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4년 11월 중대신문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유럽에서 시작된 발레는 러시아를 거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전 세계 클래식 발레의 발산지가 사실상 러시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이 남자는 발레의 한국화를 이야기한다. 발레에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 한국화된 발레를 수출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자 소망이다.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당당히 내걸고 이원국발레단으로서 세계에 한국의 발레를 알리고 있는 이원국 동문을 만나봤다.
발레가 있기에 방황을 멈출 수 있었던 스무 살의 청춘
대학생 신분으로 프로 무용계에 출사표를 던지다
이원국 동문은 방년 48세의 나이를 불문하고 관객들에게 한결같은 공연을 선사하고 있는 노장의 발레리노다. 발레리노의 정년인 30대를 넘긴 지는 어느새 10여 년이 흘렀지만 동기들이 하나 둘씩 토슈즈를 내려놨을 때에도 그는 무대를 떠날 수 없었다. 무대 위에서 발레를 하는 매 순간이 이원국 동문에게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부터 발레와 함께였을까.
-처음 발레를 시작한 것은 언제였나.
“20살의 나이에 발레를 처음 배웠어요. 발레를 하는 사람들이 보통 9살에 발레를 시작하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었던 셈이에요.”
-뒤늦게 발레를 배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발레를 배워보는 게 어떻겠냐는 어머니의 제안 때문에 시작하게 됐어요. 남자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이 강했던 부산에서 나고 자랐던 터라 처음 이야기를 듣고는 제가 펄쩍 뛰었죠.”
-당시 부산 사람들은 발레를 어떻게 생각했나.
“남자답다는 것에 유별나게 반응했다고 할까요. 부산 사나이는 춤 비슷한 것도 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발레는 성별과 관련이 없는데 남자다운 행동이 아니라고 여겼던 거죠. 어렸을 적 사람들이 쇼프로그램에 나온 남자 댄서를 가리키며 ‘남자는 저러면 안 된다’고 손가락질했던 게 기억나요.”
-부산에서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청소년 시절 오랜 방황기를 거쳤어요. 딱 봐도 제가 거칠게 생겼잖아요.(웃음) 중학교 때 길을 잘못 들어 고등학교 때까지 8년을 헤맸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게 됐어요.”
-부모님이 마음고생을 하셨겠다.
“어머니가 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아들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지 염려하셨던 것 같아요. 제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어 보이는 일은 가리지 않고 다 시키셨죠.”
-가능성 있어 보이는 일이라면.
“농구부터 수영, 축구, 보디빌딩, 피아노, 서예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활동이 드물어요. 배우러 가는 곳마다 대단한 소질이 있다며 칭찬해줬지만 3일 정도가 지나면 싫증이 나버려 그만두기 일쑤였어요. 말 그대로 작심삼일이었죠.”
-결국 발레를 배우게 됐는데.
“시간을 갖고 어머니 말씀을 곱씹어보았어요. 어머니가 발레를 제안하셨을 때 제가 19살이었죠. 가출해서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던 시기라 얌전하게 지내고 있었어요. 또 1년이 지나니 철이 들었는지 부모님에게 효도하고픈 마음도 들더라고요.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학원에 나가 발레를 배워보기로 결심했어요. 그동안 저는 불효자라면 불효자였으니까요.”
-발레는 배울만 하던가.
“발레할 때 입는 타이즈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해보세요. 몸에 쫙 달라붙잖아요. 당시 제가 보디빌딩을 해서 팔뚝만 40cm가 넘을 정도로 덩치가 상당했거든요. 그런 남자 아이가 타이즈를 입으니 얼마나 민망했겠어요. 또 학원에는 여자 애들 밖에 없었는데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3달을 버티니까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어요.”
-그럼에도 발레를 그만두지 않은 연유는.
