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4년 4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 이항복 동문은 2011년 자랑스런 중앙인상을, 2005년 자랑스런 중앙건축인상을 수상하였다.
<Duty to God, duty to others, duty to self> 신, 타인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해야 될 의무가 있다는 스카우트의 3대 선서다. 스카우트를 시작한 이래 이 선서를 가슴 속에 품어온 한 스카우트 소년은 최고위급 범스카우트를 거쳐 161개국 3,400만 명의 스카우트를 대표하는 세계스카우트 이사회 의장이 되었다. 지금도 청소년들을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으로 육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항복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의도 한국스카우트연맹에서 포즈를 취하는 이항복 동문.
의장으로서
세계스카우트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48년 스카우트 인생
한국스카우트의 세계화를
주도한다
스카우트 단복을 입은 이래 일일일선(一日一善)이란 스카우트 정신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온 이항복 동문. 산에서 친구들과 부대끼며 놀기를 유난히 좋아하던 그는 지난 40년간의 스카우트 경험을 바탕으로 전세계 스카우트 대원들의 수장이 되었다. 청소년운동의 주요정책을 결정하는 이항복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스카우트는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는가.
“청소년들이 자연 속에서의 모험을 통해 생존하는 방식을 터득하고 공유하는 게 스카우트의 주 활동이다. 이런 활동을 통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게끔 한 뒤 청소년들이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 혹은 시민을 육성시키는 게 스카우트의 목적이다.”
-그런 스카우트를 대표하는 세계스카우트 이사회 의장의 역할이 궁금하다.
“3년마다 개최하는 세계스카우트총회와 총회 사이에 집행될 스카우트 정책들을 결정하는 게 의장의 역할이다. 특정 국가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세계스카우트 차원에서 그에 따라 취해야 될 방침을 알려주고 청소년 운동의 방향을 잡아준다고 보면 된다.”
-각국의 문제에 대한 방침이라면.
“최근 케냐스카우트 총재직을 맡고 있는 케냐의 국회의원이 성소수자들에게 사형까지 집행할 수 있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세계스카우트연맹 입장에선 이것이 반인륜적인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기에 유엔이 정한 인권선언을 존중하며 케냐도 같은 기준을 존중하는 게 맞지 않냐는 의견을 전달했다. 대신 스카우트 활동은 비정치 집단이기 때문에 케냐의 정치상황에는 일체 개입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의장은 연맹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 뿐인가.
“세계스카우트연맹의 의견을 대변하는 동시에 스카우트 활동 여건을 조성하는 게 내 역할이기도 하다. 스카우트 활동을 지원하는 자금을 마련한다는 건데 이를 위해 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재력가들을 설득하여 발전기금을 받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 기금을 수혜 받고 있는 것인가.
“의장 자격으로 세계적인 재력가들을 찾아가 투자금을 받아오고 있다. 세계스카우트 부의장을 맡고 있던 2009년 세계스카우트 지원재단 명예이사장인 스웨덴 칼 구스타 국왕과 함께 압둘라 국왕의 투자 약속을 받으러 중동으로 향했다. 세계스카우트가 추진하는 사업의 취지를 국왕에게 설명했고 계획한 사업을 실현하기 위해선 발전기금이 필요하다는 점을 어필했다. 결국 2011년을 시작으로 매년 37억씩 10년간 370억 원의 발전기금을 받아내기로 압둘라 국왕의 약속을 받아냈다. 의장으로서 이룬 가장 역사적인 업적인 셈이다.(웃음)”
-현재 세계스카우트연맹이 주목하는 프로젝트가 있는지 궁금하다.
“40년 전 야영이나 캠핑 활동은 스카우트만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인들도 독자적으로 즐기는 활동들이 돼버렸다. 이렇다보니 최근 세계스카우트도 단순히 청소년 활동에 집중하기보다 청소년들의 공동체적 운동을 ‘평화’라는 테마에 맞춰 여러 사업의 형태로 진행하고 있다.”
-청소년운동을 어떻게 평화라는 테마에 맞춰 구체화시키는 것인가.
“<Gift for Peace>와 <Ticket to Life>라는 두 가지 프로젝트를 통해 평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Gift for Peace>는 스카우트 활동을 통해 가정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도와주는 사업이다. 이런 활동의 연장으로 진행되는 <Ticket to Life>는 길거리에 사는 집 없는 아이들에게 스카우트 활동을 권장하여 술, 담배, 마약에 찌들어 살던 아이들이 정규교육 과정을 밟도록 하는 사업이다. 이런 사업을 지속시키기 위해선 자금이 필요하니 의장인 내가 또 다른 투자자를 만나러 가야 된다.(웃음)”
세계연맹의 주요 스카우트 사업을 결정하고 진행하기까지는 스카우트에 대한 끊이지 않는 애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한국인 최초 세계스카우트 의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 이항복 동문이 어떻게 세계스카우트로 진출하게 됐는지 궁금했다.
