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5년 9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1990년대는 한국 농구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한기범 선수는 이 시기 최고의 주가를 올리며 국민들의 각광을 한 몸에 받는 인기스타였다. 그는 1996~1997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농구코트를 떠났다. 은퇴 후 서울 구로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지낸 그는 한동안 몸과 마음 모두 힘든 시기를 보냈다. 선천성 질환인 마르판 증후군을 겪으며 2000년과 2008년 두 차례의 심장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남동생을 빼앗아간 지독한 병이었다. 사업실패까지 겹쳐 인생의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그는 현재 농구를 통해 불우한 학생들에게 희망을 전파하고 있다.
골밑 몸싸움을 자처하던
농구계의 대들보,
희망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큰 키만큼 넉넉한 마음씨로
불우한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다
서울시 중구 장춘단로에 위치한 작은 사무실. 길게 길러 뒤로 넘긴 머리와 콧수염은 왕년의 농구스타 한기범의 지난 세월의 관록을 느끼게끔 했다. 160cm 작은 신장의 기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그를 서둘러 자리에 앉힌 기자는, 부랴부랴 그의 최근 근황에 대해 물었다. 농구 코트를 누비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키다리 아저씨. 그는 이제 희망덩크로 화려했던 과거 전성기에 대적할 만한 인생 슛을 기약하고 있었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 사무실이 장춘동에 있는지는 몰랐는데.
“장춘동에 사무실을 차린 지는 꽤 됐어요. 선수로 활동할 당시, 재활을 담당해 주던 친구들과 함께 아내 몰래 차린 사무실이죠.(웃음) 2011년도에 설립한 희망 나눔 재단 관련 업무는 전부 여기서 보고 있고요. 2m가 넘는 제가 앉아 있기에 이곳은 너무 작고 비좁네요. 하고 있는 일이 잘되어 사무실의 규모를 키웠으면 참 좋겠는데.”
“장춘동에 사무실을 차린 지는 꽤 됐어요. 선수로 활동할 당시, 재활을 담당해 주던 친구들과 함께 아내 몰래 차린 사무실이죠.(웃음) 2011년도에 설립한 희망 나눔 재단 관련 업무는 전부 여기서 보고 있고요. 2m가 넘는 제가 앉아 있기에 이곳은 너무 작고 비좁네요. 하고 있는 일이 잘되어 사무실의 규모를 키웠으면 참 좋겠는데.”
-얼마 전 진행된 여름 농구캠프도 여기서 주관한 행사라던데.
“150명의 학생들이 2박 3일 동안 값진 시간을 보내고 갔죠. 농구, 승마, 골프 등의 스포츠 활동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배우게 하기 위한 취지로 기획한 행사에요. 다행히 학생들이 캠프의 취지를 잘 이해해 준 것 같아요. 근데 사실 이것 말고도 희망나눔 재단에서는 하고 있는 일이 훨씬 더 많은데.”
-주로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시나요. 방송에서도 통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고.
“요즘은 자선경기를 통해 기부금을 모으기도 하고 농구교실도 운영해 학생들을 지도하며 지내고 있어요. 좋은 실력을 갖췄음에도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재능을 살릴 기회를 잃어버리는 아이들이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운동은 즐거운 여건 속에서 해야 하는데…’라는 안타까운 마음에 도움이 될 방법을 생각하다 이 재단을 만들게 되었어요. 가진 특기라곤 농구밖에 없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죠.”
-농구를 통해 좋은 일을 하고 계시는 것 같다. 한결같은 농구 외길 인생이신데 농구와는 어떻게 인연이 닿게 된 건가.
“농구와의 연은 중학교 때 시작됐죠.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2학년이 되면 반드시 동아리 반에 가입해야 했어요. 하나 들기는 해야겠고, 어떤 동아리에 들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큰 키가 유리하게 작용될 수 있는 농구반을 선택했죠. 방과 후에 남아 연습을 하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농구에 흥미가 생긴 것 같아요. 단순한 계기로 시작하게 된 농구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선택은 스스로도 정말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농구보다 당구를 더 좋아하던 시기가 있었다던데.
“농구에 흥미를 잃고 슬럼프에 빠진 시기에요. 저는 다른 선수들보다 농구공을 늦게 잡은 편이라 실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 1년 유급을 해 고등학교를 4년 다녔거든요. 그런데 상대팀 선수들이 이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테클을 걸어왔어요. 그래서 혼자 마음을 못 잡고 방황했던 것 같아요.”
-중요한 시기에 마음을 못잡았어도 어떻게 중앙대에 잘 입학이 됐다.
“당시 명지고등학교를 후원하고 계시던 정봉섭 감독님이 저를 스카우트 해주셨어요. 방황하던 마음은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진정됐죠. 감독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 열심히 훈련했는데 감독님이 저를 유망주로 판단하셨는지 센터 포지션을 맡기셨죠. 센터는 농구에서는 가장 힘든 역할이지만 머리를 쓰지 않는 단순한 포지션이거든요. 감독님께서는 이런 점을 고려해 제가 게임을 풀어가는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셨나 봐요. 보는 안목이 있으셨던 거죠.(웃음)”
-그런데 입학 당시 전공은 경영학과다.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나.
