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3년 8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10년 후를 바라보며 꿈을 키워온 한 사람이 있다. 학부생 시절부터 대학원 그리고 창업을 결심하기까지 늘 한결같이 달려온 신현국 ㈜지오엘리먼트 회장이다. 그의 열정과 꿈에 대한 믿음은 경제 불황의 위기도 거뜬히 넘길 수 있었고 그를 반도체 화학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었다. 최근엔 반도체 산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세계 3대 인명사전 중 하나인 ‘마르퀴즈 후즈 후(Marquis Who’s Who)’에서 발간하는 ‘후즈 후 인 더 월드(Who’s Who in the World)’에 등재됐다. 사업을 처음 일구었던 그때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처음의 목표를 이루었다는 그는 또다시 10년 후를 생각하며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항상 성공 할 수는 없다

실패했다고 거기서 그만두면

정말 실패하는 거다

 

나는 늘 

10년 후를 생각한다

그점이 내 경쟁력이다

 

 

신현국 동문.jpg

 

 

 

그가 어린 시절부터 화학분야의 기업가를 꿈꾸었던 것은 아니다. 신현국 회장에게 꿈이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었다. 2002년 월드컵 4강신화가 펼쳐진 무렵 자주 쓰이던 “dreams come true” 속 꿈처럼 그때 그 시대에 따라 의미가 변하는 것이 꿈이기 때문이다. 여느 또래처럼 대통령, 변호사, 판사를 꿈꾸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운명처럼 화학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상황에 따라 꿈도 변한다던 그가 화학과 사랑에 빠지던 그때 그 시절이 궁금하다. 

 

 

-화학에 흥미를 가지게 된 계기가 뭔가.

“고등학교 화학선생님이 아버지 친구의 아들로 평소 형이라고 부르던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다 보니 커닝을 할 수도 없고 성적을 못 받으면 창피하니까 열심히 공부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화학이 점점 쉬워지더라.” 

 

 

-단순히 흥미로만 그치진 않았던 것 같다.

“아주 소질이 없지 않는 이상 뭐든지 한 분야를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는 것 같다. 화학이 내 적성에 잘 맞기도 했고 대학에 갈 무렵, 내 점수랑 맞는 게 딱 화학과더라. 그렇게 꿈을 화학과 진학으로 굳히고 중앙대에 입학했다.” 

 

 

-실제로 화학과 학생들은 실험을 많이 하나.

“그 당시엔 학부생에게 지도교수 제도가 없었다. 물론 학생이 교수님께 직접 요청하면 학생의 요청을 거절하는 교수님은 없었지만 대부분 그렇게 할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나의 경우엔 운 좋게도 2학년 때부터 한 교수님 밑에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운이 좋았다니.

“좋은 입과 좋은 귀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입을 가져야 하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서 그 뜻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벌고 싶으면 교수님 밑으로 들어 가보라던, 한 선배가 무심코 던진 말을 나는 내 것으로 승화시키고 직접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다.” 

 

 

-주로 어떤 실험을 했나.

“실험이라는 게 유리기구들을 닦고 깨끗하게 말리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땐 이걸 왜 하지 싶었지만 대학원 진학 후에서야 실험할 기구를 닦는 과정이 가장 기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외국으로 공부하러 갈 정도면 학구열이 상당히 높았을 것 같다.

“보통 학위를 따면 학구열이 높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1등은 아니었다. 대학원 진학도 단순히 학구열이 높아서라기보단 다들 원하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당시 나는 성적과 관계없이 박사 학위를 따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 다니면서 솔직히 놀기도 많이 놀았다. 당구장 카운터 보는 애 이름까지도 기억할 정도니까.(웃음)”

 

 

-커닝 사건이 있었다는데.

“4학년 때 말을 조금 더듬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졸업을 해야 하는 데 평소 공부를 너무 안한 것이다. 근데 머리는 좋아서 커닝페이퍼를 만들면 그건 다 외우던 애였다. 한번은 시험을 보는데 친구가 급한 마음에 내가 쓴 시험지를 그냥 가져가 버렸다. 하필 중풍으로 말을 더듬던 교수님 시험이었다. 교수님이 친구의 커닝 장면을 목격하시곤 ‘자...자네 지금 뭐...하는건가’라고 하시는 거다. 그때 친구도 말을 더듬는 친구라 ‘아..아..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해버렸다. 교수님이 친구가 자신을 따라한다고 생각해서 결국 둘 다 재시험을 치르게 됐다. 그런데 친구는 A+, 나는 A를 받았다. 친구 머리가 비상하긴 했나보다.(웃음)”

 

 

졸업 후 박사학위를 따야겠다는 생각으로 오른 유학길. 그는 총 6년 정도의 시간을 외국에서 보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유학생활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언어적 어려움으로 석사과정 당시 생화학을 공부하는 데 애를 먹은 것이다. 이로 인해 웨인 주립대학에서 생화학 학위를 다 마치지 못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 하지 않았다. 피나는 노력 끝에 그는 뉴멕시코 대학에 1등으로 입학했다. 그 후 석사와 박사과정을 3년 만에 끝내는 최단기 졸업생이 되었다.

