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7년 3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20년간 한 우물만을 판 이가 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심지어 손가락질을 해대도 그는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계속해서 갈 뿐이다. 그가 ‘레게’라는 생소한 장르로 데뷔한 2000년대는 발라드와 댄스음악이 주름잡았지만 어느덧 한국 레게음악의 선구자로 인정받은 가수 스컬. 레게를 향한 그의 집념과 노력에 대중들의 마음은 움직였고 심지어 레게의 본고장 자메이카도 열광하게 했다. 그런 그의 음악에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을 퍼붓는 이도 있다. 그러나 중대신문이 만난 그는 누구보다도 음악에 대한 진정성이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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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의 마지막 날 

  뒤를 돌아볼 때 
  음악 하나만은 
  부끄럽지 않을게”
 
 
  누구나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평생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버킷리스트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겠지’하며 지금 당장 주어진 일을 해내기도 벅찬 이들이 대다수다. 그렇게 버킷리스트에 먼지가 쌓여갈 때쯤 ‘다음 생엔 이루겠지’하며 자위한다. 하지만 달콤한 회유 앞에서 뚝심과 열정으로 일찍이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이뤄가는 이도 분명 있다.
 
 
  -벌써 꿈을 이루셨다고.
  “에이.(웃음) 제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일들을 이루긴 했어요. 레게의 본고장인 자메이카에 가기, 미국에서 공연하기, 제 우상이었던 뮤지션들과 콜라보레이션하기….” 
 
 
  -안 그래도 작년 스티븐 말리(Stephen Marley)와의 협업이 화제였다.
  “처음엔 정말 꿈인가 싶었죠. 그분은 제가 어떤 누구보다도 동경하는 아이돌이거든요. 제게 말리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가 정말 커요.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뮤지션과의 협업이라니, 정말 대단했죠.”
 
 
  -본격적으로 자메이카 활동을 하는 건 어떤가.
  “영광이죠. 사실 지금도 자메이카에서 공연 초청이 오고 있어요. 하지만 워낙 멀리 있는 나라인 데다 당장 한국을 비워놓을 수도 없는 사정이죠. 그래서 자메이카에 갈 일이 생기면 정말 큰마음 먹고 가서 2주씩이나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와요. 그런데 요즘은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요? 싸이 형 보면 알 수 있듯이 좋은 음악을 선보인다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갈 수도 있는 환경이잖아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게요.(웃음)”
 
 
   
▲ 최근 발매된 스컬의 신곡 ‘아직도 니가’.
 
 
  -안 그래도 이번에 신곡을 발매했다.
  “네. 바로 지난주에 따끈따끈한 신곡이 나왔답니다. ‘아직도 니가’라는 곡인데요. 노브레인의 기타리스트 보보가 기타세션을 맡았고 저처럼 레게음악을 하는 쿤타와 함께 했죠. 사실 이 곡은 군대에 가기 전인 2007년에 만든 노래였어요. 80% 정도 써놨던 곡이었는데 최근에 이 곡을 완성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죠.”
 
 
  -팬들이 가수 쿤타와의 만남을 기다려왔다고 하더라. 이번 노래의 특징은 뭔가.
  “그런가요.(웃음) 이전부터 저도 쿤타와의 협업을 기대해왔어요. 기회가 닿아서 함께 하게 됐죠. 이번 노래의 특징이라면 러프한 음악이랄까. 쉽게 말해서 스토니 스컹크 시절 스컬의 음악과 유사한 것 같아요.”
 
 
  -바라는 차트순위가 있다면.
  “예전에는 대중들이 레게음악이 좋다는 걸 왜 몰라줄까, 하며 속상했었어요. 그런데 이젠 대중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만 있다면 감사하죠. 아직도 여러 방법을 찾고 있긴 하지만요.(웃음) 그래도 대중들이 제 음악이 별로라고 느끼신다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사람마다 선호하는 취향이 다르고 듣고 싶은 노래를 들을 자유가 있잖아요.” 
 
 
  ‘한국 레게의 자존심’이라는 별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이 가는 길에 항상 조력자가 있었을 뿐이라며 겸손한 미소를 내비쳤다. “그런 칭찬은 정말 감사하지만 부끄럽기도 해요. 왜냐하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제겐 항상 인복이 따랐던 것 같아요.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다 정말 힘들었을 때 ‘다 그만두고 군대나 갈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그때 양현석 사장님을 만나 YG라는 소속사에 갔었고 제가 음악에 집중할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죠. 그리고 미국 활동을 시작할 땐 머라이어 캐리의 오빠인 모건 캐리씨가 도움을 주셨죠. 그분은 제 삶의 철학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좋은 분이었어요. 그리고 제대 후 다시 음악을 시작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땐 하하를 만났고요. 그렇게 스컬&하하로 함께 활동하면서 서로 조력자이자 동반자가 됐죠. 이렇듯 전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웃음)” 
 
 
  -한 달에 한 곡씩 노래를 발매하고 있다.
  “그동안 스컬&하하로서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솔로 앨범을 낸 지는 약 3년이 지났더라고요. 따로 앨범을 발매하지도 않았죠. 그래서 그동안 해온 결과물들도 선보일 겸 지금이 솔로 앨범을 내기에 적기라고 생각했어요. 돌아오는 4월에도 또 새로운 노래를 선보일 예정이에요. 올해 목표는 10곡을 내는 거죠.”
 