“그때만 해도 학과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어요. 경영학과라고 하면 으레 멋있어 보이잖아요. 자유로울 것 같은 학과 분위기에 대한 선망도 있었고요. 실제로 연극영화학과나 법대에 간 친구도 있었던 거로 기억해요. 비록 훈련에 집중하느라 학업에 열성을 다하지 못했지만 지금도 경영학과로의 진학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필 중앙대였던 이유가 있나. 다른 학교의 스카우트 제의도 많았을 것 같은데.
“스승님이 일찌감치 저를 점찍었기 때문에 다른 대학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어요. 연대와 고대가 우승을 나누어 가지던 시절이었지만 중앙대 말고는 다른 학교에 대한 생각이 별달리 없었던 것 같아요. 스승님이 저를 각별하게 살펴주시기도 해서 다른 학교를 가야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꾸었고요.”
-대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무엇인가.
“기억에 남는 일은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83년도 춘계대학 농구에서 고려대학교를 이겼던 적이에요. 연대와 고대가 늘 우승을 차지하던 시기에 타대학은 우승권에 접근도 못했던 상황이었죠. 이런 시기에 중앙대가 연고대 70년의 아성을 깨부수고 고대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점은 기억에 두고두고 남을 만한 일이죠. 또 기억에 남는 일은 졸업식과 시합이 겹쳐 졸업식에 참가를 못했던 일이에요. 결국 다음날 학사모를 빌려 쓰고 쓸쓸한 졸업식을 치렀는데 얼마나 아쉬움이 남던지. 사실 아쉬움이라고 하면 학과나 학교에서 친구들을 많이 사귀지 못한 것도 꼽을 수 있겠지만.”
-친구들을 많이 사귀지 못했어도 같은 학교 출신 김유택 선수와는 돈독한 사이가 아니었나.
“김유택 선수와는 둘도 없이 막역한 사이죠. 입과 입술과 같은 순망치한의 관계랄까. 저의 선의의 라이벌 이기도 했고요. 학교 다닐 때도 서로에게 지기 싫어 죽기 살기로 연습을 했었어요. 오후 6시에 끝나는 합숙훈련 후에도 새벽까지 자유연습을 했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체육관을 먼저 떠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나봐요.”
-그렇게 연습한 덕분에 실력은 많이 늘었을 것 같다. 당시 중거리 슛과 속공에 강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는데.
“실력이야 정말 많이 늘었죠. 단점 보완에 더욱 노력을 기울였어요. 빠른 순발력과 중거리 슛을 잘할 수 있다는 장점에 비해, 키가 커 스피드가 떨어진다는 말을 자주 들었거든요. 키가 작아 빨리 뛸 수 있는 선수에게 지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아요. 또 큰 키에 비해 체중이 적게 나가는 단점을 극복하려고 많이 먹기도 했고. 100kg 정도가 제 신장에 맞는 정상 체급인데. 결국 살을 찌우는 데는 실패했네요.”
-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기아산업으로 적을 옮겼다. 당시 기아산업은 우수한 경기 성적을 거뒀었는데 본인이 크게 기여했다고 보는지.
“제가 기아산업에 입단하고 나서인 1988 ~1989 농구대잔치 시즌에서 우승을 거뒀어요. 현대와 삼성이 주거니 받거니 우승을 주고받던 시기였는데, 기아가 우승을 거머쥐면서 당시 대중의 예상을 뒤엎었죠. 본격적인 기아의 독주시대를 열었던 이 시기가 저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생각해보면 저는 항상 선발대에 서서 누군가의 포문을 열어 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선발대 역할이라니.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생각해 보면 저는 항상 첫 세대였던 것 같아요. 길을 만들고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면 되려나? 대학시절의 농구시합에서도 연세대와 고려대의 오랜 양강체제를 깨부수고 중앙대의 우승을 이끌었고, 기아에 입단하고 나서도 삼성과 현대를 제치고 기아의 불패신화를 만들었거든요. 김유택과 허재는 제가 들어오고 나서 덜컥 전성기를 함께 누렸으니까요. 그 이후에 방송계에 진출해 후배 선수들이 방송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것도 그렇고. 저는 누군가가 항상 진입할 수 있게끔 길을 닦아 놓는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매번 선발대 역할을 자처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때도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
“결정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때는 89년 농구대잔치가 아닐까 싶어요. 이때 MVP를 받았거든요. 당시 이 경기는 김유택 선수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시합에 출전하지 못했을 때였어요. 대학교 시절부터 콤비로 호흡을 맞추던 김유택 선수가 챔피언 결정전에서 갑자기 불참하게 되니 저로써는 고민이 많이 됐었어요. 그래도 어떻게 잘 극복을 해서 우승을 거머쥐었죠. 이 시기가 내 인생 최고의 헤이데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 기아 엔터프라이즈 우승 당시 모습. |
-그 경기가 있었던 바로 다음해에 결혼을 하셨다고.
