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3년 10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지난 2013년 8월,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부 내 서기관이었던 여성이 통일교육원장에 임명됐다. 윤미량 원장이다. 경남 마산여고와 중앙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1988년 통일부 입부 후 통일부 인도협력기획과장, 남북회담본부 회담관리과장, 통일교육원 지원관리과장, 하나원장 등의 주요 보직을 역임해 왔다. 통일부 내에선 여성 최초로 고위공무원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부서 내에서 대모로 불린다. 입부 후 언제나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여성, 윤미량 원장.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윤미량 동문.jpg

 

 

수유리에 위치한 통일교육원의 원장실에서 마주한 윤미량 원장은 연이은 회의와 쏟아지는 전화에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 했다. 하나원(북한이탈주민정착사업)에서 보냈던 5년간의 시간을 뒤로하고 통일교육원에서 원장으로 새롭게 자리를 잡은 윤미량 동문을 만났다. 

 

 

-하루일과가 어떤가. 
“그날마다 다르다. 보통 아침엔 통일부 간부회의에 참석한 뒤 부서회의를 하고 오후엔 외부일정에 참여하는 편이다. 요즘은 정부에서 외부와의 소통을 강조해서 외부 전문가들과의 회의가 많다. 원래 정부기관의 대표는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보다 밖에서 기타 정부기관의 간부를 만나는 시간이 더 많다.”
 
 
-흔히 공직이 편하다고 생각하는데.
“보직마다 편차가 있겠지만 중앙부처의 경우엔 대부분 편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통일부에서 근무한 이래로 나의 일상생활은 항상 불규칙했다. 중앙부처는 보통 7급 공무원들까지 포함되는데 대부분의 중앙부처 공직자들은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있지 않다. 부인이 출산 중인데 사무실에서 일을 보던 동료 직원도 있을 정도다.(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보직은.
“하나원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하나원은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탈북자 교육기관이다. 우선 탈북자의 신분을 확인한 뒤 3개월 동안 사회적응교육을 시킨다. 지하철 타는 법, 버스노선 읽는 법, 대한민국 표준어와 외래어 등 컴퓨터를 켜는 방법까지 우리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초보적인 것들을 가르친다. 기초교육이 끝나면 6개월 동안 직업훈련을 실시해 사회에 진출시킬 준비를 시킨다.” 
 
 
-탈북자들과 직접적인 교류도 많았을 것 같다.
“그동안 북한이탈주민들을 보면서 비극의 형태는 사람마다 정말 다양하다는 것을 느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건 어린 아이 3명의 이야기였다. 큰오빠는 10살, 여동생은 7살, 사촌여동생은 4살인 아이들이었는데 두 엄마와 같이 탈북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탈북과정에서 엄마들은 안타깝게 북송됐고 브로커가 어쩔 수 없이 아이들만 데리고 오게 됐다. 남매에 비해 4살짜리 아기는 정신적인 충격이 심했다. 결국 아이들을 보육원으로 보내 심리 상담을 시키고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도와줬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1987년도에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여러 통일부 보직을 역임한 윤미량 통일교육원장. 탈북자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유난히 각별해 보였다. 이런 그녀의 관심은 자연스레 집필에 대한 열정으로도 이어졌다.  
 
 
-북한여성에 관한 책을 쓴 적이 있는데.
“처음 통일부에 입부했을 시절은 북한에 관한 자료가 지금보다도 더 구하기 어려웠다. 당시엔 북한의 상황을 잘 모르다 보니 북한사회를 이상화하는 글들이 많았다. 이화여대 학생이 그런 책의 일부분을 발췌해서 대자보로 실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1987년도에 구속됐던 일도 있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북한사회에 대한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북한에 관한 자료들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자료를 찾던 중 북한여성의 현실을 보고 놀랐다고.
“인권침해가 예상 외로 너무 심하더라. 탈북여성들에 의하면 북한여성 10명 중 9명은 남편에 의한 가정폭력에 시달린다고 한다. 여자가 길거리에서 맞고 있으면 여자가 잘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탈북남성들이 있을 정도다. 아직까지 남존여비사상이 북한사회에 팽배한 것이다.”
 
