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4년 3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황재형 동문의 그림은 민중의 땀과 함께 한다. 학부시절 야학과 공단에서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에 주목했던 그는 우리사회에서 제일 소외되고 막장이라 불리던 강원도 탄광촌까지 찾아가 민중의 삶을 직접 체험하는 진정한 화가로서의 꿈을 키운다. 지난 40년 간 대한민국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탄광촌 현장에서 우리 민중의 삶을 그려냈던 한 화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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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흔적을 캔버스에 그리려는 열정을 갖고 사는 화가가 있다. 예술의 본질은 소통이라 생각하며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과의 소통을 위해 직접 탄광촌에 뛰어든 황재형 동문. 관찰자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삶과 그림이 일치하는 작품을 위해 노력하는 광부화가, 황재형 동문을 만나봤다.
 
 
-작년 11월 전시회를 통해 40년 만에 고향을 찾았다. 
“광주시립미술관의 공식 초청을 받고 전시회를 열었다. 40년 전에 떠난 고향에서 나의 작품세계를 공식적으로 선보였지만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고향을 떠날 때는 훌륭한 화가가 되어 돌아와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 모습이 생각했던 만큼 훌륭하지 않으니 고향 사람들에게 민망할 따름이었다.”
 
 
-모든 작품을 선보였다고 들었다.
“해당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오랜만에 고향에서 전시회를 여는 만큼 나를 모르는 후배들에게 내 작품을 가장 면밀하게 보여줄 수 없겠냐고 하더라. 부끄러웠지만 후배들에게 나의 작품세계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연도순으로 정리해 선보였다.”
 
 
-몇 해 전 개인전의 명칭도 <삶의 주름, 땀의 무게>로 바뀌었다.
“나이가 들면서 예술의 폭이 조금은 넓어지지 않았나 생각해 제목을 바꾸었다. 이렇게 말하면 부끄럽지만 내 예술을 조금은 더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어휘를 쓰고 싶었다. 그전까진 <쥘 흙과 뉘일 땅>이란 제목으로 1984년도부터 2010년도까지 개인전을 열어왔었다. ‘쥘 흙’은 우리의 본질을, ‘뉘일 땅’은 우리 사회를 의미한다. 본질은 있어도 돌아갈 사회는 없다는 게 졸업할 때 느꼈던 사회에 대한 내 생각이었다.”
 
 
-미술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유일하게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게 붓과 물감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해 어릴 적부터 아주 집중적인 미술교육을 받으면서 자라왔다. 일반학교의 미술교육은 전문적으로 배우기에 너무 부족했고 학교생활도 나와 맞지 않아 고1때 자퇴했다.”
 
 
-학교생활이 맞지 않았다니.
“선생이 성적을 기준으로 학생들에게 체벌을 내리는 게 너무 부당하게 느껴졌다. 낮은 성적이 학교규율에 어긋난다고 학생들을 100대씩이나 때리는 선생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등학생들이라면 사실상 가장으로서 집안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성인이 아닌가. 그런데 단순히 영단어를 외우지 못한다고 권위적이고 획일적인 잣대로 아이들을 때리면서 그들의 인격을 파괴하는 게 너무나도 부당했다.”
 
 
-체벌에 반항해 자퇴를 한 것인가.
“고등학교 1학년 어느 날 나를 때리고 있던 선생님의 팔을 붙잡고 한마디 내던졌다. ‘당신이 뭔데 나를 때리냐, 학교에 불을 안 지르고 그만두는 걸 다행인줄 알아라.’ 그렇게 외치고 그날부로 학교를 떠났다.”
 
