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7년 3월 27일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예술은 배고파야 한다’고 누가 그랬나. 예술을 하는 이들의 원동력은 배고픔이 아닌 배고픔을 가시게 해주는 재물인 것을. 확고한 신념 하나로 창작활동을 해왔을 것이라 예상했던 최용석 소리꾼에게 수년간 판소리를 놓지 않는 이유를 묻자 그는 시니컬하게 답했다. “누구나 일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경제적 여력 때문이 아닌가요. 예술가라고 별거 없답니다.” 더 근사한 답변을 바랐다면 무엇을 위함이었을까. 그는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예술가도 노동자라 답했다.
창작 판소리 계보를 이어
판소리 대중화에 앞장서다
풍자와 해학의 민족답게
시국을 노래해 대중과 교감
예부터 판소리에는 서민의 애환이 담겨있다. ‘한 판’에 담긴 슬픔과 분노, 그리고 빈곤까지. 모든 이야기는 우리 삶의 바닥에서부터 시작됐고 그 소리를 내는 광대는 매번 서민의 옆에 서 있었다.
-국악인이라 불리는 걸 꺼린다고.
“꺼리기보단 불편해요. 전 ‘국악’이라는 틀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물론 국악이 전공이고 지금까지도 판소리를 하고 있지만요.(웃음) 제가 하고픈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방식의 범위가 더 넓어졌으면 좋겠거든요.”
-그렇다면 자신을 뭐라고 소개하나.
“소리꾼 최용석, 공장장 최용석이라고 불러주세요.”
-음. 명창은 어떤가.
“제게 명창이라는 칭호는 제발 접어두세요.(웃음) 너무 부담스런 칭호에요. 자신을 명창이라 소개하는 건 조금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가수 조용필씨께서도 스스로를 가왕이라고 표현하진 않잖아요. 순전히 대중의 요청으로서 불리는 거죠.”
-공장장은 더 이상하지 않나.
“전혀요. 공장에서 물품을 찍어내는 것만이 노동이 아니에요. 예술을 한다는 것은 예술가가 노동활동을 하는 것 아닌가요.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하죠. 먹고사는 모든 일이 노동이랍니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비교적 자신의 이상과 맞닿아 있다는 거예요. 그만큼 가난도 자연스레 따라 오는 것 같고요.(웃음)”
-작년까지 중앙대 출강을 했다고.
“네. 감사하게도 학교에서 찾아주셔서 강사로 섰어요. 5년 동안 강단에서 학생들과 함께했지만 제가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줬는지는 모르겠어요. 올해부터는 강단에 서지 않게 됐는데 섭섭함보단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이 더 크네요.”
-어떤 선생님이었나.
“학생들을 답답하게 하는 강사?(웃음) 제가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걸 싫어해서요. 그래서 제 수업을 수강했던 학생들이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 그리 성실한 강사는 아니었던 것 같네요.”
기자의 칭찬에 매번 ‘아니다’며 겸손한 태도로 임한 그는 사실 창작 판소리계에서 알아주는 소리꾼이다. 창작 판소리의 선구자 임진택을 비롯한 몇몇 소리꾼이 창작 판소리의 문을 열었지만 그 물결이 계속 이어지진 못했다. ‘문화운동권’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창작 판소리의 끊어진 계보를 다시 이어간 것은 어린 시절부터 국악을 전공했던 2000년대 국악 전공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흐름에는 소리꾼 최용석이 있었다. “물론 1세대 분들의 본 전공을 다 알진 못하지만 비교적 2000년대부터 창작 판소리계에 저와 같은 국악과 출신 소리꾼들이 대거 유입됐어요.”
-언제부터 국악을 했나.
“조금 늦게 시작했어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국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 원랜 창이 아닌 북을 하려고 했어요.”
-북이라면 고수 말인가.
“네. 제 고향 목포에서는 판소리가 비교적 대중화돼 있어요. 중학교에 국악동아리도 있었고, 제가 워낙 신명 나는 음악을 좋아했던지라 바로 가입했죠. 그렇게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북도 배웠고 자연스레 창도 했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역시 공부보단 국악이 좋더라고요.(웃음) 그때부터 시립국악원에 다니면서 국악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죠.”
-대입을 준비하기도 벅찼겠다.
“맞아요. 2년 만에 국악으로 대학을 가려고 하니, 누구보다 열심히 해야 했죠. 아직도 기술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아요.(웃음)”
-뒤늦은 노력으로 합격한 대학인만큼 더욱 값졌을 것 같다.
“네. 대학 시절은 아직도 제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좋은 동료를 많이 만났잖아요. ‘바닥소리’의 창립멤버인 영화 <귀향>의 조정래 감독과 소리꾼 박애리씨는 국악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하던 선후배 사이였죠.”
-동아리에서 동고동락했나.
