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박용성식(式) 개혁' 본격화 학과 절반 통폐합
입력 : 2009.12.30 02:58 / 수정 : 2009.12.30 11:32
77개서 40개로 구조조정 단과대도 18개서 10개로
뿌리깊은 '학과 이기주의'와의 전쟁… 대학사회 큰 파장 일듯
지난해 두산그룹이 인수한 중앙대가 18개 단과대학을 10개로, 77개 학과(학부)를 40개로 줄이는 한국 대학 사상 초유의 대규모 학과 구조조정안을 29일 내놨다.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학과를 과감히 정리하고 시대 변화에 맞게 재편해 대학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시대에 맞지 않게 된 학과라도 한 번 생겨난 뒤에는 사라지지 않는 '학과 이기주의'가 지배하던 대학 사회에서 중앙대의 개혁은 상당한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
물꼬는 지난해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원도 용평의 한 리조트. 취임 두 달이 된 중앙대 박용성 이사장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900여명의 교수들과 얼굴을 맞댔다. 전체 교수회의를 이곳에서 소집한 것이다.
박 이사장은 "내가 대학(서울대 경제학과 59학번) 들어갈 때 최고 인기학과는 광산학과였지만, 지금은 광산학과 자체가 없다"면서 "시대 흐름과 글로벌 경쟁력을 생각하지 않는 교육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른바 '박용성발(發) 학과 구조조정'의 신호탄이었다. 박 이사장은 이날 교수회의에서 학과 구조조정 외에 교수 연봉제 도입, 총장 직선제 폐지를 3대 개혁과제로 내놨다.
이런 박 이사장을 두고, 대학을 인수해 '점령군'으로 오자마자 대학사회의 특수성을 모른 채 이상론적 얘기를 한다며 가볍게 넘기는 교수들이 더 많았다고 당시 한 참석 교수는 전했다. 그러나 기업인(현 두산중공업 회장)인 박 이사장의 개혁선언은 말로 그치지 않고, 일사천리로 실천에 옮겨졌다. 이듬해 2월 총장 임명제가 실시됐고, 3월에는 교수간 5000만원 이상 차이가 나는 교수 연봉제 도입이 진행됐다.
이쯤 되자 교수들 사이에 긴장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학과 구조조정은 교수들의 '밥그릇'과 직결된 뜨거운 이슈였다. 일부 교수들은 "학과 구조조정을 해도 내 학과는 절대 안된다"고 반발했고, 일부에서는 "학문의 영역을 구조조정하겠다는 것은 기업의 대학 지배"라는 비판도 거세게 일었다. 하지만 두산 인수 후 중앙대 개혁에 대한 외부의 시선이 우호적으로 나타나면서 개혁의 목소리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올해 수시 모집에서 중앙대 응시자가 지난해보다 2만2000여명 많은 6만3000여명이 몰려들어 무려 34.4대 1의 경쟁률을 보이자 대학가에선 '두산 효과'라고 부르기도 했다.
박 이사장은 올 연초부터 단과대별 구조조정위와 본부차원의 구조조정위원회를 동시에 가동해 의견 수렴을 했고, 외국계 컨설팅 업체에 용역도 맡겼다.
그 결과를 토대로 이날 공개된 안에 따르면, 18개인 단과대를 10개로 줄인 뒤 이를 ▲인문·사회·사범 ▲자연·공학 ▲의·약학 ▲경영·경제 ▲예·체능 등 5개 계열로 재편한다. 기존 문과대는 인문대와 사회과학대로 분리되며, 정경대는 사회과학대에 편입되지만 경제학과는 경영대와 합쳐져 경영경제대학이 된다.
법대와 미디어공연영상대학은 사회과학대에 편입되며, 예술대와 음악대, 국악대는 예술대학으로 통폐합된다. 외국어대는 인문대 아시아문화학부와 유럽문화학부로 바뀌며, 생활과학대는 사회과학대와 자연과학대·예술대 등으로 분리 흡수된다.
동시에 서로 학문영역이 겹치거나 유사한 학과는 광역화하거나 통폐합해 77개 학과를 40개 학과(학부)로 줄인다. 이 과정에서 금융공학과·에너지 공학부·건설플랜트학과 등 신성장동력 개념의 학과들이 새로 생겨나기도 한다. 대학 교육이 공급자(교수) 중심에서 수요자인 기업과 사회의 요구에 맞춰 학과를 새롭게 개편하자는 취지다.
박 이사장은 사석에서 종종 학과 구조조정을 두고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할 일"이라고 말해왔다. 이날 구조조정안을 발표함으로써 '전쟁'이 본격 시작된 셈이다.
이날 오전 9시 중앙대 흑석동 캠퍼스 본관 3층 회의실. 개혁의 총대를 멘 박범훈 총장을 비롯 부총장, 본부측과 교수측 TF, 총학생회 관계자 등 60여명의 교수·학생들은 학과 구조조정안을 놓고 토론을 시작해 오후 7시까지 무려 10시간에 걸친 마라톤 회의를 이어갔다.
