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3년 3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많은 여성들은 ‘연예인 피부’를 갈망한다. 밀착 카메라에 찍혀도 모공 하나 보이지 않고 잡티 없는 깨끗한 얼굴을 가질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오이도 붙여 보고, 꿀도 발라 보고, 우유로 세수도 해봤지만 역시, 쉽지가 않다. 우둘투둘하고 울긋불긋한 피부를 조금이라도 가리기 위한 화장은 갈수록 두꺼워지고 있다. 그러나 ‘세기의 신부’ 고소영, ‘동안피부’ 고현정, ‘푸딩피부’ 김아중 등을 만든 명실상부한 메이크업계의 트렌드, 메이크업 아티스트 우현증씨(41)는 ‘광(光) 메이크업’을 강조하며 “내 얼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내추럴”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솜털 세안법’, ‘448 권법’, ‘짱짱 기법’ 등의 용어는 메이크업에 관심이 있는 여성이라면 한번쯤은 들었을 법하다. 고소영, 고현정, 김아중을 비롯해 임수정, 한지민, 박하선 등의 톱 여배우들의 맑은 피부를 만든 우현증씨. 인기 프로그램 <겟잇뷰티> 멘토, 화장품 브랜드 <키스바이우> 창시자, <우현증 메르시> 대표 등 그녀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수도 없이 많다. 마치 메이크업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다. 그러나 그녀의 전공은 메이크업이 아닌 ‘서양화’다.
-전공이 ‘서양화’라니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연필로도 그려보고 물감으로도 그려보면서 제게 어느 정도 손재주가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미대 입시를 준비하게 됐고, 서양화학과로 진학하게 된 거에요.”
-대학생 때 굉장히 활동적이었다던데요.
“그때만 해도 제가 다니던 안성캠퍼스가 개발이 덜 돼 있었어요. 대학로로 내려가면 밭이 보이고 그랬죠. 저는 그 길을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곤 했어요.(웃음) 수업이 다 재밌었고, 학교생활하는 것이 자유롭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대동제 치어리더도 하고 과대표, 부과대표도 했어요. 그리고 세 표 차이로 학생회장을 못 하고 선전부장을 하게 됐죠.”
-많이 아쉽지 않았나요.
“아니요, 저에게는 더없는 선물이었어요. 그때가 한창 학생 운동으로 시끄러울 시기였는데, 학교를 지키겠다고 대자보도 쓰고 창의적인 기획도 여러 개 하면서 매력을 느꼈거든요. 그때 뭔가를 전략적으로 어필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고, 그게 커서도 큰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재학하면서 힘들거나 어려운 일은 없었나요.
“3학년 때 IMF가 터졌어요. 생활 형편이 어려워져서 유학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그래서 혼자라도 그림을 그려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리려니까 제 역량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했고, 입시 준비를 할 때도 거리낌 없었는데 그런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깨달음이 든 거죠.”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내가 뭘 잘할 수 있을까’하고 매일 고민했죠. 그러다가 메이크업을 하고 있던 사촌오빠를 만나게 된 거예요. 그때만 해도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해보겠다는 생각에 메이크업을 배우겠다고 했는데, 점점 흥미로워지면서 ‘일’로 넘어오게 돼버렸죠.”
-서양화를 배웠다는 것이 메이크업을 할 때 도움이 되기도 하던가요.
“그럼요. 그림을 배웠다는 것은 우선 기본이 탄탄하다는 이야기예요. 바탕이 어떻게 깔리고, 또 색이 어떻게 쌓이는지 아니까요. 특히 색에 대해서는 더해요. 모든 사람의 피부가 같은 색이 아니기 때문에 똑같은 색도 누구에게 바르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걸 남보다 빨리 판단할 수 있거든요.”
-서양화 전공이 하나의 ‘경쟁력’이 된 거네요.
“그림을 그려봤다는 것이 제품의 질감을 구분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여요. 립스틱이 묽은지, 짙은지 같은 것들을 좀 더 쉽게 판단할 수 있죠. 요즘 메이크업에는 아트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에 선과 색채에 대한 지식들이 쌓여서 창의력을 높여주는 것 같아요.”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한다고 하니 서양화학과 동기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당연히 말렸죠.(웃음) 어떻게 순수미술을 버릴 수 있느냐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제 인생을 책임져 주지는 않잖아요. 저는 50년 앞을 내다보고 있었고, 이거 아니면 안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동기들이 뭐라고 하든지 상관없었어요.”
