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경영85) 동문이 주연을 맡은 영화 '커튼콜'이 12월 8일(목) 개봉했다.
코미디 장르의 '커튼콜'에서 박철민 동문은 '감독 철구'역을 맡았다.
[커튼콜 줄거리]
경제적인 불황으로 문닫기 일보 직전의 위기에 놓인 삼류 에로 극단 ‘민기’의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연출자 ‘민기’(장현성)는 늘 꿈에 그리던 연극 [햄릿]을 무대에 올리기로 결심,
프로듀서인 ‘철구’(박철민)를 설득한다.
우여곡절 끝에 연극 무대의 막이 오르고, 예기치 않은 실수와 애드립이 난무하는 가운데 무대의 열기는 점점 끓어 오르는데!
과연 삼류 에로 극단이 도전한 [햄릿]은 무사히 커튼콜을 올릴 수 있을까?
[본 인터뷰는 2013년 12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데뷔한 지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연극무대를 그리워하는 배우가 있다. 다양한 작품을 통해 대중배우로 거듭났음에도 연극배우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그는 바로 배우 박철민 동문이다. 지금은 감초역할, 명품조연으로 통하는 배우지만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15년의 배고픈 무명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열정 하나로 버텨 온 그는 브라운관, 스크린 그리고 연극무대까지 넘나드는 명품배우가 됐다. 박철민 동문의 연기인생을 들여다봤다.
10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하며 ‘다작의 제왕’으로 불리는 박철민 동문. 최근엔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 <열한시>가 개봉했고 내년 개봉예정인 영화 <해적>의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쉴 틈 없는 스케줄 속에서도 그는 재치 있는 입담과 특유의 친근함으로 중대신문을 맞이했다.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의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던 대학로에서 박철민 동문을 만났다.
-요즘은 뭐하고 지내나.
“영화 <열한시>의 시사회와 무대인사를 다니고 있다. 평소엔 기본적으로 매일 연극을 연습하고 있는데 스케줄에 따라 드라마나 영화까지 작업 중이어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체력적인 부담은 없나.
“2005년도에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출연했을 때까지만 해도 몸을 너무 혹사시켰다. 촬영이 끝나면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술자리가 좋아 술을 계속 마신 거다. 그러다 보니 체력적으로 무리가 오더라. 지금은 요가도 하고 야구도 하면서 열심히 체력관리를 하고 있다.”
-얼마 전 TV프로그램 <1대100>에도 출연했는데.
“11단계 중에 6단계까지 진출했다. 그 정도면 중앙대 출신으로서 나름 학교를 빛냈다고 생각한다.(웃음)”
쉴 틈 없는 일정은 배우이자 연예인으로서의 그의 입지를 증명하는 듯했다. 박철민 동문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해졌다. 특히 연극배우였던 형의 존재는 그의 연기인생을 시작하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한다.
-형이 연극배우였다고 들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연극배우이자 KBS성우였던 형의 영향을 받으면서 연기자로서의 꿈을 키워왔다.”
-영향을 받았다니.
“학창시절 형이 나를 관객으로 앉혀놓고 자기가 준비한 모노드라마 연기를 연습하곤 했다. 몸짓과 대사로 누군가를 표현하고 관객에게 희로애락을 전달하려는 형의 모습을 보면서 연기에 대한 열정이 어렸을 적부터 내 안에 싹 터왔다.”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하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
“고등학교 때 연극동아리를 하면서다. 동시에 다니던 교회에서 직접 성극을 연출하면서 연극활동을 했다. 나서는 걸 좋아하는 성격에 교회성극을 연출해보기도 하고, 직접 무대에 올라와서 연기도 하고, 늘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활동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잘하든 못하든 내재된 끼를 분출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것 같다.”
-그런데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처음엔 무조건 중앙대 연극영화학부에 가고 싶었다. 형은 서울예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집안에 ‘딴따라’를 두 명이나 둘 수는 없다는 이유로 부모님의 반대가 굉장히 심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의 뜻에 따라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꿈은 포기할 수 없었을 텐데.
“당시에도 중앙대에 연극동아리가 많았다. 그중 나는 ‘중앙극회’와 ‘영죽무대’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늘 연극 준비를 하느라 전공공부는 뒷전이었다. 남들이 강의실을 가면 나는 동아리실에서 살았다. 그렇게 1학년 때부터 2학년 때까지 5편 가량의 연극무대에 섰다.”
-학점은 당연히 낮았겠다.
“최악이었던 학기의 학점은 0.76점이었다. 거의 모든 과목이 F학점이었고 학기당 한 과목 정도 D학점을 받는 수준이었다.(웃음) 그래도 아버지께 효도하려고 입학한 대학인데 졸업장은 받아야겠다고 생각해서 1년을 더 다니고 겨우 졸업했다.”
▲대학로 무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박철민 동문.