“사실 애리는 고향후배에요. 같은 국악원에 다녔기 때문에 원래부터 친한 사이였죠. 그리고 정래 형은 동아리에서 만났지만 그땐 별로 친하지 않았어요. 졸업 후에 정래 형이 우연히 제 스승님의 다큐멘터리를 찍었거든요. 그 계기로 자주 만나며 친해지게 됐죠. 그러다 중앙대 한국음악과 출신 소리꾼들끼리 멋있는 판소리를 해보자고 의기투합해 바닥소리라는 팀을 결성했어요. 그때 바닥소리의 첫 공식 활동이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만나 뵙고자 ‘나눔의 집’을 찾아간 것이었어요. 정래 형도 그렇게 작은 위로와 도움이 되고자 시작했던 일로 인연이 닿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중앙대가 아니었다면 창작 판소리가 아닌 다른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중앙대 한국음악과 교수님들 모두가 한국 음악의 거장이셨어요. 대게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계셨죠. 당시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던 일제강점기 시대의 노래를 언급하며 친일 부역자를 비판하셨을 뿐만 아니라 강의방식도 남다르셨어요. 학생들이 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죠. 한 번은 파격적으로 전통 판소리가 아닌 임진택의 ‘5월 광주’를 발표 작품으로 선택했어요. 동기들은 일반적인 전통 창을 주로 했거든요. 그래서 어쩌면 혼이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교수님께선 ‘네가 동기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며 격려와 칭찬을 해주셨죠.”
-창작 판소리는 마치 연극과 같다.
“맞아요. 기존 연극에서 사용하는 연출 기법을 바탕으로 해요. 그래서 연출가들과 협업을 자주 하죠. 때론 저 혼자서 연출과 연기를 도맡아 하기도 하고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셈이다.
“그만큼 부담감도 크죠. 총괄을 한다는 게 모든 책임을 진다는 거잖아요. 대부분 장편 극은 보통 1시간이 넘고요. 때론 3시간을 넘기기도 해요. 쉬운 일은 아니죠.(웃음)”
-처음부터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창작 판소리를 배척하는 이들이 있었죠. 너무 섣부른 도전이라며 다그치기도 하고요. 그들의 의견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가요. 그게 전통의 소리를 갈고닦는 사람들의 ‘고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과 제가 걸어갈 길은 확연히 달라요.”
-판소리 대중화에 창작 판소리가 많이 기여했다.
“그런가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반영한 창작물을 만드는 것이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데 큰 부분을 차지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풍자 판소리’를 하는 건가.
“풍자 판소리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꾸준히 있었어요. 어두운 과거를 한 명쯤은 기록하는 판소리꾼이 한 명쯤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게 나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박근혜 정권을 비판한 ‘순실가’와 ‘촛불가’가 화제였다.
“지금은 탄핵됐지만 제가 순실가를 발표한 당시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저지른 부정부패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광장에는 촛불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었어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저도 많이 분노했고 함께 하자는 의미에서 만들고 공유하게 됐죠. 갑작스레 만든 거라 녹음실에 가면서 휴대폰 메모장에 가사를 썼어요.(웃음)”
-동영상 조회 수가 30만을 넘겼다.
“아무래도 온 국민의 주목을 받고 있었던 사안이었잖아요. 사실 이 사안이 드라마와 다를 바가 없는데 풍자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들더라고요. 합리성이 결여된 대통령을 보면서 느꼈을 한탄과 절망감이 엄청났겠죠.”
“그때여, 사이비 종교계의 황태자 단군 미륵이라 추앙받던 최태민 태자마마의 다섯 번째 부인 임 씨 부인의 다섯째 딸, 여장수 순실이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사기꾼 기질과 영험함으로 국정을 농단하여 조선을 복속시키고 그 나라의 이름을 헬조선으로 개명하고 순실여왕이 되었구나./날랜 경주말 위에 덩그렇게 올라타고 한 손에는 말고삐 쥐고 또 한 손에는 빨간 펜 들고 크게 외치며 하는 말이 간절히 원했더니 온 우주가 도와 헬조선을 얻었느니라!”
‘순실가’ 中
-MB정권을 비판한 ‘쥐왕의 몰락기’ 이후 오랜만의 풍자 판소리였다.
“오랜만에 발표한 까닭에 주변에서 겁이나서 그랬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어요.(웃음) 사실 무서워서는 아니고 시국을 논할 의욕을 잃었었죠.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겪고서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는 걸 보고 충격에 빠졌거든요. 그 후 개인적으로 풍자 판소리를 발표하는 걸 자제했던 것 같아요. 많이 지쳐있었기도 했었던 터라 바닥소리 활동에 우선 집중하기로 했죠.”
-쥐왕의 몰락기도 신랄한 풍자로 주목을 받았다.
“‘개발독재형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인 사대강 사업을 비롯해 MB정권은 풍자할 사안이 많았어요. ‘무한경쟁’ 시대로 빠져드는 정국이 제 상상력을 계속해서 자극하더라고요.(웃음) 쥐왕의 몰락기는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 물대포를 맞고 쓴 판소리에요.”