 
-자퇴 이후에도 미술에 전념했나.
“고등학교를 떠나고 17,18살에 전라도 다도해에 있는 섬이란 섬은 다 돌아다니면서 홀로 여행을 다녔다. 그런데 전라도 다도해는 과거 무정부주의자들이나 6.25전쟁 때 활동했던 빨치산들이 많이 주둔하고 있던 곳이었다. 그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경험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무언가 얻은 게 있었을 것 같은데.
“한번은 바닷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한 할아버지가 내 그림을 보고 소질은 있는데 마치 동굴 안에 있는 석화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더니 예전에 그림에 굉장한 재능이 있던 한 청년이 자기 부족들로부터 그림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자 혼자 동굴로 들어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할아버지는 그게 마치 당시 내 모습과 흡사하단 것이었다. 예술의 본질은 소통과 기능인데 혼자서 즐기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그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내 그림이 남과 소통하지 못한다면 그건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대한민국 고등교육에 환멸을 느낀 후 제도권에서 멀어져버린 황재형 동문은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미술이 갖는 소통의 중요성을 몸소 체감하게 된다. 그러던 그는 사실화에 조예가 깊었던 중앙대 회화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부시절 그를 일깨우게 했던 건 단순한 미술작업만이 아니었다. 야학과 공단을 다니면서 삶의 방향이 새롭게 설정되던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 들어봤다.
 
 
-자퇴 이후 입시를 준비한 건가.
“산전수전 돌아다니다보니 입시준비는 전혀 생각에도 없었다. 그런데 대학에 진학하는 주위 친구들을 보면서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검정고시를 치른 뒤 중앙대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중졸로 끝날 뻔했던 학벌이 대졸이 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웃음)”
 
 
-어떤 학부시절을 보냈는지 궁금하다.
“큰 기대를 품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만큼 대학생활에 충실하진 못했다. 성격상 남들과 어울리고 다니는 편도 아니었고 어릴 적부터 너무나도 자유롭게 큰 나머지 대학생활도 너무 자유롭게 한 것 같다. 성실한 학부생활을 하지 못한 게 아직까지도 인생의 큰 미련으로 남아있다.”
 
 
-그래도 미술인으로서의 미래를 계획하지 않았나.
“학부시절 야학을 다니면서 사상적인 토대를 형성했다. 야학에서 구로공단과 마산창원공업단지를 알게 돼 그곳에서 궂은 노동일을 하며 학비를 벌곤 했다. 그러면서 노동이란 가치에 대해 여실히 느꼈다.”
 
 
-야학과 공단을 다니면서 느낀 점이 많은 것 같다.
“뚜렷하게 사회현실을 인식하고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안목이 생겼다. 당시 대한민국은 노동이 자본으로 환산되고 인간의 보람에 기여하는 부분은 극히 드물었던 초기산업화사회였다. 그런데 노동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불온한 사상가로 전락하는 기형적인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그래도 노동에 대한 나의 질문은 끊이질 않았고 내 작품에도 노동이란 가치가 스며들게 되었다.”
 
 
-그래서 탄광촌에 입성한 것인가.
“노동자로 일하면서 공단에서 해고되는 사람들이 강원도 탄광촌에 가서 광부가 될 수밖에 없던 현실을 목격했다. 제3세계였던 80년대 대한민국의 또 다른 제3세계가 바로 탄광촌이었다. 금융자본의 끝인 동시에 한국사회의 모순이 가장 심하게 드러나는 곳이었다. 그런 탄광촌에서 광부생활을 하던 이들의 삶을 작품에 옮기고자 83년도 탄광촌에 입성했다.”
 
 
-어떤 생활을 했는지 궁금하다.
“탄광에선 광부생활을 하고 일이 끝나면 집에서 미술작업을 했다. 눈이 나빠 광산에서 작업을 할 때 렌즈를 끼고 일했는데 렌즈랑 밀착된 안구에 탄가루가 들어오면서 결막염에 걸리게 됐다. 결막염에 걸리기 전까지 3년 동안 낮에는 광산에서 일하고 밤에는 미술작업에 몰두했다.”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첫 작품이 <황지330>이었다.
“정동탄광이란 곳에서 일을 하다가 아내가 집을 나간 한 선배 탄부와 친해졌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집으로 초대해 보게 된 그 광부의 집안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몇 달 동안 먹다 남은 음식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현장의 냄새를 맡고 구토가 나왔다. 그런데 인간을 이해하고 철학적으로 생각해야 되는 예술인이 밥을 먹다가 구토증을 느낀다는 게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이 구경꾼에 그치지 못한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그 집을 다시 방문해보니까 그 탄부는 돌아가신 상태였고 그 분의 집에 있는 광부복을 그린 게 <황지330>이다.”
 