“발레를 그만두기 위한 핑계를 찾던 도중 발레 공연을 보러 갔다가 저처럼 발레를 하는 남자 아이들을 처음 봤어요. 무대에 선 60명 중 10명 정도가 남자더군요. 공연이 끝나고 무대에 섰던 한 남자 아이에게 대뜸 다가가 말을 걸었어요. 발레를 가르쳐 달라고요. 무대에서 가장 돋보였던 아이였거든요. 그 친구와 친해져 발레를 많이 배웠죠. 친구가 가르쳐준 대로 하니까 동작이 한결 자연스러웠어요. 그 뒤로 발레에 점점 흥미가 생겼죠.”
-늦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했다는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다.
“평생 부담이에요. 발레가 뭔지 알고 시작한 것도 아닌데다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게는 10년이 늦은 거잖아요. 그래서 발레를 진심으로 해보겠다고 결심한 뒤 단단히 각오를 했어요. 나는 이제 발레를 시작하지만 10년 뒤에는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요. 하루를 이틀처럼 살자는 생각으로 10년 동안 잠을 거르면서 연습에 매달렸어요.”
과거 학교를 자퇴했던 그는 발레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에 고등학교 복학을 결심하게 됐다. 이원국 동문의 피나는 노력은 알찬 결실이 되어 그에게 돌아왔다. 복학한 그 해 부산 KBS 콩쿠르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둔 것이다. 발레를 배운지 단 1년 3개월만의 일이었다.
-본인의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는지.
“실력에서 뒤지지 않는다는 믿음은 있었지만 발레, 한국무용, 현대무용 전 분야를 통틀어 대상을 받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저는 늦깎이 연습생이었잖아요. 수상 덕분에 실력에 대한 확신을 얻으면서 입시 준비에도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어요.”
-대학 입시 준비가 힘들진 않았나.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어요. 연습을 하다가 허리 부상으로 척추에 금이 갔거든요. 병원에서는 입원해야 한다고 했어요. 뼈에 금이 가면 통증이 심해서 걷는 게 불가능하다고요. 하지만 입시가 코앞인데 입원할 겨를이 어디 있겠어요. 입원하지 않고 6개월을 진통제로 버텼어요. 그 정도 시간이 지나니 저절로 뼈가 붙더라고요.(웃음)”
-부상을 감수하면서까지 발레에 매진했던 이유는.
“8년간 방황을 하며 마음 한켠에 한을 하나 품고 있었어요. ‘나는 말썽만 일으키고 욕만 먹는 사람인데 왜 태어난 것일까…’하는 생각이었죠. 내재되어 있던 감정이 제가 정말 좋아하는 발레를 만나게 되니까 의지로 바뀌어 깨어난 거예요. 과거 허비했던 시간들을 다 되돌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에요. 그러나 지나가버린 인생을 되돌릴 수 있나요.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에 발레만 바라봤던 거죠.”
-수상 후 1년 뒤에는 대학 진학에도 성공했다.
“22살의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니 감회가 새로웠어요. 우수한 학생으로 무용학과에 입학했죠. 당시 무용학과는 학력고사와 면접 점수를 합산해 신입생을 뽑았어요. 340점 만점에 학력고사가 320점, 체력장이 20점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300점이 넘으면 서울대를 가는 수준이죠. 한국무용을 담당하시는 송범 교수님이 면접관으로 들어와 제 학력고사 점수를 물어보셨어요. 농담 삼아 ‘300점이 조금 모자란다고’ 대답했죠.”
-농담 삼아서라니, 거짓말을 한 게 아닌가.
“거짓말을 의도했던 건 아니었어요. 별다른 의미 없이 허풍처럼 부풀려서 이야기했던 것이었죠. 학력고사에 100점을 맞든 299점을 맞든 어차피 300점에서 모자란 점수인 것은 맞는 소리니까요. 교수님께서 실기, 공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천재가 왔다며 칭찬해주셨는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아시곤 난리가 났어요. ‘이 놈의 자식이 거짓말을 했다’며 ‘학교를 못 다니게 할 것이다’고 엄포를 놓으셨죠. 교수님께 많이 죄송하네요.”
