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동문이나 그 가족은 누구라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참석을 원하시는 동문이나 가족은 010ㅡ8730ㅡ9063(김건일, 행정학과 18회)으로 연락주시면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출발일시 : 2009년 6월 21일(일) 08:00 *우천불구
출발장소 : 용산 역전광장(조은여행사 버스 대기)
준 비 물 : 산행에 필요한 장비와 중식
회 비 : 남자(20,000원), 여자(10,000원)
삼년산성(三年山城)
종 목 : 사적 제235호
면 적 : 229,958㎡
지 정 일 : 1973.05.25
소 재 지 : 충북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1-1
시 대 : 삼국시대 (470년)
보은은 이웃한 괴산 땅과 마찬가지로 산지가 많다. 삼국시대의 각축장이던 충북에는 곳곳에 산성이 많은 편으로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단한 산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삼년산성이다.
삼년산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신라 자비마립간 13년(470년)에 쌓았으며, 축성하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하여 삼년산성으로 불리우며, 신라는 이곳을 백제 공격을 위한 최전방기지로 삼았다. 그 후 소지마립간 8년(486)에 실죽이 3천명의 인부를 징발해 다시 고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가 서북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전초기지였다고 생각되고 있으며, 삼국통일 전쟁 때 태종 무열왕(654∼661, 재위)이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이곳에서 맞이하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918∼943, 재위)은 이 성을 점령하려다 크게 패하였던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문은 보은읍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서쪽 수구 부근에 있다. 성벽은 주위의 능선을 따라 견고하고 웅대하게 구축하였는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22m에 달하고, 너비는 5∼8m이며, 전장(全長) 1,680m에 이른다. 성벽은 납작한 돌을 이용해서 한 층은 가로 쌓기를 하고, 한 층은 세로 쌓기를 하여 튼튼하며,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다르다. 남쪽과 북쪽은 안팎을 모두 돌을 이용하여 쌓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터는 4곳에 있으나 모두 그 형식이 다르다. 성내에는 연못터와 우물터가 있고 주위 암벽에는 글이 새겨 있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발견되어 성을 오랫동안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벽의 군데군데에 곡성이 있어 우리나라 고대 축성법 연구에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성내에는 아미지란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이 주위의 암벽에는 옥필, 유사암, 아미지 등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김생의 필체로 전해오고 있다.
5세기 후반 신라의 성 쌓는 기술을 대표하는 산성으로 주변에는 수 천기의 무덤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돌을 이용하여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평가되는 곳이다.
*삼국통일의 교두보, 삼년산성의 비밀
충북 보은에 세워진 신라의 산성, 삼년산성.
1500년이 흘렀지만 그 웅장한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삼년산성은 470년 신라 자비왕 대에 3년에 걸쳐 장정 3천 명을 동원해 공사했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신라는 한강 진출이 유리한 교통의 요지에 모든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견고함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산성을 쌓는다.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출발은 늦었지만 200년 앞서 통일을 준비하는데 ….
1. 최고를 자랑하는 삼년산성
삼년산성은 외벽과 내벽 사이가 흙이 아닌 돌로 채워져 그 견고함은 당대 최고 수준이다. 크고 작은 돌을 수직으로 쌓아올렸는데 작은 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다. 산 정상을 원형으로 둘러싸며 세워져 있는 이 성벽만으로도 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성벽 바깥쪽으로는 바로 깊은 계곡이 있어 정해진 길이 아니면 성벽까지 오르지 못하는 구조이다.
2. 전략적 요충지
5세기 후반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경을 맞댄 곳이 보은 일대, 삼년산성이 세워진 지점이었다. 당시 백제와 고구려는 보은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백제에게 있어 보은은 한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신라가 이 싸움에 뛰어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삼년산성이 전략적 요충지라는 것은 현장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3. 난공불락의 요새
산성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의 침략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일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대결하던 시대에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 하는 것은 산성이었다. 거의 모든 전투가 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견고한 성을 확보하고 있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따라서 삼국은 성을 쌓은 일을 대단히 중요한 일로 여겼다. 취재팀은 삼년산성을 조사하면서 여러 곳에서 신라인들의 고민과 노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곳은 결코 단순한 성이 아니었다.
4. 백제 성왕을 죽이다
삼년산성을 세운 지 100여 년 뒤, 삼년산성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신라의 통일전쟁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바로 삼년산성 출신의 한 장수가 백제 성왕을 죽였다는 것이다. 백제의 왕을 역사상 크게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한 장수가 죽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삼년산성의 역할과 삼년산성을 지키던 신라 장수들의 수준을 말해주는 진흥왕 15년. 사건이 일어났던 그때로 돌아가 본다.
5. 신라의 대역사, 삼년산성
3년이나 걸려 만들어진 성, 성을 보수할 때 장정 3천 명을 동원했던 성, 신라는 어떻게 이런 대역사를 이루어 낼 수 있었을까. 486년 신라는 삼년산성을 개축하면서 일선계에서 3천명을 동원했다. 고구려가 최고 전성기에 동원한 군사력이 30만 명, 백제나 신라의 경우 10만 명이 채 안되었음을 놓고 볼 때 보은의 삼년산성을 축조하면서 3천 명을 동원했다는 것은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공사였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신라는 삼년산성을 통해 두 가지 목표를 이루어낸다.
6. 200년을 앞선 신라의 통일 행보
삼년산성을 지은 200년 후, 신라는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통일을 향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삼년산성의 진가는 이제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은 당나라와 협상을 마무리 짓고, 백제 사비성을 향해 진군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사비성을 함락 시켰다. 그로부터 5일 뒤, 백제를 멸망시킨 태종 무열왕은 축하행사가 한창이던 사비성을 뒤로하고 삼년산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