그러나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로 들어선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메이크업계는 생각보다 서열이 분명했고, 밑바닥부터 시작한 그녀로서는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메이크업계 은어로 매일이 ‘거울을 닦는’ 날들이었다.
-진짜로 ‘거울’을 닦았나요.
“네, 몇 번 닦기도 했어요. 막 배우기 시작할 때라서 잔심부름도 많았고, 잡일도 많았죠. 그때는 일을 즐긴다기보다는 일을 견딘다는 느낌이었어요.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서기까지의 시간이 너무나 길어서 웃음을 잃어버린 채로 한 해 한 해 버텨 나갔어요.”
-그 시간이 얼마나 지속됐나요.
“한 삼 년은 그랬던 것 같아요. 어느 날은 분장실에서 거울을 보는데 굉장히 허탈해지는 거예요. ‘대학 다닐 때 그렇게 활기찼던 내가 왜 이러고 있나’하고요. 대학 다닐 때는 나름 인기도 있었는데,(웃음) 제가 너무 초라해 보이더라고요. 그때가 딱 그만둘까, 계속할까를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계속 하기로 결정한 건가요.
“그렇죠. 제가 선택했고 제가 잘할 수 있다고 뛰어든 일이니까요. 이왕 하는 거 긍정적인 마음으로 즐겁게 하자고 생각했죠.”
-마인드를 바꾼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뭐였나요.
“제 이미지를 만들어 저를 알리는 일이었어요.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특별한 모습을 만들기 위해 애썼죠. 제가 인상적으로 생기지도 않고, 이름도 어렵고 해서 힘들었지만 고민 끝에 시크한 느낌이 나는 블랙 의상에 머리를 묶고 도발적인 느낌을 연출해 냈어요.”
-뷰티 프로그램 ‘겟잇뷰티’에 출현한 뒤로 ‘우현증’ 이미지가 한층 더 확립된 것 같아요.
“겟잇뷰티에서는 첫째로 메이크업을 하면서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집중하면 말을 못 하니까요. 그런데 저는 대학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말 하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어요. 둘째로는 ‘짱짱기법’, ‘쏙쏙기법’같이 특이한 기법들을 만들어 어필했어요. 메이크업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략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또한 중요하거든요. 이 두 가지가 시청자들에게 저를 알리는 데 많은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유명해질수록 손님들도 늘어나지 않던가요. 너무 바빠서 몸을 버릴 정도였다고 들었어요.
“손님이 많이 몰리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은 위장병을 한 번씩 앓아요. 한 쪽 다리를 짚고 일하니까 골반은 틀어지고 혈액순환은 안 되고, 몸은 붓고 살은 이상하게 찌고 그러죠. 어느 날은 장판이 굉장히 뜨거웠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살이 데는 것도 모르고 잤어요. 6개월 동안 4시간씩 자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일했던 기억이 나요.”
-그 상황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거의 쓰러질 정도로 일하다가, 문득 일이 즐겁지 않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아름다움을 얻어가지만, 정작 저는 이렇게 몸을 버리고 있으니까요. 그때 일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멈춰야겠다고 결심했죠. 더 이상 못 하겠으니 요일을 정해놓고 그 날만 일하겠다고 선언한 거예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나요.
“얼굴 한 쪽에 검은 점이 뒤덮여 있던 신부에요. 그 검은 점을 가리는 것이 정말 어려웠거든요. 검은 점을 노란색과 핑크색으로 적절히 배합해서 가리면서 톤과 두께가 차이나지 않게 해야 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결국 감쪽같이 커버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때 신랑이 울었어요. 평생에 이런 얼굴을 딱 두 번 봤다고 말하면서요. 제 자랑 같지만 저여서 그걸 해냈던 것 같아요.(웃음)”
-굉장히 감동적이었을 것 같아요.
“그때 제가 이 일을 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메이크업을 해주는 일이 본인 만족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만족을 주고 추억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그 전까지만 해도 ‘나 언제 뜨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 이후로 많은 사람들을 공감시키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프리랜서와 실습 기간을 거친 그녀는 ‘감사합니다’라는 뜻의 브랜드 ‘메르시’를 만들어 낸다. 당시 그녀의 꿈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메이크업을 받았던 사람들을 모두 장충체육관에 불러서 콘서트를 하는 것이었다. 그 마음으로 책을 내고 화장품도 만드는 사이 브랜드는 점차 자리잡아간다.