 
-북한여성들이 비교적 높은 수준의 남한 여성인권에 놀랄 것 같다.
“탈북여성들은 대부분 중국남성이나 남한남성을 더 선호한다. 탈북남성이 술·담배를 심하게 하고 여자한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한건 80년대까지 북한이 더 높은 수준의 성·평등 의식을 자랑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된 건 1987년도이지만 북한에선 이미 1946년도에 남녀평등법이 제정됐었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됐다. 
“북한은 처음부터 당이 법을 제정하고 북한여성을 조직화시켰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여성들이 직접 투쟁해서 민법개정을 요구했다. 자체적인 투쟁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여성인권의식은 밑받침이 더욱 견고해졌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의식이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여성들의 자발적인 기반이 약하고 경제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80년대 이후에 남북여성들의 지위가 역전된 것이다.”
 
 
 수십 년간의 공직 생활이 무색하지 않게 그녀는 북한사회에 대한 넓은 견문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의 위치와 지식을 쌓기까지 쉬운 길만은 아니었다. 역경과 투쟁으로 상징되는 그녀의 20대 시절에 대해 들어봤다.
 
 
-학창시절이 순탄치 만은 않았다는데.
“홀어머니께서 언니와 나를 키워주시느라 가정형편이 좋지 못했다. 당시 중앙대에 선호장학생 제도가 있었는데 선호장학생으로 중앙대에 수석 입학했다. 그리고 학과 교수님들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를 다니던 4년 동안 집에서 받은 생활비는 9만원이더라. 지금으로 치면 90만 원 정도 밖에 안 되는 금액이었다. 장학금을 꾸준히 받기 위해서 학부 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다.” 
 
 
-조기졸업을 할 정도면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겠다.
“격동의 시절에 어떻게 공부만 했겠는가. 공부도 많이 했지만 그만큼 사고도 많이 치고 다녔다. 학부생 시절 시위를 할 때 앞에서 북을 치고 있을 정도로 활발한 운동권 출신이었다. 그러다가 80년도에는 수배를 당해 경찰서 유치장에서 한 달 정도를 보낸 적도 있었다. 다행히도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교수님들과 학생처장님이 힘을 써주셔서 일이 잘 해결됐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고시공부도 못했을 것이다.(웃음)”
 
 
-행정고시 공부는 어떻게 시작했나.
“어머니의 평생소원이 고시공부하는 자식을 두는 것이었다. 그땐 어머니가 나한테 거는 기대가 크신 탓에 반강제적으로 고시공부를 하게 됐다. 처음엔 공무원이 권력의 앞잡이라는 생각에 공직진출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공부를 즐기다 보니 대학 강단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시공부를 하던 중에도 ‘공무원을 잠깐 하다가 유학가서 교수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고시를 준비하면서 난관은 없었나.
“1차 시험은 어려움 없이 붙었는데 2차 시험이 발목을 잡았다. 1차를 붙으면 2차 시험을 두 번 치를 수 있었다. 첫 번째 2차 시험은 공부를 안 해서 떨어졌는데 두 번째는 공부를 했는데도 떨어졌다. 그때 처음으로 공부해도 떨어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충격에 빠졌다. 그런데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 고시공부를 끝내야 겠다고 생각했다. 결국에 4번 만에 2차 시험을 통과했다.”
 
 
-운동권 출신이라 면접에서 받은 불이익은 없었나.
“면접을 보기 전까지 정말 무서웠다. 그런데 마침 그때가 우리나라가 직선제로 전환하려던 시기였다. 듣기로는 운동권 출신들에게 너무 엄하게 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왔다고 들었다. 운이 좋은 시기에 면접을 봐서 무사히 통과한 것 같다. 우리정부가 생각보다 잔인한 정부는 아니더라.(웃음)”  
 
 
 윤미량 동문에게 80년대는 파란만장함 그 자체였다.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압박감에 휩싸이던 학부 시절과 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한계를 느끼게 해준 고시생 시절은 그녀에게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공직에 진출하고도 그녀의 역경은 계속됐다.
 
 
-여성공무원으로서 차별이 심했다고 들었다.
“행정고시를 합격한 8번째 여성이 나였다. 그래서 통일부에서 맡아온 보직은 항상 내가 여성 1호였다. 처음에 발령받았을 때 나머지 여성들은 모두 비서직인데 반해 우리 부서에서 직급이 있는 여성은 나뿐이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남자들한텐 견제 받고 여자들한텐 질시를 받아왔다. 내가 거침없고 공격적인 성격이라 그나마 공직 생활을 무난히 이어나갈 수 있었다. 심적으론 많이 힘들었지만 겉으론 씩씩한 척 생활했다.”
 
 
-일을 하면서 본인만의 신조가 생겼을 것 같은데.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한자로는 불광불급이라는 말이다. 일에 미치지 못하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어떤 일이든 항상 미쳐 있었던 것 같다. 남북상근회담대표를 역임할 때도 미쳐 있었고 하나원장을 할 때도 대거 개혁을 실행했었다.”
 