 
  -시간상 무리일 것 같은데.
  “빠듯하긴 해요. 그래도 시간 내에 작업하기 위해 저 자신에게 엄격해져서 그런지 많이 부지런해졌고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느낌도 들어요.(웃음) 아마도 올해가 제 터닝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요.”
 
 
  -정말 오랫동안 레게음악을 해왔다.
  “저는 그렇게 오래된 줄 몰랐어요.(웃음) 한 20년쯤 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니까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흐른 줄 몰랐죠. 그 과정에서 좋은 성과도 많았었고 그 덕에 이렇게 오랫동안 음악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아직 여러분께 보여드릴 음악들도 많고요.(웃음)”
 
 
  -언제부터 레게음악에 관심을 가졌나.
  “음. 제가 레게에 처음 관심을 가졌을 땐 MC스나이퍼와 ‘스나이퍼 군단’이라는 힙합 팀에 소속돼 있었어요. 모두 힙합을 하던 팀이었지만 그때도 전 어설프게 레게스타일의 랩을 구사하려 했죠. 그러다 독립해 팀을 나오면서 더욱 레게음악에 집중하게 됐어요.”
 
 
  -초창기엔 중앙대 흑인 음악동아리 ‘다 씨 사이드(Da C-side)’에서 활동을 했다고.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저 다 씨 사이드 2기에요.”
 
 
  -아직도 중앙대 휴학 중이라던데.
  “휴학한 지 오래됐으니 아마 지금은 제적일 거예요. 지난번에 학교에서 어떻게 할 거냐고 연락이 오기도 했는데 학교 측에서 처리해달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주변에서 더 아쉬워하더라고요. 7차 학기까진 다녔거든요. 물론 졸업장도 명예롭지만 지금 제가 하는 음악 활동에 더 집중하고 싶었어요. 어차피 모범생도 아니었고.(웃음)”
 
 
  -학점이 좋지 않았나 보다.
  “그냥 음악에 푹 빠져 있다 보니까 학업에 집중할 수 없었죠. 어쨌거나 4학년이 되긴 했지만요.(웃음) 그래도 학교생활은 즐거운 추억이에요. 좋은 친구와 선후배도 만났고요. 그냥 제 운명이 아니었던 거죠.”
 
 
  -일찍이 음악에 관심이 있었음에도 광고홍보학을 전공한 이유가 궁금하다.
  “원래 실용음악과에 가고 싶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불가능했어요. 그 당시에는 가수가 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없었고요. 그래서 가수가 아니더라도 광고 음악계에서 종사하면 괜찮을 것 같아 광고홍보학과를 선택했죠. 일본 언더그라운드를 보면 음악을 평생 취미로 삼고 따로 직장은 있는 직장밴드가 많이 활성화돼 있거든요. 저도 그 당시에는 그러한 삶을 동경했었어요.”
 
 
  스컬은 일찍이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다 2003년 스토니 스컹크로 데뷔했다. 그 후 스컬은 미국 활동을 시작하며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는 등 우수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 군 복무를 마치고 2010년 스토니 스컹크가 해체됐다. 현재는 하하를 만나 스컬&하하란 팀을 결성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솔로로서 스컬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지금과 2000년대 시절의 음악을 비교하자면.
  “음. 지난 노래들을 들어보면 확실히 음악적 지식이나 기술은 지금이 더 낫죠. 그런데 가끔 지난 노래들이 더 듣기 좋을 때가 있더라고요. 아무렇게나 만든 곡이 뜻밖에 많은 사랑을 받기도 하잖아요. 그에 비해 최고의 세션과 악기로 만든 음악이 별로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지난날에는 점수, 순위를 많이 고려했다면 현재는 그냥 제가 잘할 수 있는 음악, 하고픈 음악을 한다는 거예요.”
 
 
  -멋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은 뭔가.
  “‘Boom Di Boom Di’와 ‘Ragga Muffin’ 정도 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어떤 노래기에.
  “둘 다 운이 따라줘서 만든 노래인 것 같은데.(웃음) ‘Boom Di Boom Di’는 가사를 지금 들어보면 조금 야하기도 하고 유치해요. 그런데 그 당시 밝고 쾌활했던 감성이 그립고…. ‘Ragga Muffin’은 제 대표곡으로 꼽히기도 하고 대게 공격적인 분위기의 노래에요. 일반인들을 잘 알아들을 수도 없게 가사를 썼고요. 그 두 곡이 제 양면성을 잘 나타내준 것 같아요.”
 
