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4년 6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소통을 통해 분석을 하고 동행을 통해 투자를 한다. 박영옥 동문만의 기업투자 철학이다. 수치로만 기업을 단정 짓지 않고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과 사회적 책임 준수 여부를 따져가며 투자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투자의 근간이 된다. 일명 개미라 불리는 개인투자자들 사이에서도 1,000억 원대 지분을 보유한 ‘슈퍼개미’ 박영옥(경영82) 동문을 만나봤다.
금융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찾고
기회를 발견하다
10년 만에 1,000억 원대
지분 보유한
주식농부로 거듭나다
기업에 대한 믿음을 거름으로
수익을 창출하다
증권분석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후 국내 30여 개 기업의 대주주로 자리매김한 전업투자자가 있다. 그들의 세상에서 개인투자자는 일명 개미라 불린다. 전국의 개미 중에서도 ‘슈퍼개미’라 불리는 박영옥 동문. 그가 1,000억 원이 넘는 지분을 보유하기까지는 기업에 대한 신뢰와 주인의식이 바탕이 됐다. 여의도 <스마트인컴> 사무실에서 박영옥 동문의 투자 철학을 들어봤다.
-전업투자자라는 직업이 조금은 생소한데.
“전업투자자는 개인의 자산을 기업체 등에 직접 투자해 기업의 성과를 공유하는 직업이다. 2001년 9·11 테러를 기점으로 전업투자자로서 독립했으니 올해로 13년째다. 자본시장에 입문한 지는 25년이 됐다. 지금은 30여 개 기업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개미다.(웃음)”
-1,000억 원대 지분을 보유한 것으로 유명한데, 비결이 있다면.
“회사생활을 했을 때부터 1,000억 원의 개인 지분을 보유하는 게 목표였다. 기업과 동행하며 시간을 두고 그 기업을 분석하고 투자하는 것이 나만의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기업을 단순한 투자 대상이 아닌 삶의 터전으로 간주하고 투자하는 것을 내 임무로 삼았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전업투자자로서 최근 행보가 궁금하다.
“주식농부로서의 내 생각과 철학을 일반 사람들에게도 공유하고 있다. 강연과 저술활동을 통해 기업의 성과를 함께 공유하면서 살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중이다. <올(ALL)바른 투자문화연구소>를 통해서 건전한 투자문화를 확산시켜 자본시장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모두가 행복한 투자자로 풍요로운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자본시장 바로 알리기에 힘쓸 계획이다.”
-‘주식농부’라는 별명에 의미가 있나.
“농부가 날씨와 관계없이 농사를 짓듯 나도 경기의 호불호와 관계없이 국내 기업에 투자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농부의 마음이라는 뜻의 농심(農心)은 장기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는 나의 신념과도 맞닿아 있다.”
-농부와 같은 자세를 주식시장에서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면.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농부들의 자세는 투자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농부가 헛된 기대 없이 자신이 지은 농사에 만족하듯 투자자도 주인의식을 갖고 자신의 투자 결과에 만족해야 한다. 현재 증권시장에는 잘못된 기대와 상식을 가지고 있는 투자자들이 많다. 단순히 돈을 벌 생각으로 투자 한다면 지속적인 성공은 기대하기 힘들다.”
-농부의 자세에 감명받은 계기가 있나.
“어려서부터 시골에서 어렵게 자라며 농사를 지어봤다. 농부들이 땀 흘린 노력의 대가가 수확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실을 맺을 때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도 느껴봤기에 모든 일에 진정어린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농부의 마음을 강조하게 됐다.”
-어렸을 적 가정형편은 어땠나.
“전북 장수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탓에 가장으로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정도로 집안 사정이 좋지 못했지만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께서 중학교 등록금을 납부해주고 후원자가 돼주셨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장남이 편하게 공부만 할 수 없어 중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로 상경해 공장에 취직했다.”
어렸을 적 농사를 지으며 농부들의 정직한 마음을 옆에서 지켜본 박영옥 동문은 농부의 마음으로 주식투자라는 밭을 갈고 있었다. 시골에서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그는 중학교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해 주경야독 하며 주식 투자자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중학교 졸업 후 바로 생계 전선에 뛰어든 건가.