회의에 참석한 이광호(51) 생명과학과 교수는 "구조조정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상당히 많다"며 "합리적인 대학운영보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에서 연구역량을 최고로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재편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회의에서 대학측은 장기적으로 육성할 경쟁력 있는 학과의 명단이 담긴 파워포인트 자료를 공개했다. 상경계열과 공대 건축학부 등이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좋은 평가를 받아 구조조정 과정에서 혜택을 보게 되는 학과의 교수들은 상대적으로 좋은 분위기였지만,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은 학과의 교수들은 감정적으로 대응하며 고성(高聲)이 오가기도 했다. 한 참석 교수는 "각 학과의 경쟁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지표를 찾는 데 논의가 집중됐다"고 말했다.
구조조정으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되는 학과의 학생들도 대부분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표석(19·국어국문학과 2)씨는 "구조조정이 진정 학문이나 학과 발전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며 "아무리 취업률이 낮은 학과라도 학문적 가치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구조조정을 한다면 대학이 학원이나 고시반과 다를 것이 뭐냐"고 말했다.
하지만 박 이사장과 박범훈 총장 등 대학 본부측의 입장은 단호하다. 박 총장은 "대외 경쟁력 있는 학과의 집중 육성, 유사중복학과 통합, 국제사회가 선호하는 인재 양성이란 세 가지 원칙에서 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중앙대는 10개로 줄인 단과대를 다시 5개의 계열별로 묶어 5명의 '책임 부총장'이 예산과 교원임용, 인사, 교육, 연구지원 등 모든 권한을 위임받도록 했다. 계열 간 자유경쟁체제를 유도해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뜻이다.
중앙대는 이날 구조조정안과 관련해 단과대 교수들로 구성된 '계열위원회'와 첫 논의를 한 데 이어, 내년 3월 말까지 수차례 회의를 통해 최종안을 확정하고, 2011학년도부터 단계적으로 적용할 계획이다. 학과 구조조정안이 확정되면, 학과별 정원 조정 작업을 거친 뒤 서울·안성·하남으로 나누어진 캠퍼스마다 어떤 학과를 배치할지 결정하게 된다.
중앙대, 대기업式 구조조정에 구성원 반발 확대
중앙대의 기업 경영 마인드를 접목한 학문단위 구조조정이 교수와 학생 등 학교 구성원의 반발로 난항을 겪고 있는 가운데 본부의 ‘일방통행‘식 업무 추진이 반발을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
27일 중앙대 교수와 학생 등에 따르면 중앙대는 작년 봄께 단과대 교수 대표가 중심인 ‘계열별위원회‘와 대학본부를 중심으로 한 ‘본부위원회‘를 구성해 각각 구조조정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양측은 또 각자 마련한 구조조정안을 지난달 29일 동시에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본부는 사전 통보없이 보도자료를 기습적으로 배포했으며, 보도자료는 위원회안이 빠진 ‘반쪽짜리‘였다.
계열별위원회 회장인 방효원 의학부 교수는 "학교 구조조정위원회 총괄위원장을 맡고 있는 안국신 부총장의 요청으로 두 가지 안을 함께 발표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방적으로 자료가 나가버렸다"고 말했다.
방 교수는 "보도자료를 사전 검토하던 중 이런 일이 벌어져 어찌된거냐고 물으니 ‘미안하다 총장님이 이렇게 하셨다‘고 하더라"며 "그나마 우리쪽 안은 쏙 빠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대학본부는 교지 등 학내 언론과 총학생회 등 구조조정에 반대해 온 기관에 대해서도 강경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본부는 작년 말 중앙대 재단과 총장을 비판하는 기고문과 시사만화를 실었다가 전량 회수된 교지인 ‘중앙문화‘의 올해 예산을 최근 전액 삭감했다.
중앙문화는 작년 11월 발간한 58호에 박범훈 총장이 학생들에게 "학교는 니들 게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내용이 담긴 ‘위기의 CAU(중앙대) 민주주의‘란 시사만화와, ‘기업은 대학을 어떻게 접수했나‘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이에 따라 학내에서는 이번 예산 삭감이 지면을 통해 재단과 총장을 비판한 데 대한 보복성 조치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또 총학생회가 주관해 온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인 ‘새터‘를 올해부터 사실상 폐지하기로 한 것도 논란의 대상이다.
박 총장은 지난 20일 교내 커뮤니티인 ‘카우인‘(http://cauin.cau.ac.kr/)을 통해 "신입생 OT를 학교본부가 주관해 단과대별로 교내에서 치르겠다"며 "선후배간 새터 행사는 3~4월중 학과별로 MT(수련회)를 이용하라"고 통보했다.
총학생회는 이에 대해 "대학재단과 총장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해 온 총학생회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라며 반발하고 있다.