대학시절 내내 연극에 미쳐있던 박철민 동문에게 경영학보다는 동아리에서 배운 연기가 대학시절 전공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학시절에서 연극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총학생회장직 당선과 수행을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총학생회장도 했다던데.
“당시 총학생회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단과대 학생회장들 중에서 직무대행을 지낼 총학생회장을 뽑자는 학내여론이 생겼다. 단과대 중 사회대의 학생회장 직을 맡고 있던 내가 다른 후보들과 경선을 벌인 뒤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됐다.”
-학생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겠다.
“단과대 중에서 제일 인원수가 많은 사회대 학생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며 5편의 연극무대에 서는 동안 학내에 여기저기 얼굴을 많이 알린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의 화려한 언변, 명석한 두뇌, 그리고 학생들의 신뢰가 당선되기까지의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다.(웃음)”
-이미지가 좋았나 보다.
“검증된 바는 없지만 그냥 웃긴 놈, 미친 놈, 이상한 놈 같은 이미지가 강했던 것 같다. 아마 많은 학생들이 무대에서 만큼이나 학교주변 술집에서도 나를 많이 봤을 것이다. 그때 내 이미지는 술을 재밌게 잘 마시기로 유명한 학생이었다.(웃음)”
-학생운동을 주도했다고.
“당시 재단비리 등의 학내문제로 학교가 시끄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와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해나가는 데 학생자치단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대학생인 젊은이로서 외쳐야 할 것을 외치면서 학생들의 생각과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했다.”
-기억에 남는 시위가 있다면.
“재단비리 문제로 인한 시위에 약 8,000명의 학생들을 모은 적이 있었다. 당시 서울캠 정문 앞에 잔디밭이 있었는데 그곳에 서울캠에서 5,000명, 안성캠에서 3,000명이 모였다. 많은 인원이 열렬히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했던 것이 가장 기억이 남는다.”
-당시엔 학생들의 힘이 센 편이었나.
“우선 학생들 사이에서 학생자치단체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컸다. 그런 신뢰 때문에 총학생회와 학생들이 학내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학교가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아 총학생회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내지 말자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적이 있었다. 당시 전체 인원의 30~40% 정도의 재학생들이 등록금을 내지 않아 학교가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재단에서도 학생들의 반응에 놀라 우리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했다.”
-학교의 경계대상 1호였겠다.
“학교에서 나를 겁냈는지 본부가 총학생회에 명령을 내릴 수 없던 건 확실했다. 오히려 학교가 우리의 요구를 잘 들어준 걸 봐선 당시엔 학생과 학교가 대등한 관계였다.”
-스스로를 ‘날라리 운동권’이라 부를 만큼 학교생활도 기괴했다.
“친구들과 안성연못에 있는 물고기를 잡아먹곤 했다. 물고기도 물고기지만 친구들이랑 비둘기를 잡아먹었던 기억도 난다.”
-비둘기를 어떻게 먹었나.
“예술대 친구들과 비둘기를 많이 잡아먹었다. 안성캠의 민중광장에 가보면 비둘기 집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친구 한 명이 비둘기를 잡아오는 거다. 그러면 조소과 친구들이 찰흙을 들고 나타나, 비둘기에 흙을 바르고 난로에 넣어 바로 구워버린다. 몇 백 도에 구워진 찰흙 안에 있는 비둘기만 꺼내서 내장을 긁어내고 소금에 찍어 먹었다.(웃음)”
파란만장한 대학생활 끝에 그는 1988년 ‘현장’이란 노동운동 극단에 입단하게 된다. 노동자, 서민 등의 소외계층들의 삶을 그려내는 연극에서의 출연을 시작으로 그는 드디어 전문적인 연기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극단엔 어떻게 들어갔나.
“대학시절 ‘현장’이란 극단의 연기자들이 학교에 방문해 마당극을 선보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연극들이 너무 재밌고 신나보였다. 그러던 와중에 극단의 관계자들이 내가 공연한 연극을 관람했는데 그걸 보고 나에게 입단을 제의한 거다. 돈은 못 주지만 밥이랑 술은 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입단을 결정했다.(웃음)”
-극단을 옮기기도 했나.
“한 극단에서만 활동하다보니 연기자로서 너무 한정된 주제의 공연들만 하게 되더라. 노동파업 같은 주제 말고도 사랑이야기나 단순한 코미디가 너무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극단을 여러 군데 옮기기도 했다.”
-배고픈 시절이었을 것 같다.
“대부분의 연극배우들이 그랬듯이 극단시절 한 달에 겨우 2,30만원을 벌면서 지냈지만 이때가 반찬 없이 라면만 먹어도 배부르던 시절이었다. 언제나 동경하는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배불렀다. 그러나 아이들이 태어난 후 부터는 좋아하는 일만 할 순 없게 되더라. 결국 과일도 팔고 생선도 팔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고난과 역경으로 얼룩졌던 극단시절 속에서도 그는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비록 단역이지만 그의 존재감만은 주연 못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04년 영화 <목포는 항구다>라는 작품과 2005년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출연은 대중에게 ‘박철민’이란 이름을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다.