-메르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까지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아요.
“애를 많이 먹었죠. 초반에는 전 직원이 하루 종일 일했어요. 마침 윤달이 있어 신부화장도 많았고,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손님도 늘어갔죠. 저는 빨리 끝내놓고 쉬는 성격이라, 휴식 없이 바쁘면 바쁜 대로 전투적으로 일했어요.”
-메이크업에서는 트렌드를 읽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트렌드를 읽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요.
“트렌드는 무조건 공부예요. 저는 신이 아니니까 유행을 미리 예측하거나 할 수는 없거든요. 세계 성향부터 국내 성향까지 모두 공부해야 하고요, 한국적이지 않은 것들은 한국적인 느낌으로 바꿔야 해요. 한국의 뷰티시장이 매우 크거든요.”
-한국적인 느낌을 메이크업으로 연결시킨다는 건가요.
“그렇죠. 색감이 강한 중국과 세밀함이 강한 일본 사이에 한국적 미가 있어요. 단아함과 청아함 같은 것들이요. 그래서 저는 이 느낌을 살리기 위해 트렌드를 공부하고 수입된 화장품이 있으면 누구보다 먼저 받아 써보면서 연구해요. 신상품이 나오면 받아서 테스트하고 평가를 적어보내기도 하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새로 나온 화장품을 쓰고 있을 때 전 이미 다 써본 후가 돼요.”
-직접 쓰신 책에서도 한국의 뷰티시장에 대해 언급하셨던데요.
“한국 여성들은 예뻐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어요. 여성들이 낳은 아이들한테도 손 닦아야 한다, 자외선 차단제를 발라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뷰티 시장을 확고히 세우고 있죠. 여성들에게 뷰티는 하나의 은혜이자 성은처럼 거론되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 사이에서 성공인으로 거론되는데, 진정한 성공이란 뭐라고 생각하나요.
“조바심을 내지 않는 삶이죠. 이미 쌓아놓은 것들과 가진 것들을 지키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삶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조바심 낸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지는 않거든요. 안정을 찾아야 뭐든 되는 거거든요.”
-평소엔 무엇을 보고 달려가나요.
“만족감인 것 같아요. 단순한 흥미가 아닌 꿈을 품고 만족할 때까지 계속하는 거죠. 처음 제 꿈은 청담동을 휩쓰는 거였어요. 그런데 청담동에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고 책도 나오고 그러니까 방송이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꿈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는 거예요.”
-가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지 않고 그냥 그림을 그렸다면 어땠을까’ 같은 후회는 하지 않나요.
“저는 미련이 없는 사람이에요. 과거에 ‘이랬으면 어땠을까’, ‘이랬으면 좋았을걸’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아요. 저는 제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최대한 집중하고 노력하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요.
“첫째는 한국 여성의 뷰티를 세계에 알리는 거예요. 한국 여성의 뷰티에는 분명한 매력과 미가 있거든요. 둘째는 가정을 만드는 거예요.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요.”
-일과 가정 둘 다 챙기기가 힘들지 않을까요.
“가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면서 ‘저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곤 해요. 굉장히 바쁘고 정신없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죠. 그렇지만 어쨌거나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는 그 갑옷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일과 가정을 구분 지을 수 있게 되면 일과 가정 둘 다 챙길 수 있을 거예요.”
-요즘은 블로그 활동이나 트위터를 활발하게 하고 계신데요, 메이크업에서 소통은 중요한 요소라고 보나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고객을 진심으로 대하고, 거기서 신뢰와 믿음을 얻어 소통해야 해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응원을 받을 때마다 저도 마음이 치유되고 깨어나는 느낌이에요.”
연줄도 없이 시작했다
무작정 열심히 뛰어다녔다
실력이 늘자
곳곳에 연줄이 생겼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든든한 배경이죠. 처음엔 스스로 살아남기 바빠서 인식을 못했는데, 갈수록 같은 학교 사람들이 눈에 띄는 거예요. 뷰티는 물론 문학계, 미술계, 연예계 할 것 없이 진출해 있었던 거죠. 아는 순간 뿌듯함이 밀려오고, 또 자부심이 느껴지더라고요. 이 인연을 소중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어떻게 보면 버팀목이기도 해요. 앞서 간 사람들을 보며 스스로의 길을 설계하는 지침서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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