임지혜 중앙대 서울캠퍼스 총학생회장은 "박 총장은 지난해 10월 구조조정 관련 자료를 달라고 했을때도 ‘학생들이 딱히 본부안보다 더 좋은 대안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라며 묵살했고, 이번 새터 문제때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임 회장은 "학생회에서는 결국 2월 중에 독자적으로 진행하자는 학생들의 요구를 수렴해 학교의 지원 없이 새터를 실시할 계획인데 아무래도 학생회비 지원을 끊는 등 본부에서 압력이 들어올 것 같다"고 우려했다.
익명의 중앙대 관계자도 "학문단위 구조조정과 같은 사업을 잡음 없이 처리하려면 학교 구성원간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박 총장과 본부는 독선적인 행태로 신뢰를 오히려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중앙대 윤경현 기획처장은 이에 대해 "독선적인 운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오해"라며 "우선 구조조정안 관련 보도자료에서 계열별위원회안이 빠진 것은 안이 완벽하지 않고 확정되지 않아 실을 수 없는 상태였던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윤 처장은 이어 "새터 문제는 지난달 옛 학생회에 (폐지 결정을) 미리 통보한 상태였는데 새로 출범한 학생회에는 이러한 내용이 전달되지 않아 생긴 문제이며, 교지는 자체예산으로 운영되는 타대학 교지의 사례를 따른 것일뿐"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중앙대 교수들 학문단위 재조정 방안 제시
“본부안은 기업식 구조조정…취업률 지표도 신뢰성 결여”
2010년 02월 02일 (화) 18:29:14 김유정 기자jeong@kyosu.net
중앙대에서 학문단위 구조조정 방안을 둘러싼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해 12월말 대학본부 중심의 본부위원회에서 학문단위 재편성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지난 2일 중앙대 단과대학 교수들로 구성된 학문단위 재조정 계열위원회가 또 다른 구조조정 방안을 제시했다.
계열위원회 안은 현행 18개 단과대학 77학과(부) 체제를 11개 단과대학 51학과(부) 및 5개원으로 구성된 종합예술원 체제로 재조정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본부위원회의 방안과 비교하면 경제대학과 경영대학을 분리하고 응용생명과학대학을 신설하는 한편 예술대학과 체육대학을 분리해 체육대학, 종합예술원 체제로 운영한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본부위원회는 10개 단과대학 40(2)학과(부)체제를 도입해 의약학계열(의과대학, 약학대학), 인문사회계열(사범대학,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경영·경제계열(경영경제대학), 자연공학계열(공과대학, 자연과학대학), 예체능계열(예술대학, 체육대학)로 학문단위를 조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계열위원회는 다양한 신설학과도 제시했다. 사범대학 안에 국어교육과를 만들고 공과대학에 융합재료공학과를 신설해야 한다고 밝혔다. 종합예술원은 5개 원, 23개 학과 체제로 재편하고 미술원 산하에 예술(이론)학과를 신설하며, 종합예술원 행정체제를 별도로 수립하는 내용을 내놓았다.
계열위원회 안이 수용될 경우 문과대학과 외국어대학을 통합해 인문대학을 신설하고 11개 학과 체제로 변경된다. 영어영문학과와 영어학과, 일어일문학과와 일어학과가 통합되며 민속학과는 비교문화학과로 바뀐다. 또한 정치외교학과와 국제관계학과를 통합해 정치외교학과로,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를 도시계획·부동산학과로 바꾸고 복지계열은 학부제 폐해를 고려해 독립학과로 남긴다.
경제대학은 1캠퍼스 경제학과와 2캠퍼스 경제학부를 통합해 경제학과로 바꾸고, 산업경제학과를 응용경제학과로, 수학통계학부 통계학전공을 응용통계학과로 바꾸는 내용이 포함됐다. 경영대학은 1캠퍼스 경영학부와 2캠퍼스 상경학부를 통합해 경영학부로 바꾸고 정보시스템학과를 IT서비스학과로, 금융공학융합전공을 금융공학과로 바꾼다.
계열위원회는 이번 안과 관련, “본부위원회 학과평가 및 구조조정 문제점을 분석하고 학과 자체평가와 학문단위별 의견 취합을 거쳐 계열위원회가 검토, 조정해 발표했다”고 말했다.
본부위원회가 밝힌 재조정 방안에 대해선 △대학 자율성과 특성을 무시한 기업식 구조조정 △기초학문을 도외시한 실용학문 위주의 구조조정 △학문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행정 편의적 통폐합 △5대 계열체제 반대 △책임부총장제 및 행정교수제를 통한 기업식 대학운영 반대 △취업률 지표는 신뢰성과 타당성 결여 △학과평가 결과에서 사실관계 오류 다수 발견 등의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계열위원회는 “각 학문단위의 고유성과 역사성을 중시하되 유사중복학과를 통합하고, 학과제를 원칙으로 하되 학문특성상 긍정적인 경우 학부제가 가능할 것”이라며 “학문단위 재조정은 2캠퍼스의 하남 이전을 전제로 하고 민주적 의견 수렴 및 자기책임형 재조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