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용띠해에 중앙대학교 산업경제학과에 입학해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습니다.
요즘 저희 학과를 졸업한 선배들과 동기들, 후배들은 정서적인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번에 언론에 보도된 중앙대 구조조정안에 저희 학과가 빠졌습니다. 확인해 보니 ‘폐과’랍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멍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회사일에 찌들어 살다보니 학과도 제대로 못챙기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희 학과는 60년대 정경대학 농촌개발학과를 전신으로 삼고 있습니다. 1972년, 정확하게는 1971년이라고 합니다. 중앙대에 농과대학이 들어서고 농촌개발학과는 농과대학으로 편입되면서 농업경영학과와 지역사회개발학과로 분리됩니다.
그리고 다시 농업경영학과가 농업경제학과로 바뀝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1982년, 중앙대 농업경제학과는 예술대와 함께 희생양이 돼서 안성으로 강제 이전됩니다.
당시에 문과대 공과대가 그 뒤를 이어서 안성으로 이전하는 것을 비롯해, 흑석동 캠퍼스 전체 학과들이 안성캠퍼스로 옮긴다는 학교 방침에 따라 농과대학과 예술대학이 우선적으로 이전했습니다.
당시 군대에 갔다온 선배들은 갑작스러운 학교 이전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부는 서울캠에 남아서 계속해서 수업을 받았고, 일부는 영문도 모르게 안성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고 합니다.
82년이후 학교 당국은 지속적으로 문과대 공과대를 안성으로 이전하려 했는데,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바람에 총장을 비롯한 학교책임자 모두가 사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문과대 학생들은 건물에서 뛰어 내리며 자살소동까지 벌였다고 합니다.
저희 학과 선배들은 지속적으로 캠퍼스 환원 시위를 벌였고, 결국 1987년 본관점거에 들어가는 불상사가 빚어졌습니다.
1988년, 우리 동기들은 입학하자마자 선배들로 부터 원상복귀 투쟁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한 교육을 거듭해서 받아야 했습니다.
그때 원상복귀는 반드시 이뤄야 할 우리 모두의 숙원으로 자리잡았고, 결국 그해 2학기부터 상경해서 본관 점거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성균관대 농업경제학과와 서울대 농대가 우리 대학과 같은 시위를 동시에 벌였습니다.
본관점거 농성은 뚜렷한 해답을 찾지 못한채 시일을 끌었고 그해 입학원서 접수하는 날을 넘어서 계속 진행됐습니다.
추운 겨울이 닥치면서 동기들이 서서히 지쳐갔습니다. 당시 새내기였던 우리들은 순수했습니다. 농성과정에서 엄청난 마음의 상처를 안게 됐습니다.
교직원은 물론 같은 단과대 소속 타학과 선배까지 나서 우리를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수개월째 계속된 농성으로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버렸습니다.
그런 와중에 동기 한명이 놀라운 일을 저질렀습니다. 총장실을 막아 놓은 벽을 깨부수고 들어가서 내부문서들을 모두 갖고 나왔습니다.
그 서류중에 총장이 우리 학과 앞으로 써준 각서가 있었습니다.
문제의 각서에 따르면 ▲전용 통학버스 및 기숙사 제공 ▲본교 취업코드 사용을 통한 불이익 해소 ▲서울캠과의 학점 교류와 서울캠 수업권한 부여 ▲안성이전 이후 학생들의 불이익이 있다면 캠퍼스를 환원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서류를 발견한 지 며칠이 지나, 우리는 점거 농성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왜냐구요? 그 악몽같은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다시 안성으로 내려온 뒤 동기들은 심각한 패배감에 빠져 방황했습니다. 당시 성균관대 농업경제학과와 서울대 농대는 농성 끝에 결국 캠퍼스 이전을 확정지었습니다.
안성으로 내려온 지 이틀째, 학교 당국은 총장실로 들어가 서류를 빼낸 동기를 제적시키려 했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안성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결국 그 친구를 우리 손으로 지켜냈습니다. 우린 그 때 술집에 모여 막걸리로 친구를 되찾은 기쁨을 대신했습니다.
그때 예술대 선배들은 학교에 소송을 제기해서 상당한 액수의 피해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배들은 혹여 그것이 구실이 돼서 캠퍼스 이전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할까봐 소송 자체를 포기했습니다. 앞으로 입학할 후배들을 위한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학교에선 우리 학과를 다시 환원하려면 서울캠퍼스 정원을 줄여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만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못다한 수업을 메우기 위해 크리스마스, 새해연휴, 설날때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채 학교에 남아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봐야 했습니다.
그 후유증은 89년에도 계속됐습니다. 아니 그 후유증은 수십년간 선배들과 동기들 후배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지금도 선후배들은 그 고통으로 부터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원상복귀에 대한 얘기는 끊임없이 나돌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저 학교생활에 방해가 될 뿐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동기들은 이런 아픈 과거가 후배들에게 전해지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기에 원상복귀를 언급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 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며칠전 신문을 통해 중앙대 구조조정 관련 기사를 읽게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과 이름이 빠져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보니 경제학과와 유사학과라 통합돼서 폐과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우리 학과가 사라져야 학교가 발전한다니...’ 참으로 참담했습니다. 결국 학교는 이렇게 우리 모든 동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려 합니다.