-학과 생활에 적극적인 학생이었는지.
“발레와 관련된 활동이라면 열심이었지만 그 밖의 생활적인 면에서는 엄격했어요. 발레를 하는 동안 술은 입에 안 대겠다고 결심도 했었죠. 지금은 오히려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술을 권하지만요.(웃음) 그런데 신입생 환영회를 가니 선배들이 술을 마시라고 하는 거예요. 어떤 선배가 건넨 술 한 사발을 죽 들이킨 뒤 ‘술자리에 휩쓸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죠. 술을 강요하는 문화가 싫었어요. 뿐만 아니라 저는 술이 아닌 무용을 배우려고 대학에 온 거니까요.”
-선배들이 가만히 있던가.
“저를 죽일 기세였어요. 거기다 제가 또 한마디 보탰죠. 오늘은 처음이라 인사하러 온 것이며 다음부터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요. 발레에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제 생각을 말했던 것이지만 1학년이 ‘내 인생 건드리지 말라’는 선전포고를 한 셈이니 선배들 입장에서는 기가 찼을 거예요.”
-이후에 선배들과는 어떻게 지냈나.
“한 번 더 부딪히기는 했어요. 왜 군기 잡는다고 하잖아요. 갓 복학한 선배들이 제가 너무 건방지다고 들고 일어난 거죠. 그래도 제 뜻은 변하지 않았어요. 제가 고학번이 되면 이런 악습은 없앨 것이라고 생각했죠.”
-학부 시절 공연을 나간 적도 있겠다.
“무용학과 차원에서 전국 순회공연을 나간 적이 있어요. 공연을 다닌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던 시절이에요. 그간 연습했던 것을 무대에서 맘껏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요. 또 예전에는 지금처럼 무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거든요.”
-당시 무용 실력은 어땠는지.
“제가 공연을 하면 전공, 선후배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와서 구경을 했어요. 그 정도로 실력이 괜찮았죠.(웃음) 선배들과의 오해도 자연스럽게 풀렸어요. 발레를 정말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제가 인격적으로 선배들을 무시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줬던 것 같아요.”
4학년 시절 이원국 동문은 세계적인 러시아 안무가 보리스 에이프만에게 캐스팅돼 <레퀴엠>의 객원 주역 무용수로 날개를 펼치기도 했다. 선배들을 따라 국립발레단에 놀러 갔던 그는 내로라하는 프로 무용수들을 재치고 에이프만의 마음을 한 눈에 사로잡아 버렸다. 에이프만이 그가 아니면 공연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을 정도니 말이다. 발레리노로 비상한 이원국 동문의 이야기를 담았다.
-대학생 때 국립발레단 무대에 섰다니 실력이 대단했다.
“운이 좋았죠. 이후에는 학부생으로서 <레퀴엠>의 객원 주역 무용수로 활동했던 덕을 좀 봤어요. 졸업과 동시에 섭외 요청이 와서 한국 최초의 민간 직업 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하게 됐거든요. 군무를 거치지 않고 솔리스트로 무대에 설 것을 약속받았어요. 대학생 때 국립발레단의 주역을 맡았던 경험을 상당히 실력 있다고 봐 주었던 것 같아요.”
-2년 만에 유니버설발레단을 떠난 사연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95년도에 미국 출신의 예술감독이 새로 부임해왔어요. 그는 미국 발레를 지향하더라고요. 러시아 발레를 배웠던 저는 그의 예술성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러시아 발레에는 대문호의 철학이 녹아있는 반면 미국 발레에는 겉핥기식 느낌이 적지 않다고 보거든요.”
-겉핥기식이라면.
“동선이 빠르고 발랄한 미국 발레에는 작품의 깊이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원래 예술가들이 자기 스타일에 대한 자존심이 상당히 강해요.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싶으면 아닌 거죠. 결국 제가 국립발레단으로 소속을 옮기게 됐어요.”
-국립발레단과는 어떻게 다시 인연을 맺게 된 건가.