 
 
 1981년도 화가 데뷔작인 <황지330>을 중앙미술대전에 출품해 장려상을 수상한 황재형 동문은 미술계에 성공적으로 입성하게 된다. 관찰자의 신분에서 벗어나 탄광으로 들어갔던 그는 지난 수 십 년간 우리의 삶을 파고드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작품제작에 있어 황재형 동문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을까.
 
 
-평소 작업에 들어갈 때 무엇에 중점을 두는 편인가.
“내 가슴이 아리도록 전율이 느껴져야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 정도의 전율을 느낄 때는 그림이 저절로 그려지더라. 전율 없이 그린 그림은 다른 사람이 봐도 전율이 없고, 단지 아름다워서 그리면 감흥 자체가 없다.”
 
 
-연출기법도 궁금하다.
“나는 철저한 사실주의자다. 상상 속에서 생각해낸 피상적인 관념을 그리지 않고 살아가면서 느껴지는 것들만 그려낸다. 그러나 최근에는 보이는 사실성보다는 내면의 진실을 그려내려고 하는 편이다.”
 
 
-무슨 말인가.
“예전에 술을 먹고 집에 들어오는데 눈보라가 엄청나게 친 적이 있었다. 눈보라와 어울려져있는 태백산을 보면서 꼭 그려보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눈보라를 맞으며 태백산을 그린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그림을 그리려 했는데 내가 정말 그리고 싶었던 눈보라와 바람은 온데간데없고 조용한 태백산만 보이더라. 그때 단순히 보이는 겉모습보다 삶의 본질을 그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작품활동의 지향점이 있다면.
“내 그림으로 편안한 잠자리를 자는 사람들의 안일함을 깨뜨리는 동시에 너무 불편한 잠자리를 갖는 사람에겐 위로가 될 수 있는 작품을 그려 대중과 소통하고 싶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모순된 현장이라고 느낀 탄광촌에서 광부 일을 자처하며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황재형 동문이지만 한국적인 가치에 기반을 두지 못한 한국미술도 학부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고민이었다. 
 
 
-졸업 직후에 <임술년>이란 단체를 창립한 적도 있다.
“임술년 9만8천992 제곱킬로미터. 남한의 총면적이다. 임술년은 ‘지금’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의 면적 속에서 한국화단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자는 것이 창립 취지였다. 그 당시 한국화단은 굉장히 서구지향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의 것에 대한 탐구보다 서구지향적인 예술만 탐구하는 게 가장 큰 병폐였다. 그래서 이 땅을 기반으로 둔 예술을 열어가겠다 하는 취지에서 <임술년>을 창립했다.”
 
 
-어떤 활동을 한 것인가.
“창립단원이 7명이 각자 자기가 맡은 분야 속에서 미술을 통한 문화운동을 한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지역의 정서를 녹여낼 수 있는 예술을 만드는 게 궁극적인 목표였지만 단체가 해체되면서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지금의 한국미술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
“예술에 대한 인식은 넓어졌는데 대중과의 소통이 자본에 묶여 있다. 자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작가들은 기계적으로 작품을 팔아야 하는 입장이다. 후기산업사회에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자본의 역할이 축소되고 영혼의 흔적이 느껴지는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한국미술이 나왔으면 좋겠다.”
 
 
-진정한 화가의 모습을 무엇인가.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현실에 순응하기보다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미래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 도전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진정한 화가는 이 사회의 병폐를 볼 줄 알고 그걸 작품에 녹일 줄 알아야 한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큰 기대감을 품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너무 자유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나머지 성실한 대학생활을 하지 못했었다. 대학생활을 충실하게 하지 못한 나에게 중앙대는 항상 그리운 곳이다. 동시에 나의 예술세계를 발전시키는 촉매이자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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