 
-그렇다면 요즘 가장 미쳐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통일교육이다. 민족 과제인 통일을 국민들에게 어떻게 가르칠지 여러 방면에 걸쳐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새로운 통일교육이라면.
“문화적으로, 정서적으로 어필하는 통일교육을 실시하고 싶다. 인문학적인 접근방법에서 국민들의 참여를 일으키는 통일교육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그동안의 통일교육은 논리적인 설명 위주였다. 통일이 민족과제이다 보니 우리가 통일 자체를 너무 딱딱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통일교육의 대상은. 
“전 국민이 교육의 대상이다. 그러나 분단의 아픔을 겪은 기성세대와는 달리 젊은 세대는 분단 통일에 너무 둔감해지고 있다. 통일교육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긴 하지만 학교에서 진행되는 통일교육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학교통일교육인가.
“지난 8월에는 통일교육지원법이 개정돼 학교에서 통일교육을 강화하도록 규정화됐다. 학생들에게 현장체험을 통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DMZ를 찾아가서 분단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통일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예고한 윤미량 원장과의 인터뷰는 통일 정세에 대한 담론으로 이어졌다. 현재 분단 상황과 통일의 전망에 대한 윤미량 원장의 의견을 들어봤다.  
 
 
-통일이 이뤄져야 되는 이유는.
“분단 이후 대한민국은 반도가 아닌 섬나라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지리적인 제약은 우리나라가 미국과 중국 같은 국가들에 의해 간섭받는 조건이 된다. 우리가 분단을 이루지 않으면 평생 계속될 일이다. 또 이런 분단 상황 속에서 우리의 의식 구조까지 단편화된다. 지리적 단위가 좁으면 우리도 모르게 사고 자체도 좁아지게 된다. 이런 저해들을 막기 위해서라도 분단극복은 필수적이다.”
 
-통일에 대한 전망을 바라본다면.
“누구도 알 수 없다. 과거 서독 총리 헬무트 콜도 독일의 통일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말을 하고 불과 몇 달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현재 분단 상황은.
“남북관계는 항상 기복이 있었다. 지금도 남북관계는 이산가족, 개성공단 등의 문제 등으로 인해 냉탕과 열탕을 오가고 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20년 동안의 남북관계와 현재 남북관계는 완전히 다르다. 긴 추세로 봤을 때 남북관계는 3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그런 맥락에서 남북이 쌍방으로 통일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반국민들이 통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탈북자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간혹 탈북자들 중에 해외로 이민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외국에 가면 언어적으로 생활이 불편할 뿐이지만 남한에선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만으로 더 차별받는다고 한다. 국민들이 보기에 탈북민이 말도 다르고 행동이 서투를 수 있다. 그러나 국민들이 한 걸음 뒤에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자세만 보여도 그것이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내가 가장 힘들고 비참했던 시절에 나를 품어준 곳이다. 1980년대는 내가 가장 열정적이었던 시기였지만 동시에 가장 비참한 생활을 보내던 시절이기도 하다. 고난과 역경으로 얼룩졌던 나를 품고 지금의 나를 만든 곳이 중앙대다.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는 중앙대에 항상 감사한다.”
 
   
 
통일교육원의 모든 것
통일부에 대해선 언론매체를 통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러나 통일교육원이라는 기관에 대해선 생소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윤미량 원장이 대표로 있는 통일교육원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 상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통일교육원은 1972년 우리국민들에게 남북관계에 대한 관심과 통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표로 창설됐습니다. 통일 달성을 위해 국민에게 필요한 안보관 함양이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통일교육원은 실제로 어떻게 운영될까요?
 
-통일교육원에서 교육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나. 
“전 국민을 교육의 대상으로 하는 통일교육원의 교육은 크게 초청교육과 방문교육으로 나뉘어 진다. 그러나 전 국민을 교육원으로 부를 수 없어 군인, 교사, 선생, 강사 등의 중간전달자들을 초청해 교육을 시킨다. 교육을 받은 중간전달자들이 일상으로 돌아가 전파를 하도록 하는 것이 초청교육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방문교육은.
“방문교육은 통일교육원 소속의 강사들을 전국으로 파견하는 것이다. 통일교육원은 총 16개의 협의회로 구성돼 전국에 16개 지역에 나뉘어져 있다. 통일교육원은 16개 지역으로 강사들을 파견시켜 방문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 윤미량 동문.jpg (File Size:169.9KB/Download: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