“상경하고 처음 입사한 직장이 하루에 12~15시간씩 근무하며 한 달에 두 번밖에 쉬지 못하는 섬유가공 공장이었다.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있었을 때 우연히 방송통신고등학교 모집 요강을 접했다. 그렇게 공장생활 3년 차에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하며 낮에는 생활비를 벌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생활을 이어나갔다.”
-어린 나이에 학업과 공장생활을 병행했다는 것인데.
“방송통신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공부를 더 적극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3년 7개월 동안 다니던 공장을 그만뒀다. 이후에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오전 8시부터 오후 1시까지 신문을 팔고 오후 3시부터 오후 10시까지는 학원에서 지도원(조교)으로 공부하며 입시를 준비했다.”
-어린 나이에 고된 생활을 경험했다.
“하루는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 반대 방향 버스를 탄 다음에 정신을 잃은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시계도 없어진 채 낯선 여관에 누워 있더라. 지금 생각해 보면 영양실조에 걸렸던 것 같다. 정신력 하나로 버틸 수 있었던 시기였다.”
-힘든 입시생활 끝에 중앙대 경영학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운이 좋았다. 당시 특수장학생 중 하나였던 승당장학생으로 입학해서 4년간 등록금 전액과 매달 10만 원을 지원받았다. 그중 3만 원은 집으로 송금하고 나머지 금액으로 생활했다. 12시간씩 공장에서 일할 때도 월급이 12만 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훌륭한 지원이었던 셈이다. 당시 10만 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40만 원 이상일 거다. 그 일을 계기로 사회에 고마움을 느꼈고 사회에 환원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남들보다 먼저 체험한 사회생활 경험이 대학생활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 같은데.
“터미널에서 신문을 파는 등 사회를 먼저 체험하고 대학에 입학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동기들과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다른 학생들이 낭만적인 생활을 할 때 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곤 했다.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빨리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낭만적인 대학생활과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 시절을 남들처럼 보내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다.”
-치열한 대학생활 속에서 노리던 꿈은 무엇이었는가.
“처음에는 공인회계사 공부를 했는데 두 번이나 낙방했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때 경영학과 장경천 교수님의 권유로 우연히 증권분석사 시험을 치렀다. 준비 기간은 짧았지만 운 좋게 합격하면서 증권시장과 첫 인연을 맺게 됐다.”
낮에는 생활비를 벌고 밤에는 대학 입시 준비를 하며 오로지 정신력으로 힘든 시기를 버텨낸 박영옥 동문은 중앙대 경영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발 들여놓은 증권시장은 그의 인생에 위기이자 기회로 다가왔다.
-증권분석사 합격이 바로 취업으로 이어졌나.
“자격증을 취득한 덕분에 학부 4학년 때부터 현대투자연구소 연구원으로 발탁돼 아르바이트 겸 직장생활을 했다. 당시 현대투자연구소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유료 주식정보지를 발간했다. 선임연구원으로서 전국을 돌며 투자설명회를 개최하거나 주간기자생활을 하며 자본시장에 대한 기본적인 공부를 했다.”
-현대투자연구소를 시작으로 증권시장에서 일 하게 된 건가.
“현대투자연구소 생활 도중 사람들에게 강연을 하면서 자본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본시장을 직접 경험해 보기 위해 대신증권에 입사했다. 학부 졸업 후 4년간 대신증권에서 증권영업을 하다 국제투자자문으로 거처를 옮겨 펀드매니저로 활동했다. 1997년에는 교보증권 압구정지점장을 지냈는데 그때 마침 IMF 외환위기를 직면했다.”
-증권업계의 위기였을 텐데.
“지점장을 지내면서 외환위기를 겪고 주가가 크게 떨어져 고객들의 손실을 떠안아야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1,000포인트였던 것이 300포인트까지 빠지니 지점장으로서 책임을 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어머니께 사드렸던 집을 팔아 깡통계좌를 메워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의 위기를 통해 주식 투자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투자법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위기가 기회로 다가온 건가.