 
  -양면성이라니.
  “농담으로 주변에서 제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기도 해요.(웃음) 제 노래 중 ‘결혼해요’라는 곡에서는 착하고 예쁜 말만 하다가 ‘쓰레기’, ‘연예인이고 지랄이고’ 같은 곡에서는 비속어를 쓰고 때론 야한 가사도 많이 쓰거든요. 누구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사랑할 때, 방탕하고 싶을 때, 후회할 때…. 많은 감정이 공존하고 있고 전 그것들을 노래로 표현하죠.”
 
 
  -매우 솔직하다.
  “솔직한 편이죠. 한 번은 이태원의 한 술집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는데 때마침 팬을 만났어요. 그런데 제게 ‘스컬씨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제가 아는 당신은 착한 사람이잖아요’라며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처음엔 당황스러웠어요. 그런데 계속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더라고요. 그 감정을 담아 만든 노래가 ‘연예인이고 지랄이고’였어요.”
 
 
  -(당황) 오히려 팬이 놀랐겠다.
  “그랬겠죠? 그 당시에 예능에 나가 화제가 됐었어요. 방송에선 행동을 조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계속 웃고만 있으니까 대중들이 저를 착하게 봐주신 거죠. 감사하지만 그 모습은 실제 제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저를 오해하는 게 불편했어요. 그래서 노래를 통해 조금이라도 허물없는 절 보여주고 싶었죠.”
 
 
  스컬하면 레게, 레게 하면 스컬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런 그가 레게가 아닌 발라드를 부른다면 어떨까. “발라드요? 물론 저도 레게가 아닌 장르들도 즐겨 들어요. 레게만 듣지는 않습니다.(웃음) 힙합, R&B 음악도 좋아해요. 그런데 갑자기 제가 발라드를 부를 순 없잖아요. 그 대신 피처링을 통해서 타 장르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해소하는 편이죠. 예를 들어 가수 박효신씨와도 ‘나 이러고 살아’, ‘Beautiful Day’라는 곡으로 협업하기도 했었답니다.”
 
 
  -특유의 터프한 창법은 어떻게 구사하게 됐나.
  “제가 레게음악을 시작할 땐 선생님이 따로 없었거든요. 노래를 들으며 독학해야 했죠. 그 당시 한국에는 레게음악 CD가 많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 700만 원을 모두 투자해 일본까지 가서 CD를 왕창 사오곤 했죠. 그렇게 구한 CD를 듣고 또 들으면서 무작정 그들의 목소리를 따라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한 번은 목에 피가 나면서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당장 그만하라고 혼을 내더라고요.”
 
 
  -집념이 강하다.
  “그땐 정말 걸걸하고 터프한 그 목소리를 내고 싶었어요. 원래 제 목소리가 하이톤이었거든요. 무리해서 연습하다 보니 결국 지금의 창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됐죠.(웃음)”
 
 
  -그럼 레게머리를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
  “아. 머리요?(웃음) 2005년에 자메이카에 처음 갔어요. 그 후로 자메이카 현지인들과 교류도 하게 됐죠. 그러면서 레게머리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됐어요. 사실 저도 처음엔 레게하는 사람은 무조건 레게머리를 해야 하나보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알고 보니 레게머리가 그들에겐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더라고요. 마치 조선 시대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에요. 제가 한국인이고 자메이카 현지인이 될 수 없는 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한국에서 레게를 하는 사람으로서 최대한 자메이카의 문화를 알려주고 싶었어요.”
 
 
  -레게를 하지 않는 스컬은 상상이 잘 안 간다.
  “저도요.(웃음) 레게는 제 인생의 동반자이자 운명이죠. 사실 중간에 힘들어서 그만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실제로 그 앞까지도 갔었죠.”
 
 
  -다른 일이라면.
  “백수? 평생 놀아 볼까 생각도 했었죠.(웃음)”
 
 
  -(…)
  “하지만 레게를 너무나 사랑하니까 지금까지도 음악을 계속하고 있나 봐요. 전 무슨 일을 해도 레게가 떠올라요. 떡볶이 사업을 하더라도 레게떡볶이는 어떨까 고민하고 장난감도 레게장난감…. 온통 다 레게뿐이죠.”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목표라. 요즘엔 어마어마하고 화려한 것보다 행복하고 건강하게 음악 하는 게 바람이에요.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훗날에 한 몇십 년 뒤에도 라디오에서 제 노래가 한 곡쯤은 흘러나오면 좋겠네요. 그럴 수 있는 노래 한 곡만 있다면 제 인생에 만족해요.”
 
 
  당신에게 중앙대란?
  “잔디밭에 둘러앉아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네요. 대학 다닐 땐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좋아서, 우울해서…. 이유도 다양했어요. 술집은 비싸니까 잔디밭에서 술 먹는 게 유일한 낙이었죠. 동아리 다 씨 사이드도 거기서 술 먹다가 제안받았거든요. 지금 보면 자유로운 영혼이 따로 없네요.(웃음) 제게 중앙대는 동기들과 자유롭게 공부하고 놀던 추억이 가득 한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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