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4년 11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가리키는 염치(廉恥). 배병길 동문에게 염치는 스스로를 삼간다는 의미로 통한다. 그 미덕을 바탕으로 그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한다. “스스로 삼간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절제와 함께 상대편을 배려한다는 것을 가리켜요. 제게는 그 상대가 자연이에요.”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그의 건축 철학이다. 사람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삼는 겸손함이 결국 인간을 쾌적한 환경에서 살게 한다는 염치의 건축가를 만나봤다.

 

배병길 건축가.jpg

 

중력을 거부하고 관성에 저항하고 새로움에 도전하다

건축물에서 형태가 아닌 이야기를 보라

 

 

   한국에 건축이란 개념이 자리잡기 전부터 건축미술학과를 졸업해 미국으로 유학까지 갔던 청년이 있다. 그는 한국의 정형적인 건축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획기적인 건축물로 자신의 건축 세계를 증명해나가기 시작했다. 한국건축가협회의 수석 부회장이자 배병길도시건축연구소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배병길 동문.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그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다.

 


-어떤 가정에서 자랐나.
“삼강오륜과 효를 중요시하는 집안이랄까요. 조선 후기의 유학자, 만학당 선생님이 저희 할아버지에요. 예의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죠. 항상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지나치게 예의를 차려야 했어요. 어느 집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유교의 전통을 가진 집안에서는 자신의 행동을 전통에 맞춰 살아야 하거든요. 전통을 어기면 어른들의 불호령이 떨어지니까요.”


-어릴 적부터 형식을 중시하는 분위기에 맞추기가 쉽진 않았겠다.
“갑갑함을 많이 느꼈죠. 집안에서 엄격하게 지켜야 할 일련의 예의범절이 있다 보니 저는 편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살고 싶었어요. 딱딱한 가정 분위기가 싫더라고요.”


-선비 집안의 자손이 예술대 건축미술학과에 입학한 것은 의외다.
“사실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건축에 대해 잘 몰랐어요. 제가 시골에서 자랐거든요. 주위에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가 한정적이었어요. 당시 대학 졸업반이었던 사촌 형들이 유일한 정보통이었어요. 형들이 학과 선택을 고민하고 있던 제게 건축과를 추천해줬어요. 아무래도 대학 생활을 해본 사람들인데다 고등학생들을 과외해본 경험도 있었기에 믿음이 갔어요. 건축 분야가 유망하다고 하니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건축미술학과에 지원했죠. 속물 근성이 작용했던 것 같아요.(웃음)”


-건축미술학과는 요즘의 건축학부와 어떤 점이 다른가.
“예전에도 공대 소속의 건축공학과가 따로 있었어요. 그런데 건축공학과는 엔지니어를 육성하는 성격의 학과잖아요. 건축미술학과는 설계, 디자인을 배우는 학과라고 할 수 있죠. 건축의 본질에 더 가까워요.”


-대학생이 되고는 자유가 주어졌나.
“자유는 없었어요. 대학에 합격하고 서울로 올라오니까 큰집의 행사에 필참해야 했죠. 고조할아버지까지 제사를 모셨기 때문에 1년에 제사가 수차례 있었어요. 큰집에 오면 가장 먼저 병풍을 꺼내야 했어요. 제사가 끝나면 병풍을 거두어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놔야 했고요. 큰 제사상을 꺼내는 일도 남자인 제 몫이었죠. 제사가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앉아 있는 것은 더 고역이었어요. 숨을 잘 못 쉴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에 꿈쩍도 할 수 없었거든요.”


-그래도 대학 생활은 재미있었을 텐데.
“제가 사춘기를 제대로 거치지 못한 탓인지 학교에 불만이 많았어요. 입학을 해보니 학과와 잘 맞지 않더라고요. 제 의지보다는 형들이 추천해줘서 입학을 결정한 부분이 컸으니까요. 다른 친구들처럼 설계나 디자인을 전혀 할 줄 몰라 더 당황스러웠어요.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어요.”