“주식투자는 단순하게 사고팔며 차익을 챙기는 행위가 아니라 투자해서 성과를 공유하는 과정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외환위기 때의 혹독한 경험이 없었다면 오늘의 주식농부는 없었을 거다. 외환위기 때 폭락했던 주식들이 다시 회복하고 주가가 2,3배씩 올라가는 것을 보며 장기투자의 중요성을 느꼈다.”
-회사에서는 그런 신념을 실현하기 힘들었을 텐데.
“단기적 매매에 치중하는 증권사에서는 내 투자 철학을 실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프리랜서로의 독립을 결심했고 이후 2000년부터 삼성증권에서 투자전문위원으로 생활했다. 2001년 9·11테러라는 증권가의 위기를 다시 한 번 경험하며 전업투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동행했던 기업들의 가치를 알면서도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증권을 되팔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지향하는 투자가 아니었다. 주식투자에 답이 있다면 건전한 기업에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원과 전업투자자로서의 생활이 많이 달랐을 것 같다.
“전업투자자는 자신의 투자 하나하나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자유로워 보이겠지만 오히려 더 절제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쉽지 않다. 누군가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다.”
외환위기, 9·11테러 등 굵직한 금융위기를 모두 겪어낸 그는 투자 가치가 있는 기업을 찾아 오랫동안 장기투자하는 그만의 철학을 굳혀나갔다. 회사원보다 전업투자자로서 그의 행보가 더 주목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전업투자자로서 가장 중요시하는 게 있다면.
“지속적으로 기업에 대해 연구를 하며 그들과 소통하려 노력했다. 동행하면서 소통하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기업체의 목표에 공감해야 믿고 기다릴 수 있다. 그래서 투자한 기업에도 믿음과 신뢰를 갖고 어려운 시기마다 더 투자해 주려 노력했다.”
-금융위기에도 그들의 손을 놓지 않은 건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기가 어려워지면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이는 단기부동자금이나 부동산과 같은 실물자산에 투자한다. 하지만 나는 평소 믿고 있던 기업에 투자 했고 그 결과 기업들의 성과를 공유하며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
-믿을 수 있는 기업을 찾는 과정이 궁금하다.
“농부가 좋은 씨앗을 고를 때 최선을 다하듯 투자자가 기업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업을 하는지, 기업의 재무 상태와 지배구조는 건전한지, 건전한 CEO가 있는지, 사회적 책임 준수 여부를 따진 후에 투자를 결정한다.”
-장기투자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데.
“기업은 하루아침에 성과를 내지 못한다. 적어도 4,5년 정도의 시간이 있어야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낼 수 있다. 기업투자는 단순히 유가증권을 사고파는 행위가 아니라 기업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의무와 권리를 누리기 위해선 주인의식을 갖고 시간에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그 성과를 공유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2006년에는 <스마트인컴>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투자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데 도움을 받고 있다. 자체적인 투자업과 함께 경영컨설팅을 해주고 있다. <올바른 투자문화연구소>에서는 올바른 투자문화를 확산시키는데도 일조하고 있다.”
-책과 사회활동 등을 통해 말하고 싶은 바가 있는가.
“많은 투자자들이 안타깝게도 기업 성장의 과실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내 경험과 투자 철학을 같이 나누고 성과도 공유하고 싶었다. 의술의 발달로 우리 인생이 길어졌지만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면 행복한 노후를 보내기 어렵다. 노후에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려면 기업의 성과를 증권시장을 통해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15년 전에는 샐러리맨이었지만 지금은 30여 개 기업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 나와 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싶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더 넓고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해준 창과 같다. 중앙대에 승당장학생으로 입학하고 증권분석사 시험에 합격한 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을 만큼 중요한 경험이었다. 장학생으로서 생활비까지 지원받던 경험을 통해 사회에 고마움을 느끼게 됐다. 그때의 경험이 있어 사회에 도움이 되려는 지금의 나도 있다.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교훈처럼 참된 인격체로 살 수 있게 도와준 중앙대에 지금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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