-활동영역을 어떻게 세계스카우트로 넓히게 됐나.
“홍콩과 싱가폴에서 11년을 근무했는데 우수한 한국인 인력들이 언어적인 한계로 인해 국제무대에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는 걸 보게 됐다. 이런 생각에 한국스카우트가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언어적인 한계를 극복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 후 먼저 영어를 익히고 한국스카우트의 세계화를 위해 다양한 세계연맹 사람들과 인맥을 쌓기 시작했다.”
-부의장과 의장자리를 맡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우연한 기회에 2008년 제주도 세계스카우트 총회의 주최와 진행을 맡게 됐다. 지인들이 세계스카우트 이사 후보로 출마할 것을 추천했고 자의 반 타의 반 세계연맹 이사로 출마하여 최다득표로 부의장으로 선출됐다. 부의장으로 세계스카우트연맹에서 첫 보직을 맡게 됐고 2011년 브라질 총회에선 한국인 최초 세계스카우트 의장으로 뽑혔다.”
-이전 의장들과 전혀 다른 공약을 내세웠다.
“그동안 의장은 실무형 대원 출신보다 대기업 CEO같은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주로 선발되었다. 의장에 출마하기 전에 발표한 공약이 스카우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우선 지나치게 유럽화된 세계연맹의 활동영역을 아시아·태평양으로 넓히는 공약을 제시했다. 유럽은 물가나 인건비가 높은편이라 유럽에서 열리는 스카우트 활동은 운영경비도 굉장히 비싼 편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행사가 영어와 불어로 진행되어 아시아지역 스카우트 단체들이 소외된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영어로 언어를 통일하여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스카우트 단체들의 목소리가 세계스카우트에 더욱 잘 전달되도록 했다.”
-의장에 부임한 이후 이룬 주요업적이 있다면.
“1905년 영국에서 처음 스카우트가 출범한 이후 <Duty to God, duty to others, duty to self>. 즉 자신의 명예를 걸고 국가에 대한 의무, 남을 위한 봉사 그리고 자신에 관한 절제와 노력을 그 기본 덕목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의장으로 부임하고 이 선서에 큰 오류가 있다고 느꼈다. 신에 대한 맹세가 스카우트 활동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한정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선서의 정신적인 가치를 바꿨다는 것인가.
“스카우트는 어떤 신을 믿든 종교적 다양성을 존중하고 있다. 하지만 기본 선서에서 신에 대한 가치를 최우선시하면 무교인들이 스카우트에 반감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전통이 깊다한들 그런 정신적인 가치가 스카우트의 발전에 저해가 된다면 의장으로서 이를 변경해야 했다. 그래서 <Duty to God>을 <Duty to my Scouting Value>로 바꿔 무교인 모든 스카우트 대원들이 신이 아닌 자신만의 가치를 강조할 수 있게끔 했다. 그런데 나는 천주교인이다.(웃음)”
스카우트 활동 전파를 위해 사업 유치부터 선서 변경까지 가장 세심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 이항복 동문이 스카우트를 시작한 건 막연히 멋있어 보였던 친형의 단복 때문이었다. 1966년 이항복 동문과 스카우트와의 인연은 운명처럼 시작됐다.
-스카우트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어렸을 적 먼저 스카우트를 시작했던 형의 단복이 멋있어 보여서 중학교 1학년이던 1966년 부산서중에서 스카우트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스카우트를 지속할 수 있었던 건 평소에 모든 가능성 있는 일들에 대해 준비하고 산다는 스카우트의 생활자세였다. 항상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된다는 스카우트 정신이 어린 나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40년 전에 참여했던 스카우트 활동은 어땠는가.
“인명을 구조하는 구급법을 배우고 고아원이나 양로원에서 봉사활동은 물론이며 초등학교 앞에서 교통정리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무엇보다 친구들과 함께 한 달에 한번씩 산에 가는 게 그렇게 즐거웠다. 밥도 태워가면서 지어 먹어보고, 감도 불에 구워 먹어보기도 하는 산악 활동이 너무 행복했다.”
-그러던 1972년 범스카우트에 선정됐다.
“72년도는 내가 중앙대 72학번으로 입학한 연도이면서 스카우트 대원으로서는 0.05%에 속하는 범스카우트에 선정된 상징적인 연도이다. 1966년 스카우트를 시작해 중앙대 신입생으로 입학하던 1972년 20살에 범스카우트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범스카우트가 되기까지의 진급과정이 궁금하다.
“스카우트 활동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은 초급으로 시작해 2급, 1급, 별, 무궁화 그리고 범 순으로 진급과정을 거친다. 생존장, 구명장, 학업장을 기준으로 수영장에 들어가서 100m 이상을 일정 시간 내로 수영하고, 사람인형을 물에 빠뜨려 인명을 구조하는 작업을 거쳐 반에서 5% 이내 들어야 하는 학업장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자격을 갖춘 이가 범스카우트가 될 수 있다.”