  대학 생활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는 1학년을 마치고 곧바로 군대에 갔다. 평소 자유로운 생활 방식을 추구했던 그에게 군대는 크나큰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군대에서 극기의 정신을 몸소 습득했다는 배병길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군 생활은 할만 했는지.
“처음에는 학교보다 더 끔찍하더라고요. 아침 6시만 되면 일어나라고 그렇게 깨워요. 정해진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밤 10시에는 반드시 잠자리에 들어야 했어요. 개인의 사정은 그다지 고려해주지 않았어요. 군 생활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6개월이 참 힘들었죠. 그런데 6개월이 지나니 군 생활에 적응을 했나 봐요.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생활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편했어요. 새삼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을 느꼈어요.(웃음)”


-군대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나.
“군 생활에 적응하니 틈틈이 공부를 하고 싶더라고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군대에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어요. 우연히 영어사전 한 권을 얻게 되어 영어공부를 시작했어요. 공부에 불이 붙으니 하루 빨리 제대하고 싶더군요. 복학하고 나서는 전공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죠. 졸업할 때까지 매일 공부하느라 5시간 밖에 자지 못했어요. 대학 입시를 준비했을 때보다 2~3배는 더 열심히 공부한 것 같아요.”


-영어사전은 어떻게 얻은 건가.
“식사 당번이라 잔반통을 비우러 쓰레기장에 갔는데 그을린 영어사전이 버려져 있었어요. 갓 입대한 훈련병들의 소지품들 중에서 타다 남은 물건 같았어요. 군대에 반입할 수 없는 물건들은 압수해 태워버리기도 하거든요. 사전을 주워 닦아보니 제법 깨끗하더라고요. 그 사전 한 권을 들고 다니며 모든 단어를 통째로 외웠어요. 군대에서 배운 ‘하면 된다’는 극기 정신이 공부에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당시 스스로에게 가장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이 영어이기도 했고요.”


-공부에 대한 열정이 복학 후에도 이어졌나.
“학교에 적응하는 동안은 생각처럼 성적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다들 공부를 해봐서 알겠지만 성적이라는 게 단기간 공부했다고 해서 좋아지지 않잖아요. 공부벌레가 되자고 다짐했어요. 수업이 끝나면 곧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식사 때까지 공부했어요. 그러고는 다시 도서관에 와서 관리인 아저씨가 도서관 불을 끌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아침에는 도서관 문이 열리기 전에 집에서 나와 대기하고 있다가 문이 열리면 바로 제 자리에 가서 공부하는 식이었죠.”


-학교 적응이 쉽지 않았던 건가.
“제가 복학했을 당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을 때였어요. 1980년 3월이었을 거예요. 복학해서 학교에 왔는데 탱크 2대가 교문 앞을 가로막고 있더군요. 학교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어요. 총을 든 군인들이 교문을 막고 학생들의 신분증을 검사했어요. 해가 떨어지면 도서관에서 학생들을 몰아냈죠.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언제 공부실력이 크게 늘었다는 것을 느꼈나.
“1년 반쯤 지나고 성적이 부쩍 올랐어요. 대부분의 과목에서 A+를 받았죠. 당시에는 올 A+를 놓친 것이 아쉬웠는데 학부생 시절 공부를 잘했던 건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사회에 나가보니 저보다 잘난 사람도 많았고 제 또래 사람들뿐 아니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하더라고요.”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매학기 학점을 꽉 채워서 들었던 배병길 동문은 4학년 마지막 학기를 여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그해 11월에는 학과 선배의 소개를 받아 당대 건축계의 대가인 김중업 선생에게 건축 일을 배우게 됐다. 사회인으로서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김중업건축연구소에서 사회인으로서의 스타트를 끊었다.
“을지로 2가에 있는 산업은행 빌딩을 본 적 있어요? 82년도에 김중업 선생님 밑으로 들어가 처음 참여했던 프로젝트에요. 선배들이 옆에서 일을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두려움이 컸어요. 제가 그리고 있는 이 철근 가닥대로 실제로 설계가 되는데 혹시 빌딩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됐죠. 실무 경험이 없었던 때이다 보니 모든 것들이 궁금하고 새로웠어요. 아직 제가 공부해야 할 게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느꼈죠.”


-그래서 1987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건가.
“그렇죠. 현장에서 일을 해보니 건축공부를 더 해야겠더라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UCLA 대학원에 진학했던 게 큰 도움은 안 됐던 것 같아요.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건축을 배우면 얼마나 배우고, 몇 개의 프로젝트나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 스스로의 건축 스타일이 바뀌고 실력이 확 느는 그런 시간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학교 외적으로 배운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책에서 봤던 건물을 방문하여 자신의 눈으로 보는 데서 오는 그 감동이 정말 좋았어요. 전시회도 많이 다니며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차이를 느낄 수 있었죠.”

