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일 안중근의사기념관장 인터뷰
“민족주의 넘어 동양평화 제창… 시대를 앞서 간 사상가”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의 핵심은 한반도 평화 없이 동북아 평화 없고, 동북아 평화 없이 한반도 평화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 세기를 앞서간 그의 사상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후손들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안 의사의 중국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만난 김호일 기념관장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 후손들이 안 의사의 뜻과 바람을 충실히 구현해 왔는지 생각해 보면 송구할 뿐”이라며 “100주년을 계기로 안 의사에 대한 연구와 조명 작업이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올해는 안 의사가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의거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흔히 한 세대라고 말하는 30년을 세 번 지나고도 10년이 더 흘렀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세계에 알림으로써 후손들이 독립을 이루고 국가를 세워 번영을 누리는 자양분이 됐다. 안 의사의 의거는 국론 분열을 극복하고 남북통일을 이뤄야 하는 우리에게 아직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안 의사의 사상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말해 달라.
“그는 유교와 천주교를 두루 접하고 전통과 서구의 실용주의를 받아들인 사상가였다. 안 의사의 아버지는 박영효, 홍영식 등 당시 개화사상가들과 폭넓은 접촉을 했고, 안 의사는 이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우리 민족의 독립과 나아가 동양평화를 추구하는 안 의사의 사상은 이 같은 성장 배경이 자양분이 됐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은 최근 동북아 정세를 고려하면 시대를 앞서간 것이다. 유럽의 유럽연합(EU)처럼 한국과 중국, 일본 간 상설기구를 두고 모든 문제를 협의해 나가자는 것, 그것을 안 의사는 그 시대에 주창했다.”
―동북아 주요 3국 간 공동번영을 위한 상설기구를 고안했다는 말은 현재에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안 의사의 사상과 경륜, 통찰이 어우러져 나온 것이라고 본다. EU가 창설될 때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했지만 본부는 벨기에 브뤼셀에 뒀다. 안 의사는 진정한 대한제국 독립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런 바탕 위에 동북아 국가들과 동등하게 평화를 모색할 수 있다고 봤다. 또 이를 위해 3국의 중간 지점인 중국 다롄에 3국 간 회의기구를 설치해 동북아 공동보조를 취하자고 제안했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을 좀 더 쉽게 설명한다면.
“안 의사는 다롄에 3국 회의기구를 설치하고 각 국가가 회비를 갹출해 운영하는 게 옳다고 봤다. 3국 간 자격은 물론 동등해야 했다.일본은 국익을 위해 대동합방론, 아세아연대론, 흥아론(興亞論) 등을 내세우던 시기였다. 안 의사는 이런 자국, 자민족 이기주의를 넘어 인류 공영과 자유, 평등 정신에 입각한 사상을 구현하려고 한 것이다.”
―안 의사의 고향은 황해도이고 활동무대는 중국이다 보니 사료나 유품 수집이 힘들다고 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안 의사가 일제 헌병에 체포당한 후 재판받은 모든 기록, 인간관계 등 각종 자료를 모두 수집하고 발굴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모두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안 의사를 숭모하기 위한 많은 단체가 있어 안 의사에 대한 논문과 연구자료 등을 모으기 위한 작업이 추진 중이니 성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
―최근 일본 내에서도 안 의사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다.
“지난해 12월 일본 용곡대학의 한 법학교수가 찾아왔다. 1905년에 체결된 ‘을사조약’에 고종의 서명이 빠져 무효라는 주장했던 국사학계의 거목 이태진 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의 견해를 같이한다며 각종 자료를 부탁했다. 지난해 9월에는 일본법정대학을 나온 한 변호사가 찾아왔다. 칸트의 세계평화론과 안 의사의 동양평화사상을 접목시키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 외에도 안 의사 순국일마다 방한하는 사이토 다이겐 일본 대림사 주지 등도 모두 안 의사를 숭모하는 일본 내 인사들이다.”
―기념관을 찾는 일본인 관람객 수도 늘었다고 하는데.
“외국인 관람객 중에는 가장 많다. 학생이 대부분인 내국인 관람객에 비해 일본인 관람객은 연령층이 다양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찾아와 감동받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안 의사는 일제가 그를 재판할 때 ‘사형보다 더 무거운 형벌이 없나. 그걸로 나를 처벌하려면 하라’고 요구했다. 안 의사는 일본의 사법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차라리 국제법에 따라 재판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 안 의사의 풍모를 접한 일본인들은 안 의사에 대한 선입견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고 돌아가는 것 같다.”
―세계일보는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을 통해 안 의사의 역사적 유물과 사적복원, 기념물 건립·지원 업무를 해왔다. 격려와 충고의 말씀을 부탁한다.
“중국에서 안 의사와 관련된 사업을 추진하는 게 쉽지 않은데 잘 해 왔다. 중국 다롄은 안 의사뿐만 아니라 많은 선조와 중국인들의 항일투쟁 근거지였다. 이 지역의 항일운동을 여순재단이 집중 조명하고 각종 사업을 추진하면 우리 후손과 중국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김재홍 기자 hong@segye.com
약력
▲1939년 서울 출생 ▲1962년 중앙대 사학과 졸 ▲1988년 단국대 문학박사 ▲1967∼76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1980∼2005년 중앙대 사학과 교수 ▲1980∼ 국사편찬위원장 ▲2001∼02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2001∼07년 국학학술원장 ▲2008.2.11∼ 안중근의사기념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