 

 

-당시 뉴멕시코 대학에서 주목을 받았겠다.

“1등이라는 입학성적 때문에 여러 교수들이 지도교수를 맡아주겠다고 제의를 했다. 그때 나는 이미 석사과정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버렸기 때문에 재정적인 문제가 절실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한 교수와 쉽게 말해 ‘딜’을 했다.”

 

 

-딜이라니.

“우선 장학금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원래 받던 금액에서 100불 정도를 더 받아 1100불을 받았다. 그리고 뭘 공부하고 싶냐는 물음에 한국에 돌아가서 기업을 이룰 수 있는 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사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공부한 것이다.” 

 

 

-그렇다면 박사과정을 마친 후 바로 창업에 뛰어든 건가.

“바로 창업을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연구를 하는 동안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 교수를 한다고 하니까 중간에 교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교수시험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대학은 잘 안되더라. 마지막에서 자꾸 떨어졌다. 그러던 중에 여러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그 중 삼성전자를 선택하게 됐다.”

 

 

-직업으로 삼기에 손색이 없는 조건이었는데 과감히 그만두었다.

“스카웃 제의를 받고 1년 정도 근무하고 회사를 나왔다. 대학원 때부터 사업을 생각하고 연구를 했으니 사업에 대한 열망이 컸던 것 같다. 회사에서 내 아이디어는 전체 사원의 아이디어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내 생각을 마음껏 펼치고 싶었다.”

 

 

1994년 그는 유피케미칼이라는 작은 연구소를 차렸다. 13평 남짓한 작은 규모의 공간이었다. 삼성전자에서 받은 스카우트 비용을 정리하고 남은 금액은 1,300만 원 정도. 여유롭지 않은 창업 자금이었기에 직원은 고작 후배 한 명이었고 실험실 안에 가구들은 주변 공사장을 돌아다니며 얻은 재료로 손수 만들었다. 말 그대로 아주 초라한 창고형 창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구 성과와 기술력만으로 반도체 화학분야의 세계 1등으로 자리매김하는 기업을 만들어냈다. 

 

 

-유학경험과 삼성전자 근무 등의 화려한 경력치고는 초라한 시작이다.

“첫 시작은 초라했지만 젊었기 때문에 무난하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처가 창업에 대해서 바가지를 긁지 않아서 다행이었다.(웃음) 주변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더라. 만약 주변에서 상황을 불안하게 조성했다면 사업이 잘 안됐을 수도 있다.” 

 

 

-4년 뒤에 미국 회사로부터 45억이라는 자금을 유치 받았는데.

“그 당시 거대기업이었던 Rohm&Haas사가 매출액 2억도 안 되는 우리 회사에 투자했다. 아마 내 기술을 알아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을까. 어떤 일을 할 때는 최소 10년 후를 생각하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학원 때 공부했던 아이템을 가지고 사업을 했고 그 결과 그 분야에서 특허를 받기도 했다. 처음엔 투자 제안을 3번 거절했다. 100% 국내 회사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IMF가 터져버렸다. 결국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손을 잡게 됐다.”

 

 

-투자를 받은 이후 바로 성공의 길로 접어들었나.

“그 뒤로도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실험과 연구를 하며 크고 작은 화재가 나기도 했고 경제적으로 성과를 내야하는 강박관념도 있었지만 점차 매출액 대비 이익이 커지기 시작했다. 경영을 잘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이 좋았기 때문이다. 결국 1998년에 투자한 그 회사는 2008년에 1,100억이라는 이익을 보고 나갔다.(웃음)”

 

 

-외국회사에서도 알아보던 그 기술이 어떤 기술인지 궁금하다.

“쉽게 말해 반도체 칩 안에서 전자가 이동하는 길, 전자를 기억하는 기억장치를 만들어주는 화학 약품을 만드는 기술이다. 1988년부터 연구를 시작해서 세계최초로 이 기술을 상용화했다.” 

 

 

-최근 세계인명사전에도 등재됐다. 

“개인적으로 정말 영예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잘해야겠다는 것은 좀 더 좋은 것을 개발해서 세상을 좋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돕고 싶다는 것이다.” 

 

 

-올해부턴 중앙대와 새로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데.

