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5년 11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뮤지컬 보러 갈래?’ 선뜻 그러자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고가의 뮤지컬 티켓 한 장이면 요즘 재밌다는 영화 몇 편을 더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학생들은 열었던 지갑을 다시 닫고 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김덕남 동문(연극영화학과 70학번)은 아쉬움을 비친다. 그는 어찌 됐든 뮤지컬은 젊은이들의 고유문화라고 말하며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다른 장르보다 깊은 의미가 담긴 문화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현재 서울시 뮤지컬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나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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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더라….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미안해요, 내가 가끔 이래.” 문득 어딘가를 응시하며 딴생각으로 빠지곤 하는 그는 무척 피곤해 보였다. 연출을 맡고 있는 공연시즌이면 머릿속이 늘 생각으로 꽉 차 도통 잠을 이룰 수 없다 말하는 그. 이런 그의 모습은 생각 많은 몽상가 같기도, 엉뚱한 괴짜 같기도 했다. 인터뷰의 말미에 기자가 내린 결론은 결국 그는 프로의식으로 똘똘 뭉친 이 시대의 진정한 예술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뭐라고 인터뷰를 해…. 하긴, 내가 이 바닥에서 나이가 제일 많기는 해. 나이 많은 연출가라는 점 말고는 내세울 만한 게 없지 뭐….
 

-한국 1세대 뮤지컬 연출가다. 현재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
“내 나이 곧 70살을 바라봐요. 내가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70학번이니까 이 일을 한 지는 벌써 30년 정도가 되어가네. 나이 많은 거 빼고는 지금까지 잘한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뮤지컬계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 아닌가. 지금 여기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 뮤지컬단 단장도 맡고 있다.
“지난해 아주 고맙게도 단장 제의가 들어왔어요. 뮤지컬 연출가로서 아주 영예로운 일이죠. 어떻게 생각해 보면 내가 참 운이 좋은 것 같기도 해요. 프리랜서로서 지금까지 잘 버텨 오고 있는 거 보면….”
 

-이 세계에는 어떻게 발을 들이게 된 건가. 처음에는 배우가 되고 싶었나.
“처음에는 연기로 시작했어요. 60년대 초반은 여성 국극단이 퇴조하고 영화산업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던 시기였는데 당시 부모님에게 이끌려 무대를 처음 접하게 되었어요. 그때 ‘나도 연극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연극을 하려면 연기가 기본이다’라는 생각에 아동극단도 했었고. 연기자로서 연극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보이게 되더라고요.”
 

-아동극단에 대해 설명해 달라.
“우리 시대 때 아동극단이라고 하면 연기자가 반드시 거쳐야 할 정통 루트 같은 것이었어요. 모집광고가 났길래 지원을 했더니 덜컥 붙어서 1년간 그곳에서 연기 공부도 하고 연극도 하고 그랬죠.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집안에서 반대가 너무 심해 못하게 되었지만.(웃음)”
 

-집안 반대가 심했나 보다. 배우는 아무래도 굶어 죽기 딱 좋은 직업이라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때는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하면 모든 집안에서 반대를 하던 시기였잖아요. 워낙 살아남기 힘든 직업이기도 하고요. 굶어 죽기 딱 좋은 직업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좀 무모하고 그래요. 계산에 약하고 이지에 밝지 못하고. 그런 정신이니 지금까지 이 직업을 할 수 있는 거죠. 지금이야 세상이 좋아져서 해보고 싶다고 덤비면 굉장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스타가 되기 쉽지 않은 여건이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모한 사람 많았던 것 같아.”
 

-연기와 뮤지컬 연출은 좀 다르지 않은가.
“뮤지컬은 어찌 보면 연극의 발전 장르잖아요. 뮤지컬의 어머니가 연극이죠. 운동선수가 나중에 코치가 되듯이 배우하다가 연출하게 되는 것이 영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연출은 연기의 철학적 깊이도 보아야 하고 좀 더 포괄적으로 다뤄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두 분야가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제가 하고 있는 일은 결국 많은 경험을 발판 삼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겪어 가는 과정 하나하나 중요한 것 같아요.”
 

-중앙대에 입학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
“사실 입학은 서라벌 예술대로 했었는데 1972년에 중앙대와 합병이 되면서 중앙대 예술대학으로 소속이 변경되었어요. 제가 입학했을 당시에는 연극영화학과가 서라벌 예술대, 중앙대, 동국대, 한양대 네 곳에만 있었죠. 학교에 입학해서는 정규 교과과정 이외에 동아리 활동을 좀 활발하게 한 편이었어요. 방학 때도 쉬지 않고 연극 그룹을 만들었던 것을 보면.”
 

-중앙대 연극영화학과는 알아주지 않나. 추억도 많았겠다.
“영화단체연대회의 이춘현 이사장, 김유진 감독, 유인촌 장관이 저와 젊은 시절을 같이 보낸 선후배에요. 위아래 기수가 똘똘 뭉쳐서 극단을 만들고 라면 끓여 먹으면서 살고 그랬던 게 기억나요. 집단 창작을 하는 우리 학과 특성상 위계 질서가 엄격했죠. 그래서인지 학창 시절 내내 연기에만 집중해서 지냈던 것 같아요.”
 