-범스카우트에 선정됐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 가지 선서 중 타인에 대한 의무인 <Duty to Others>를 지키기 위해선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범스카우트다.”
-학부시절 때도 스카우트 활동을 이어나간 것인가.
“지금은 사라진 중앙대 스카우트 협의회에서 활동했다. 협의회에서 같이 스카우트 활동을 했던 학생들이 남녀끼리 짝을 지어서 서울시내에 있는 초등학교 스카우트 보조지도자 자격으로 초등학생들을 지도했던 기억이 난다.”
-졸업 이후 스카우트 생활을 업으로 삼진 않았는데.
“졸업 이후 전공인 건축공학을 살려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사실 스카우트 대원들은 스카우트 연맹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보직 직원이 될 수도 있지만 청소년들의 진로로 이어질 적성을 찾아주는 것이다. 스카우트를 통해 진로의 방향을 설정한 스카우트 출신들이 본업에 충실하면서 아직까지 스카우트로 활동하고 있다.”
중학교 때 시작했던 스카우트 활동에서 배운 3대선서 정신은 이항복 동문에게 인생의 지침서가 됐다. 남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스카우트의 기본 정신이 그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들어봤다.
-스카우트 활동이 인생에 있어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스카우트를 통해 나 자신이 성장하기도 했지만 한걸음 물러나서 남들을 바라보는 성격을 갖게 됐다. 3대 선서에서 신과 남들에게 충실해야 될 의무가 있다고 하는데 이런 의무를 지키려다 보니까 남들을 바라볼 때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생활습관이 생겼다. 그렇다보니 내 생활에도 기준이 생겨 질서가 생기게 됐다.”
-스카우트 활동의 정체성이 궁금하다.
“최근 대한민국 입시는 단순히 학업성적만이 아니라 봉사나 대외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시대가 지나면서 청소년들에게 전인적인 교육을 가르치는 방향으로 교육의 방향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전인교육의 정규적인 영역을 학교가 맡고 있다면 비정규적인 부분은 스카우트가 담당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청소년들이 스카우트를 통해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하는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우리 청소년들도 넓은 세상에서 꿈을 크게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언어적인 능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는 큰 꿈을 품었으면 한다. 꿈을 향해 정진하다보면 남을 도와줄 이유가 생기기도 하고 남을 도와주기 위해선 내가 스스로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여건을 갖춰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들에게 스카우트를 권하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한국스카우트가 세계에서 위치를 점하려면 2015년 아시아태평양총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해야 하고 2023년 세계잼버리를 꼭 한국에 유치시켜야 한다. 8월 총회를 끝으로 의장 임기가 끝나는데 한국스카우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내게 중앙대는 바꿀 수 없는 모태 같은 존재다. 졸업 이후 어디에 있든 중앙대 동문들을 모으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우리 동문들이 스스로 학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학교가 자랑스러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다. 재학생이든 졸업생이든 스스로 학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활동들을 했으면 한다.”
세계스카우트에 대하여
세계스카우트 운동(World Scout Movement)
1907년 영국의 베이든 포우엘 경이 브라운시 섬에서 20명의 소년들과 함께한 야영이 지구촌을 아우르는 청소년 운동으로 거듭났다. 지난 105년 동안 5억여 명 이상이 스카우트 활동을 했으며 현재는 3,400만여 명이 활동하고 있는 세계 최대 청소년육성단체다. 청소년들이 대자연 속에서 단체생활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 리더십을 키우며 자신의 잠재 능력을 계발하여 사회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훌륭한 시민을 육성하는 사회교육활동이다.
세계스카우트 총회(World Scout Conference)
3년마다 160개 회원국의 대표단이 세계 총회 주최국에 모여 지난 3년간의 스카우트 사업보고, 세계정책 결정, 세계이사 선출, 신입 회원국의 가입승인, 세계적 규모 행사 개최지 선정 등 스카우트의 주요사항을 결정하는 최고 의결기구다. 이항복 의장은 지난 2008년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38차 세계스카우트 총회에서 최다득표로 세계이사에 당선됐고 연이어 부의장을 선출됐다. 그리고 지난 2011년 브라질 쿠리비타에서 개최된 제39차 세계스카우트 총회에서 이사회 의장직에 올랐다.
세계스카우트 이사회(World Scout Committee)
3년마다 개최되는 세계스카우트 총회를 대신하는 상설 정책 심의 기구로서 스카운트운동의 재정적 지원 등 주요 안건을 심의한다. 이사회는 12명의 이사, 1명의 감사, 그리고 세계사무국 사무총장으로 구성되며 총회마다 6명씩 선출되고 임기는 각 6년이다. 이사회는 스카우트의 중요한 문제 또는 정책 결정을 위하여 매년 2회씩 세계사무국이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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