 

 

   
▲ 배병길 동문의 처녀작인 '국제갤러리'.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처녀작인 ‘국제갤러리’를 설계하게 됐다.
“진짜 우연한 기회로 국제갤러리의 설계를 맡게 됐어요. 종로구 소격동에 위치한 지금의 국제갤러리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화랑이에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다양한 서양화를 전시하는 곳이죠.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공부방 겸 개인 작업실을 구하러 다니던 차였어요. 마음에 드는 작업실을 임대하고 싶어 건물 주인과 만나 이야기를 했는데 제가 건축 일을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됐어요. 그게 인연이 돼서 나중에 건물 주인에게 화랑을 설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당시 배병길건축연구소를 설립한 배경이 궁금하다.
“일 때문에 역으로 건축연구소를 세우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사업을 하려는 생각이 없었거든요. 한국에 오니까 국제갤러리를 설계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사무실을 차리게 된 거죠. 사무실이 있으니까 직원들도 몇 명 있어야 할 것 같았어요.(웃음)”


-첫 작품이었던 만큼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국제갤러리로 한국에 건축가 배병길을 알리겠다는 각오를 했어요. 대학원 공부까지 하며 갈고 닦은 실력을 건축계에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가 가지고 있던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서 무조건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아요. 국제갤러리가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출 때가 되니까 건축 잡지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언론사에서 취재를 요청하더라고요. 사실 그렇게까지 사회에 반향을 일으킬지 몰랐어요.”


-반응이 뜨거웠던 이유는.
“기존 한국에서 고수해왔던 건축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건축을 처음 시도했거든요. 그전까지 한국의 건축은 지구의 중력에 순응하는 기능주의 양식이었어요. 제가 국제갤러리로 그 양식을 깨뜨려버렸죠. 구조물을 비스듬하게 설계하고 간판에 와이어와 사선을 달았어요. 과감한 색상과 유리 재질도 사용했어요. 그 시도를 사회에서는 획기적이라고 받아들인 거예요.”

 


-이외에도 애정을 가진 작품이 있다면.
“대학원 시절 설계했던 ‘요코하마 빌딩’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실제로 지어진 것으로 치면 국제갤러리가 제 처녀작이지만 요코하마 빌딩을 그에 버금가게 소중히 여기고 있어요. 두 작품은 죽을 때까지 생각이 날 것 같아요.”


-요코하마 빌딩은 왜 지어지지 않았나.
“대학원 시절 전 세계 젊은 건축가들이 참가하는 국제 공모전에 공모했던 작품이었어요. 혼자 작업을 했기 때문에 많이 힘이 들었고 후반 작업으로 갈수록 지쳤어요. 누가 조금만 도와줬더라도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건축가로 활동하며 힘든 시절도 있었을 텐데.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특히 가장 어려웠던 건 건축과 저와의 관계설정이에요. ‘나에게 있어 건축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건축가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근본적인 질문이 끊이질 않거든요. 건축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나는 건축을 통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죠. 두 번째는 현실적인 문제인데, 건축을 단순히 집 짓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건축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거였어요.”

 

   
▲ 강원도 횡성 태기산에 위치한 수도원 '묵당'은 배병길 동문이 진행한 자연 속 건축 프로젝트다.

-본인은 건축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셰익스피어는 건축을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표현했어요. 움직이지 않고 정지되어 있는 건축의 성질을 가리켜 얼어붙었다고 말한 거죠. 그러나 건축과 음악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아요. 악보에서 겉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음표에요. 그러나 작곡가들은 음악을 통해 음표가 아닌 이야기를 전달해요. 음표들을 어떻게 나열하고 높낮이와 여백을 조정하느냐에 따라 좋은 음악이 탄생할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는 거죠.”


-건축은 음악과 같다는 말인가.
“상당 부분 유사하죠. 건축가가 어떤 방식으로 공간들을 조합하고 어떤 질감의 재료나 색을 정하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어낼 수도, 아닐 수도 있어요. 건축의 형태나 공간은 오선지와 음표처럼 단순한 매개체에 불과해요. 건축가가 진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대상에 있어요. 마치 종교건축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요.” 

 

 

 


당신에게 중앙대란?

“징검다리와 같은 존재였어요. 배병길이란 소년이 청년으로 가는 징검다리요. 건축이나 제 자신에 대한 의식이 중앙대에서 싹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은 남아요. 공부에 신경을 쏟느라 남들처럼 학부 시절을 재미있게 보내지 못했거든요.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더 자유롭게 사고하고 더 자유롭게 행동하고 싶어요. 대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공부에만 매진했던 게 인생에 있어 너무나 큰 손해는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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