-졸업을 하고는 현대 극장 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현대 극장은 1976년 가을에 창단했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창작 뮤지컬 ‘빠담빠담’을 선보인 곳이기도 해요. 뮤지컬 활성화의 1등 공신이죠.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연출을 접하게 되었어요.”
 

-연출을 처음 접해보니 어떻던가.
“제가 연기를 전공해서 그런지 연출 분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어요. 이곳에서 무대의 기획·행정·연기를 병행했죠. 그곳에서 주임처럼 있다 보니 스텝관리도 하게 됐고 연출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고요. 연출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나 할까.”
 
 
“극단이라는 것이 한 가지 일만 할 수 없지. 나도 다 해봤거든. 청소는 기본이었고, 음향 오퍼레이터도 해보고 조명 핀도 잡아보았지. 그러면서 연기도 계속하고. 무대에 관련된 일이라면 안 해본 일이 없는 것 같아. 기획을 계속해서 맡다 보니 연기는 이제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한 작품이 완성되어 무대에 올려지는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거든. 연기에서는 자연스레 손을 놓게 되었지만, 아직도 무대에 대한 갈망은 계속 있어.”
 
 
-아직도 연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나.
“연출을 하다 보면 특정 배역을 이야기할 때 ‘왜 저렇게밖에 연기가 안 될까?’ 하는 마음이 있어요. ‘내가 하면 저렇게 안 할 텐데….’ 라는 마음이 들죠. 그런데 막상 그 배역을 제가 한다고 하면 그게 어디 쉽겠어요?(웃음)”
 

-하게 된다면 어떤 역할을 맡고 싶나.
“다하고 싶어요. 어떤 역할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쉽지 않겠죠. 꾸준히 하지 않으면 연기는 어려운 거거든요.”
 

-연출하셨던 작품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면 가장 힘들게 했던 작품 <장보고, 열리는 바다>를 꼽고 싶어요. 세계 24개국, 30개가 넘는 도시에서 공연했었거든요. 아무래도 없는 자본에 큰 규모의 공연을 하려니 힘들었던 기억이 있네요. 제가 만든 모든 작품에 애정이 가는 법이지만 아무래도 창작 뮤지컬에 관심이 더 가긴 해요.”
 
 
   
 
-창작 뮤지컬과 라이선스 뮤지컬의 차이점을 알려 달라.
“창작 뮤지컬은 순수하게 이야기의 처음부터 만들어져 무대에 올라가는 것인 반면, 라이선스 뮤지컬은 이미 외국에서 만들어진 뮤지컬을 수입해서 그대로 재현하는 공연이에요. 라이선스 뮤지컬은 나의 의지로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들잖아요. 한국 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이더라도 외국 제작자가 만든 것을 따라야 하니 거부감이 좀 들더라고요. 창작 뮤지컬에는 내 생각이 들어갈 수 있으니까 연출할 때 힘이 무척 들지만 그만큼 애정도 가요.”
 

-기자도 뮤지컬 리허설에 참가해본 적이 있다. 당시 리허설 분위기가 험악해서 놀랐다.
“리허설은 공연 시작 전에 ‘이렇게 하자’고 약속한 내용을 극장에서 조립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뮤지컬은 약속 예술인데 서로 맺은 약속이 리허설 때 잘 지켜지지 않으면 분위기가 험악하게 흐를 수밖에 없어요. 단원들과 호흡이 맞지 않으면 화도 나고요. 사람과의 소통이 제일 힘든 것 같아요. 제가 진두지휘하면서도 가끔 단원들을 달래주기도 해야 하니까. 예전에는 날아 다니는 것이 욕이었는데.(웃음) 그래도 지금은 상황이 많이 유해졌죠.”
 

-약속 예술이라니. 멋진 말 같다.
“뮤지컬은 7,80명의 스텝과 배우들이 함께 만드는 예술작품이에요.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쇼 윈도우에서 디스플레이 하는 과정과 비슷하죠. 리허설을 통해 충분한 연습시간을 가지면 좋겠지만 항상 연습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결국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가 한 약속을 잘 지켜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야 뮤지컬이 원활하게 진행되니까요.”
 

-일이 없을 때는 주로 무엇을 하며 지내나.
“아무 생각도 안 해요.(웃음) 공연에 임박하면 화장실에 가도, 물을 먹어도 공연 생각이 자꾸 나거든요. 리허설 때 풀리지 않은 장면이 자꾸 맴돌아요. 그래서 일이 없을 때는 최대한 머리를 비워 두려고 하는 편이에요.”
 