“2013년부터 중앙대학교 산학협력단 특임교수로 지내게 됐다. 내가 가지고 있던 이제까지의 경험과 산업에 대한 경험을 잘 연계해서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지 그런 점에서 도움을 주고 싶다. 아직까지 학생들과의 잦은 교류는 없지만 다음 학기부터는 많아질 것 같다.” 

 

 

-현재는 유피케미칼이 아닌 지오엘리먼트 회사의 회장이다. 

“꿈은 변해간다는 게 내 생각이다. 10년을 바라보고 하던 사업을 이뤘으니 그 다음의 꿈을 꾸고자 했다. 내가 가던 길이 산업계로 가는 것이었으니 계속해서 산업계로 간다면 기반을 조금 더 다지고 싶었다. 즉 10년 뒤에 있는 꿈을 향해서 지오엘리먼트를 설립하게 됐다. 유피케미칼은 현재 우리금융그룹에서 더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경영을 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우선 화장품회사, 투자 회사, LED회사 등 여러 산업분야로 기업을 확장시키고 싶다. 작게나마 지오라는 그룹을 만들고 싶은 게 나의 또 다른 꿈이다. 또한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이 도움이 된다면 젊은 사람들에게 그런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전도사이자 좋은 바이러스가 되어 향후 사회에 좋은 역할을 하고 싶다.”

 

 

-중앙대 동문과 재학생에게 하고 싶은 말은.

“존 F. 케네디의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나라가 그대를 위해 무언가 해주길 요구하지 말고, 그대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라)’ 라는 말이 있다. 즉 무엇을 바라는 것보다 나도 무엇을 해줄 수 있는 동문, 후배가 됐으면 좋겠다.” 

 

 

세계 1등의 기업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신현국 회장의 경영철학은 바로 ‘덕불고(德不孤)’다. 그의 선친이 직접 써준 세 글자로 덕을 베풀면 주변에 이웃들이 많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는 뜻이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그는 회사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덕이 있는 회사를 지향했다. 회사 경영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자신이 얻은 경험을 이웃과 나누고 싶다는 그. 나누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경영철학이 그의 성공의 비결은 아니었을까. 

 

<실천하는 나눔>

 

“내가 받았던 혜택 

 내 마음이 편할 만큼     

이웃과 나누고 싶어”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사회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 여기 독특한 기부철학으로 꾸준한 사회공헌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신현국 회장이다. ‘내 마음이 편한 만큼 나눈다’는 그의 기부활동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시작됐다.

 

 

-비행기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었다. 그때는 공부도 다 끝난 상태고 하니 기분이 꽤나 들떠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유니세프 안내문을 보게 된 거다. 유니세프 모금함에 동전을 넣으면서 생각했다.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더 큰 경제적 축복을 받는다면 내가 받았던 만큼 꼭 돌려줘야겠다고. 그때부터 사회 환원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유학시절 장학금을 얼마나 받았나.

“당시 가정형편이 부유한 편이 아니었다. 유학시절 학비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학비와 생활비까지 약 5만불 정도를 학교에서 받았다. 장학금이 없었다면 아마 중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출신 학교에 많은 돈을 기부하는 동문이 되었다는데.

“내가 받았던 혜택을 돌려주고 싶었다. 뉴멕시코 대학에는 10만 불을 기부하겠다고 하니 다들 놀래더라. 그런데 외국으로 한 번에 많은 금액을 줄 수가 없어 일 년에 삼만불 정도씩 나눠서 기부하고 있다.”

 

 

-중앙대에도 기부를 많이 한다고 들었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보상이 이공계가 상대적으로 다른 계열에 비해 적다보니 이공계 기피 현상이 발생하는 것 같다. 이공계 출신의 선배들의 성공을 보여준다면 이런 기피 현상을 조금씩 완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교에 기부를 하는 것 이외에도 그는 유니세프는 물론 한국 장애인 협회, 노인 복지회 인수원, 각종 보육원 등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친 바 있다. 자신의 기술이 곧 세계적인 기술이 된 그는 한국의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덕불고’라는 경영철학처럼 이웃에게 베풀며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내게 중앙대란 변하지 않아야 되는 곳, 그리고 나에게 꿈과 기회를 줬던 곳이다. 다른 말로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다. 만일 어머니 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꿈과 기회조차 누릴 수 없지 않았을까. 그래서 출신 학교를 모교라고 부르나보다. 중앙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성숙할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중앙대는 나의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약력

1986년 중앙대학교 화학 학사

1986년-1988년 미국 Wayne 주립대학교 화학

1988년-1991년 미국 Univ. of New Mexico 화학(박사)

1992년 삼성전자 반도체 메모리 연구소 선임연구원

1994년 ㈜유피케미칼 대표이사 회장(前)

2006년 ㈜지오엘리먼트 회장(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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