리엄스로 나가는 패스를 막는 게 핵심이었는데 7차전 때는 우리가 수비를 하면 동근이가 바로 드리블을 하면서 치고 나갔다. 유감독이 포인트가드 출신이어서 어떻게 하면 우리 수비를 뚫을 수 있는지 잘 가르쳐 주신 것 같다.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단지 초등학교 때 키가 커서 하게 됐다.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3학년 때 키가 140cm쯤이었던 같다. 시골 학교였는데 농구부가 있었다. 지도 선생님이 권유해 자연스럽게 농구부에 들어갔다. 그런데 3학년 때는 운동하기가 정말 싫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때는 운동하면서 많이 맞았다. 집에서도 왜 운동을 하느냐고 반대가 무척 심했다. 농구부에 들어간 지 1~2개월 지났을 때 합숙소에서 도망쳤다. 그때 이후 아무리 힘 들어도 도망친 적은 없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뒤에 더 힘들게 운동했을 때가 있었다. 중앙대 시절이다. 당시 강정수 감독이 팀을 맡고 있었는데 정말 강도 높은 운동을 했다. 프로에서도 그렇게 운동한 적은 없다. 강감독께서 선수들에게 운동을 더 열심히 하라고 다그친 이유는 있었다. 내가 중앙대에 들어 갔을 때 다른 고등학교에서 뛰던 동기들이 연세대나 고려대 등 다른 학교로 많이 진학했다. 그래서 (중앙대)선수층이 다른 학교에 비해 얇았다. 그래서 강감독이 우리를 혹독하게 조련했다.
그동안 수많은 경기를 치렀는데 기억에 남는 경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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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농구대잔치 때다. 고려대와 치른 4강전이었는데 다 이긴 경기를 내줬다. 정말 허무하게 역전패했다. 그래서 그런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마지막은 2001년 삼성 소속으로 우승했을 때다. 그리고 대표팀에 거의 뽑히지 못했는데 상무 시절 딱 한 번 선발됐다. 태극마크와는 인연이 없었던 것 같고 운이 안 따라준 것 같다. 솔직히 대학 때나 프로 원년 때까지는 ‘내가 (대표팀에) 뽑힌 선수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나를 안 뽑나’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실력이 있는 선수들이 선발됐기 때문에 아쉬운 건 없다.
부산 사나이를 꿈꾼다
김희선의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다. 대학 진학 후 실업과 프로무대를 거치며 서울과 수도권에서 생활했다. 2005년 KTF로 이적한 뒤 부산 생활이 시작됐지만 시즌이 끝나면 아내와 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부산이 아닌 서울에 있는 김희선의 집이다. 시즌도 끝났고 이제 더 이상 빡빡한 경기 일정에 시달리면서 집을 떠나 합숙소 생활을 하는 선수도 아니다. 그런 그가 최근 다시 ‘빵점 아빠’가 됐다. 그의 이름을 딴 유소년농구캠프 때문이다. 5월 중순 부산에 내려온 김희선은 2주일에 한 번꼴로 서울에 간다. 지금까지 두 번 집에 갔다.
은퇴 후에 더 바쁜 것 같다.
그렇다. 선수로 뛸 때도 유소년농구캠프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캠프가 정말 쉬워 보였다. 강사나 코치 선생님들이 와서 아이들에게 그저 농구만 가르쳐 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일을 맡게 되니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정신 없이 바쁘다.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을 셔틀버스에 태워 보내는 것도 단순한 게 아니다. 알고 보니 그런 작은 일 하나에도 세세히 신경을 쓴다. 예를 들어 버스 자리에 앉는 방법도 알려 준다. 집에 가는 동안 버스 안에서도 간단한 훈련을 한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새롭다. 운동할 때보다 시간이 더 잘 간다. 하루가 너무 짧다. 6월 23일 모비스 유소년팀과 정기 교류전이 있다. 그것도 준비해야 하고 일거리가 늘어나고 있다. 부담은 안 된다. 정말 즐겁다. 어린아이들에게 즐겁게 농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기쁘다. 구단에 원래 캠프 업무를 담당하는 분이 따로 계신다. 그런데 회사 업무와 함께 캠프 일을 하기 때문에 미흡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구단에서도 내가 캠프를 맡게 된 게 잘된 일이라고 말한다.
집에 자주 가지 못하는데.
초등학교 2학년인 딸 아이 목소리가 듣고 싶다. 아내도 선수로 뛸 때보다 더 집에 안 들어온다고 잔소리를 한다. 미안하다. 선수생활을 끝낸 상태라 실업자 아닌가(웃음).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은퇴 선수들에게는 가장 난처할 때가 지금이다. 하지만 캠프 일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집사람에게도 잘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노력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요즘 부모님들은 예전 같지 않다. 캠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코치나 책임자, 담당자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운동만 했지 다른 능력은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런 소리만큼은 정말 듣기 싫다. 그저 운동만 가르치고 시간만 때우고 돈을 받으려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부산에서 2년 동안 지내다 보니 이곳이 무척 마음에 든다. 서울과 비교해 집값과 음식값이 차이가 많이 난다. 부산이 생활하는 데 훨씬 여유로워 보인다. 캠프 일이 정착되면 집사람을 잘 설득해 부산으로 이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자신의 이름을 단 농구캠프인가.
그렇다. 하지만 마케팅과 홍보, 지원 문제 그리고 인지도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KTF라는 팀 명칭도 그대로 함께 사용한다.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캠프라서 그런지 더 애착이 가는 건 사실이다. 물론 아마추어나 프로팀의 지도자 생활을 하는 게 목표다. 그러기 위해선 많이 공부해야 하고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 기회가 되면 꼭 초등학교 농구팀을 맡고 싶다. 어릴 때 정말 힘들게 운동했다.
솔직히 초등학교 시절은 좋은 기억이 없다. 아이들에게 재미있고 능률적으로 농구를 가르쳐주고 싶다. 물론 지금 맡고 있는 캠프는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나치게 승부에 집착한다. 아이들은 그저 운동하는 기계가 될 뿐이다. 평생 운동만 하고 살 수는 없다. 나도 25년 동안 농구만 했다. 이제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이런 도전을 어떤 이들은 빨리 할 수 있다. 그 길을 잘 찾아주는 것도 지도자가 해야 할 몫이라고 본다.
그저 운동만 가르치고 경기에서 무조건 이기게 하는 것만이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이제는 변해야 한다. 캠프를 떠나 더 크게 목표로 삼는 게 있다. 서울은 유소년과 청소년 스포츠 클럽시스템이 잘 조직돼 있는 편이다. 하지만 부산만 하더라도 그렇지 못하다. 농구뿐만 아니라 다른 종목까지 포함한 클럽시스템을 만들고 싶다. 부산에 정착하고 싶은 또 한 가지 이유다.
김희선
1973년 6월 29일 생
188cm/92kg
춘천 근화초-춘천중-강원사대부고-중앙대-삼성전자-상무-수원 삼성-서울 삼성-안양 SBS-부산 KTF
SPORTS2.0 제 57호(발행일 06월 25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