 
“술집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여기 땅이 어떻고, 저기 건물이 어떻고 하잖아. 나는 도통 그런 것에 관심이 안가. 내가 남들처럼 골프를 치기를 해, 테니스를 치기를 해. 의자에 엉덩이만 붙였다 하면 일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한다고. 배우의 연기가 어떻고, 조명이 어떻고…. 한번은 내가 허리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들렀거든. 병원 문을 딱, 열었는데 대기하는 손님들이 너무 많은 거야. 그래서 그대로 문을 닫고 연습하러 가버렸어. 현장에 내가 없으면 큰일 날 것 같았거든. 이런 내 성격 때문에 지금까지 운 좋게 연출가로 잘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
 
 
-책임감이 남다른 스타일인 것 같다.
“아니, 그렇게까지 말하면 쑥스럽고. 성격적으로 꼼꼼하고 그런 게 좀 있죠.”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고 가족들의 걱정은 없었나.
“저 결혼 안 했어요.(웃음) 30대 중반쯤 되었을 적에 애 둘을 엄마, 아버지가 들쳐 업고 가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나는 저런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연극배우는 가난한 직업이에요. 연출자도 마찬가지고.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가족에 대한 부양의 책임, 정신의 분산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50대에 현대극단 일을 그만두고도 간간히 살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독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좋은 뮤지컬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뮤지컬의 절대적 가치는 이야기와 연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성만 강조되는 오페라와는 달라요. 흔히 뮤지컬에는 꼭 노래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무대에서 연극성을 강조하고 노래와 춤은 꼭 필요한 때에 넣는 편이에요. 뮤지컬에는 지정된 공식이 없는데 화려한 춤과 노래가 들어가야만 뮤지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거죠.”
 

-연출가에게 필요한 재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꾸며낼 줄 아는 능력, 사물을 보는 미학. 이 두 가지요. 무대를 보고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이죠. 작품에는 정답이 없어서 무대를 본 100명의 관객이 똑같은 느낌을 받을 수는 없어요. 그래도 그중 7,80명은 작품을 보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 재주가 연출가에게 꼭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현재 진행 중인 공연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이번 <서울 1983>은 이산가족의 눈물이 담긴 우리 아버지 세대 이야기에요. 배우 박인환씨와 나문희씨가 주연을 맡았죠. 70세를 바라보시는 분들임에도 무대에서 열연을 해주고 계세요. 얼마 전에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는데 공연과 시기가 잘 맞물려 좋았어요.”
 

-요즘 뮤지컬에는 예쁘고 젊은 배우들만 많이 나오는 것 같다.
“사실 <서울 1983>은 다양한 연령층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하게 되었어요. 요즘은 주로 젊고 예쁜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오는 작품을 보려 하는 것 같아서요.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이 흥행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었기 때문이지 예쁜 배우를 써서가 아니었거든요.”
 
 
“개그 콘서트를 보는 방청객과 뮤지컬을 보는 관객은 엄연히 다른 거예요. 개그콘서트를 보는 방청객은 음악만 나오면 ‘쿵짝’ 박수치잖아요. 그러나 뮤지컬에서는 음악만 나온다고 ‘쿵짝’ 하면 안 돼요. 명장면이 끝났을 때 박수치는 것은 허용될지 몰라도. 잘 모르고 노래만 나오면 반응하는 관객이 아닌, 진짜가 무엇인지, 좋은 장면이 무엇인지를 구분할 줄 아는 관객. 그런 관객이 뮤지컬을 잘 즐기는 관객이라고 생각해요. 뮤지컬을 보는 관객과 개그콘서트를 보는 관객은 달라야 하지 않나요. 제가 좀 고루하죠? 필요 이상으로 보수적인 것 같기도 하고.(웃음)”
 
 
-최근 머리를 가득 메운 고민은.
“뮤지컬을 잘 만든다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이거다’해서 만든 작품이 큰 박수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서…. 점점 더 정답을 찾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어떤 게 진짜 좋은 작품인지 모르겠어요. 앞으로 내가 더 해도 되나 싶기도 하고….(웃음)”
 
 
-당신에게 중앙대란?
“중앙대는 나의 뇌를 열어준 곳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천방지축 어린 아이가 연기와 뮤지컬에 대해 본격적으로 눈을 뜰 수 있었던 데에는 중앙대의 공이 컸죠. 직업 특성상 졸업증명서를 뗄 일이 없었는데 얼마 전 졸업증명서를 떼러 학교에 갔었어요. ‘이 나이에 졸업증명서 떼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서 오랜만에 찾은 학교가 참 반갑더군요. 학교가 지금보다 발전했으면 참 좋겠는데….”
 
 
 
뮤지컬 <서울 1983>
   
 

지난달 금강산 면회소에서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습니다.이제 보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마음에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는데요. 이런 이산의 아픔이 뮤지컬이 되어 관객을 맞습니다. 김태수의 악극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서울 1983>은 1983년 국민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KBS 생방송 프로그램 ‘이산가족 찾기’를 모티브로 제작되었습니다. 부부의 연은 맺은 지 6개월 만에 훈련을 다녀오겠다며 떠난 남편. 그 후 생사도 모른 채 살다 65년 만에 백발이 되어 마주 앉은 노부부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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