-<목포는 항구다>가 본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작품에서 맡았던 배역을 통해 대중들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역할을 기억해주는 관객이 많다. 오버하고 넉살떠는 캐릭터를 좋아해준 게 아닌가 싶다.”
-드라마 <뉴하트>도 인기몰이에 한 몫을 했다.
“그때 ‘뒤질랜드’라는 유행어가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 그 드라마는 배우 박철민의 이미지를 완전히 각인시켰던 파급력 넘치는 작품이었다.”
-뒤질랜드는 애드리브인가.
“원래 대본에 있었던 대사였다. 내가 알기로 원래 뉴하트 작가 아들이 시종일관 ‘뒤질랜드’ 거려서 작가가 그걸 대본에 차용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촬영할 때 내가 쓰니까 주변 연기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공중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욕의 적절한 대체어가 뒤질랜드였다. 화낼 때, 기쁠 때, 심심할 때 아무 때나 쓰다보니까 유행어가 된 것 같다.(웃음)”
-애드리브가 많은 편인데.
“연극을 하면 관객을 재밌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러나 간혹 애드리브를 치면 당황하는 배우들이 있어 상황에 따라 자제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 연극의 경우엔, 극이 짜임새 있고 정형화 된 연극이라 애드리브를 아끼고 있다.”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역할이 있다면.
“‘절대 악역’을 꼭 해보고 싶다. 자신은 있는데 아직까지 기회는 없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 최민식 선배가 맡았던 연쇄살인마와 같은 절대 악역이 꼭 연기해보고 싶었던 배역이다.”
-본인의 작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역할은.
“개봉을 앞두고 있는 <또 하나의 가족>이란 영화 속 ‘상구’ 역이다. 지금까지 맡았던 감초역할과는 달리 백혈병에 걸려 죽은 딸의 비밀을 파헤치는 택시기사 아버지 역할을 맡아 정말 열심히 촬영에 임했다. 영화가 잘됐으면 좋겠다.(웃음)”
-대중에게 어떤 배우로 각인되고 싶나.
“희로애락을 전달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관객들이 내 연기를 보면서 슬픔도 느끼고 분노도 느끼면서 다양한 감정을 느꼈으면 한다. 관객들에게 여러 가지의 감정을 전하면서 엔돌핀을 선사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중앙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밥을 굶어도 배고픔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빠져드는 꿈을 찾았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걸 오래하고 싶으면 그걸 잘해야 한다. 잘하고 싶으면 뜨거운 노력과 눈물이 수반돼야 한다. 특히 중앙대 후배들에겐 청춘의 뜨거움을 보여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 개인의 뜨거움도 좋지만 사회를 위한 뜨거운 생각도 했으면 한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옛 연인 같은 존재다. 한때 중앙대를 정말로 사랑했다. 대학시절 학교 갈 생각을 하면 설레기까지 했다. 지금은 학교를 떠난 지 너무 오래 돼서 그 애정이 무뎌진 감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옛 연인을 보면 그때의 추억들이 떠오르듯이 중앙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때 추억들에 기분이 아련해진다.”
연기만 할 수 있다면 어디든 달려간다
많은 사람들의 취미로 사랑받고 있는 영화, 연극 그리고 드라마. 대중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만큼 짜임새 있는 스토리의 작품도 늘어나고 있다. 서로 무엇이 다를까 싶지만 각각이 가지고 있는 매력은 사실 매우 다르다. 비슷한 듯 보이지만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연극과 영화 그리고 드라마의 특징은 무엇일까.
드라마는 TV를 통해 방영되는 만큼, 그 파급력이 엄청나다. 시청률이 10%만 되어도 400만 명이 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대개의 드라마가 적게는 일주일에 1편, 많게는 5편이 방영되기 때문에 짧은 시간동안에 많은 분량을 소화해야하는 점이 어렵다. 그러다보면 자칫 만족감 없이 연기를 하는 경우도 발생될 수 있다. 그만큼 순발력 또한 굉장히 요구되는 장르가 바로 드라마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떨까. 영화 역시 파급력이 큰 장르다. 비록 드라마보다는 적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찍는다는 점에선 디테일한 부분과 완성도가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앞서 설명한 영화와 드라마가 영상으로 관객에게 보여진다면 연극은 ‘생동감’이다. 매일 다른 관객들 앞에서 그들과 직접 소통하는 것이 바로 연극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파급력은 영화와 드라마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관객과 배우가 함께 울고 웃으며 소통하는 장르로서 연극은 아직까지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