“유니버설발레단에서 나오고 잠시 공백기가 있었어요. 참 생각이 많았던 때였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은 있는데 막상 할 일이 없으니 답답한 시간이었어요. 좋아하는 무대를 잃어버리니까 힘든 순간이 온 거죠. 다른 발레단을 적극적으로 찾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어요. 외국으로 나가볼까 하는 고민도 했죠.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났어요. 대학생 시절 객원 무용수로 활동했던 국립발레단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온 거예요.”
-국립발레단에서 어떤 업무를 수행했나.
“국립발레단의 수석단원으로 입단해 주역 무용수를 맡게 됐어요. 4년 뒤부터는 단원들의 무용을 지도하는 지도위원을 겸임하게 됐죠. 지도위원이 될 즈음 동료들은 이미 다 은퇴했고 주역을 맡은 후배들은 저랑 10살 차이가 났어요.”
-국립발레단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나.
“유니버설발레단이 프로로 살아가며 가장 큰 배움을 얻었던 곳이라면 국립발레단은 제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에요. 몸이 힘들지라도 제가 열심히 일함으로써 국립발레단이 발전한다고 생각했죠. 나아가 국립발레단의 발전이 국가를 위한 길이라는 모종의 애국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국립발레단은 국가에 소속되어 활동을 하는 발레단이니까요. 근무하면서 단 한 번도 연습에 빠진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단장님들이 공연을 꾸려 나감에 있어 저를 많이 믿어주셨던 것 같아요. 주관이 강한 제 성격상 건방진 면이 있다고 비춰지기도 했겠지만요.(웃음)”
-2004년 본인의 이름을 딴 이원국발레단을 창립하게 된 배경은.
“정년을 넘기고도 국립발레단의 주역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제가 가르친 제자들과 캐스팅 싸움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요. 선의의 경쟁이지만 주역은 고작 두 자리가 전부죠. 제가 한 자리를 맡아버리면 후배들은 더욱 주역으로 올라오기 어려워요. 실제로 저 때문에 주역이 되지 못하고 국립발레단을 떠난 후배들이 많았어요. 더 이상 버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립발레단을 떠나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것인지 고민하게 됐어요. 생각해보니 저는 계속 춤을 추고 싶더라고요. 후학을 양성할 겸 특별한 비전이 있는 나의 발레단을 꾸려보자고 결심했어요.”
-이원국발레단의 비전은.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 국립발레단 같은 큰 발레단이 할 수 없는 일을 이끌어보는 거예요. 바로 발레의 대중화죠. 한국을 대표하는 민간발레단으로서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무대라면 규모를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는 일이 한 사례가 될 수 있어요. 2008년 3월 17일부터 매주 월요일 대학로 소극장을 찾아 ‘월요발레’ 무대를 꾸미고 있는 이유기도 해요.”
-7년간 월요발레 무대를 뛰며 기억하는 관객들이 있다면.
“하루는 태풍이 온다는 예보가 떨어져 딱 한 분의 손님이 왔더라고요. 월요발레를 보기 위해 분당에서 전철을 타고 오신 분이었어요. 공연을 취소하려다가 리허설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체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공연 시작 10분 전에 두 사람이 더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그날의 월요발레는 정말 리허설로 끝났을지도 몰라요. 어디서 오신 분들이냐고 여쭤보니 일산에서 오셨다고 하더군요. 그 세 분의 손님을 위해 단원들과 공연을 했던 추억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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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중앙대란?
“사실 학창 시절 특별하게 아름다운 사연이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절을 보냈던 장소인 만큼 학교 곳곳에는 그리운 추억이 숨어있어요. 교수님들이 조언해주셨던 내용을 항상 가슴에 간직하며 살고 있어요. 국수호 교수님은 ‘무언가를 놓고 저울질하는 순간이 올 때 양심의 소리를 들어라’고 말씀해주셨죠. 그 가르침이 있었기에 어려운 일을 맞닥뜨릴 때마다 잘 극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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