-물대포라니.
“당시 광우병 사태로 인해 많은 시민이 광장에 모여 있었죠. 저도 동료 음악인과 함께 촛불을 들고 있었는데 세상에, 물대포를 쏘는 거예요. 직접 맞은 것은 아니고 튀는 물을 맞았지만 그토록 억울할 수가 없었어요. 시민을 상대로 국가가 폭력을 가한 거잖아요. 분노를 담아 쥐왕의 몰락기를 창작했어요. 운이 좋게도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에 소개되면서 많은 분에게 알려졌죠. 그런데 아직 그 곡으로 완성된 공연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웃음)”
-정권 초기 때부터 준비한 판소리인데.
“5년 동안 계속해서 내용이 변하더라고요. 하도 추가된 이야기가 많아서.(웃음)”
-용기가 대단하다.
“한 번은 부산에 공연을 갔었는데 대기실에 선거관리위원회 직원이 오셨더라고요. 공연장에 기웃거리시더니 제게 이런 내용으로 계속 공연하면 선거관리법에 위반될 수 있다면서 경고했죠. 그때도 겁은 나지 않았어요. 그 대신 계속해서 이렇게 활동하다 보면 언젠가 감옥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죠.(웃음)”
-협박이라니. 위험했다.
“괜찮아요. 문화·예술을 건들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저를 어떻게 하진 못했어요. 헌법에서도 문화융성을 보장하고 있는 걸요.(웃음)”
“동물 나라는 처음 모두 채식을 하였다. 그런데 육식의 본능을 잠재우지 못하여 동족을 물론이고 다른 종족을 해치는 자가 종종 있긴 하였으나 서로 각자의 영역에서 채소를 길러 먹고 살아갔으니 남의 살을 먹을 일이 없어 서로 평화를 이루었다. 그때 모든 동물 나라 동물들에게 제한적으로나마 고깃국을 먹게 해주겠다며 큰소리를 떵떵 치고 나타난 쥐왕! 동물들 몸속에 꿈틀대던 욕망을 건드려서 동물 나라의 왕이 되었구나….”
‘쥐왕의 몰락기’ 中
-가장 기억에 남는 판소리 공연이 있다면.
“<닭들의 꿈, 날다>라는 창극인데요. AI에 걸린 닭들을 도살처분 하려는 방역 대원을 피해 닭들이 닭장에서 탈출해 일어나는 모험이에요. ‘새들의 천국’이라는 비무장 지대로 가는 과정을 담았죠. 결론적으로 남과 북의 통일을 염원하는 내용이에요. 가장 많이 사랑받았고 아끼는 작품이죠. 그리고 <대한제국 명탐정 홍설록>이라는 작품도 기억에 남아요.”
-어떤 극이기에.
“아서 코넌 도일이 쓴 『셜록 홈스』의 서사 구조를 바탕으로 일제강점기 제주를 바탕으로 한 창극이죠. 제주 해녀 비밀결사 조직과 얽힌 미궁의 사건을 파헤쳐가는 내용이랍니다. 이 또한 제주 4.3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인데요. 해녀 분들의 항일 운동을 기리는 탑을 보고 영감을 받았죠.”
-늘 고민하고 공부하는 모습이 멋있다.
“아니에요.(웃음) 저도 소재가 정해지면 그때그때 공부한답니다. 전문가들에게 자문도 구하고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자료를 조사한 다음 이야기를 엮어 초고를 쓰고 전문가에게 감정을 받고 허점을 고쳐가는 방식이죠.”
-판소리 외에 관심 있는 장르가 있다면.
“앞서 말했듯이 전 ‘국악’이라는 장르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고운 한복이 아닌 청바지에 재킷을 입고 창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재즈도 좋아하고 최근엔 힙합도 즐겨 들어요. 물론 가사를 잘 알아듣진 못하지만요.(웃음)”
-새로운 작품은 언제 만나볼 수 있나.
“간첩조작 사건을 판소리극으로 만들 겁니다. 아마도 7월에 만나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수의사가 간첩 조작 사건으로 연루돼 광주 교도소에 수감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죠.”
-이 작품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나.
“당연하죠. 실제로 있었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었어요. 수의사가 원래 개·돼지를 치료하는 의사잖아요. 그 당시 짐승처럼 여겨지던 이들을 인간으로 대해주고 치료해주는 이야기랍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중앙대는 제 청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곳이죠. 93년도에 입학해 군대와 휴학의 여파로 약 10년 동안 대학을 다녔어요.(웃음) 그 긴 시간이 지금의 신념과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답니다. 특히나 저를 열린 길로 끌어주신 교수님들이 있었기에 계속해서 창작 판소리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다른 대학을 다녔다면 이 꿈을 포기하고 일찍이 현실과 타협했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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