우리 때는 경제학과와 유사한 과목도 있었지만 상당히 특화된 전공과목이 많았고 새로운 분석기법을 통해서 대학생 논문대상을 휩쓸다 시피한 적도 있습니다. 이럼에도 불구 경제학과와 중복된다고 해서 다시금 확인해 보니 교과과정이 너무나 바뀌어 있었습니다.
바뀐 교과과정을 보면서 또 슬펐습니다. 왜 이리 바꿔야 했을까? 안성에 너무 오래 있다보니 신입생 유치가 점점 어려워져서 그랬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했습니다.
우리 학과는 경제학을 기반으로하는 응용경제학과로 고려대 식품자원경제학과, 건국대 생명자원경제학과 등과 유사한 학과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들 학과는 1차산업에서 출발해 시대 흐름에 따라 유통과 바이오산업에 이르기까지 매우 색다르게 진화해 왔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교과과정이 바뀌며 날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최근 몇년안에 바뀐 교과과정만을 놓고 반세기를 이어온 학과를 무참히 없애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문스럽기만 합니다.
학교가 선후배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이젠 목을 치려합니다. 그것도 학교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구실을 내세워서 말입니다. 왠지 모를 슬픔에 마음이 답답합니다.
저는 지난달 출장을 다녀오면서, 경부고속도로에서 내려 학교로 향했습니다.
밤 10시가 넘어 우리 단과대학 건물로 들어가보니, 우리 학과 학과사무실이랑 학생회실, 독서실은 여전했습니다. 보기에 좋았습니다. 학과사무실 앞에는 알 수 없는 상패가 두개씩이나 박혀 있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우리 학과가 2007년과 2009년 최우수교육단위로 선정됐더군요.
그리고 그 옆에 못보던 동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산업정보학과 88학번 아무개씨의 죽음을 위로하며 부친이 학교에 연구기금을 기증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불현듯 기억이 났습니다. 88년 겨울 그해 신설된 이웃학과인 산업정보학과 동기생 한명이 연탄가스로 질식사한 아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 시절 학교 주변은 그렇게 열악했습니다.
슬픈 기억을 넘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저의 마음은 흐뭇했습니다. ‘최우수 교육단위라? 그것도 두번씩이나? 그래도 잘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습니다.
그래도 한 때는 우리 학과가 중앙대의 중심인 영신관의 주인이었고, 청룡을 받치고 있는 일곱마리 작은 용중 하나였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알지 못할 안도감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얼마전 흑석동에서 가진 78학번 홈커밍데이때 후배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다들 취직도 잘하고 늠름해 보였습니다.
2010년 학생회장을 맡게 됐다는 후배 녀석이 내가 학생회장 출신이란 말에 ‘어떻게 하면 학과일을 잘할 수 있느냐’고 묻길래, 밤새도록 서로 얘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학교에선 후배들을 더 이상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대로 라면 2018년 산업경제학과 88학번 홈커밍데이는 없습니다. 내가 돌아가야할 곳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우리 학과를 이 지경으로 몰고 간 학교가 상처를 치유하고, 지원은 못해줄 망정 이제는 아예 폐과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오늘 선후배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다들 '어떻게 명맥이라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겠냐'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우리 선후배들은 학교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학교는 학교를 다닐 때나 졸업한 후에도 계속 뒤통수를 칩니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명맥만 유지하게 해달라는 것인데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그럴거면 무슨 최우수 교육단위 상을 두차례나 줬답니까?
병주고 약주고 이젠 숨통을 끊으려는 학교가 너무도 야속해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학과는 응용경제학으로 교육과정 개편에 조금만 신경을 써도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학과입니다. 무조건 합친다고 경쟁력이 배가되는 것은 아닐진데, 대체 왜 없애야 한다는 건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학교가 앞으로 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사랑하는 나의 학과를 짓밟은 그 학교가 과연 자랑스러울까요? 2018년 개교 100주년 우리 선후배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갑자기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좀 더 학교 일에 관심을 쏟았더라면 이런 일은 막을 수 있었을텐데라는 자괴감이 엄습합니다.
나중에 후배들이 “이웃 학과는 살아 남았는데 선배들은 뭘 했나요?”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요?
"후배들아! 우리 선배들은 정말 열심히 싸웠단다"고 말해주면 위안이 될까요?
*** 중앙대학교 산업경제학과 폐과 조치에 대한 의문점
1) 중앙대학교에서 2007년 2009년 최우수교육집단으로 평가하고 상패를 수여한 학과를 다음해 폐과한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납득하기 힘듭니다.
2) 구조조정안에서 문과계통 신설학과는 모두 응용경제학 분야인데 어떻게 반세기 역사를 이어온 응용경제학과를 폐과시키는지 의문스럽고, 취업과 경쟁력을 운운하면서 자생력을 갖춘 전통의 응용경제학과를 구성원들과 아무런 협의없이 폐과하는게 합당한지요?
오히려 구성원들과 협의해서 발전적인 모습으로 보완하는 것이 학교를 위해서 바람직한 것이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