“90년 2월까지가 경기 시즌이었는데 같은 해 10월에 바로 결혼을 했어요. 김유택 선수 소개로 만난 여자가 지금의 제 아내죠. 경기도중 입은 부상으로 재활 치료를 해야 했기 때문에 데이트도 주로 수영장에서 하고. 결혼을 하고 바로 부상 악화로 컨디션이 안 좋아져 결국 은퇴를 선언했죠.”
-은퇴 당시 아쉬움은 없었나.
“아쉬움이 남는 은퇴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여한 없이 필드에서 땀 흘렸다고 생각했거든요. 은퇴하기 한 달 전에 프로농구(KBL)가 생겼는데 저는 컨디션 악화로 도저히 필드에서 뛸 수 없는 상태였어요. 이전 경기도 강력한 진통제를 맞고 뛰었던 것인데, 그때는 이미 진통제를 맞아 고통이 가시지 않을 정도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거든요. 은퇴할 시기가 다가왔다고 생각했어요. 10년을 농구선수로서 뛰었으면 길지도, 짧지도 않게 무난히 지낸 거 아닌가요?”
-그 이후 방송생활로 제2의 전성기를 맞으셨는데.
“방송을 시작하게 된 이유에는 사실 후배 선수들에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였죠. 운동선수 생활만으로는 생계를 이어가기 힘든 후배들이 나를 본보기로 보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홈쇼핑 방송을 통해 수입도 생기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후배들도 점차 방송계에 진출하게 됐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방송이 저에게 잘 맞는 것 같기도 했고.(웃음)”
-활발한 방송활동을 이어가던 중 죽을 고비를 넘기신 적이 있다고 들었다.
“운동 잘하고 키가 크고 잘생긴 사람들만 걸리는 병에 걸렸어요. 마르판 증후군이라고 뼈·근육·심장·심혈 등의 이상 발육을 유발하는 선천성 질환때문에 이 병에 걸리게 되면 몸 크기와 심장 크기가 맞지 않아 대동맥에 이상이 생기게 돼요. 손발이 길고 눈이 나쁘다는 외향적 특징을 지닌 이들이 잘 걸리는 병이죠. 이 병을 원인으로 남동생과 아버지를 심장마비로 잃었어요. 저도 걱정이 되어 병원에 갔더니 풍선처럼 혈관이 부어올라 있더라고요. 당일 바로 수술을 잡아 겨우 살아났죠.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병의 위험성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심각한 병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방치하면 죽게 될 수도 있는 병이니까요.”
-수술 당시 도움을 받으셨다고.
“당시 경제적으로 무일푼인 상황이었기에 심장재단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았어요. 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깼는데 받은 도움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더라고요. 그때 진 마음의 빚을 갚고자 심장병 관련 희망나눔 사업을 결심하게 됐죠. 받는 기쁨보다 줄 수 있는 기쁨이 최고의 기쁨인 것 같아서.”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달라.
“과거 도전 ‘지구 탐험대’라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오지를 5번이나 간 적이 있어요. 당시 경험한 오지 생활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곳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나눔재단의 경제적 안정이 가장 급선무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면 오지로 나가 나눔을 전파하고 싶은 것이 저의 추후 계획입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중앙대는 나에게 전부다. 방황하던 나를 스카웃 해준 학교이기도 하면서 농구부 코치로서 2년간 활동하게 해준 곳이기에. 학부생 시절 4년 내내 주말도 반납하고 열심히 훈련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대라는 장소와 환경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졸업을 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종종 모교를 찾는다. 혹시라도 저녁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열정을 불사르던 ‘열혈청년 농구선수 한기범’의 기운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중앙대는 나에게 전부다. 방황하던 나를 스카웃 해준 학교이기도 하면서 농구부 코치로서 2년간 활동하게 해준 곳이기에. 학부생 시절 4년 내내 주말도 반납하고 열심히 훈련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대라는 장소와 환경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졸업을 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종종 모교를 찾는다. 혹시라도 저녁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열정을 불사르던 ‘열혈청년 농구선수 한기범’의 기운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단법인 한기범 희망나눔은
사단법인 한기범 희망나눔은 지난 20여 년간 농구선수로 활약하며 많은 사랑을 받아온 한기범이 어렵고 힘든 여건에서 묵묵히 운동하는 꿈나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려는 취지에서 설립됐다. 불우한 학생들에게 즐겁고 재미있게 운동하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청소년들이 건전한 자기취미나 특기 활동을 할 기회가 부족하며 좋은 실력이나 창의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재능을 살릴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스포츠가 자연스럽고 즐거운 생활체육이기보다 엘리트를 육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락하기도 하는 요즘, 한기범은 오늘도 어려운 환경에서 농구선수의 꿈을 키워나가는 청소년을 지원하고, 더불어 한국농구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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