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학교 동문이나 그 가족은 누구라도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참석을 원하시는 동문이나 가족은 010ㅡ8730ㅡ9063(김건일, 행정학과 18회)으로 연락주시면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출발일시 : 2009년 1월 18일(일) 08:00 *우천불구
출발장소 : 용산 역전광장(조은여행사 버스 대기)
준 비 물 : 겨울 산행에 필요한 장비와 중식
회 비 : 남자(20,000원), 여자(10,000원)
설화산(雪華山 441m) : 충남 아산의 민속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외암마을의 뒤에 병풍처럼 서있는 산. 설화산은 아산이나 천안 시민들에게는 뒷동산이나 마찬가지로, 온양과 천안을 오가는 21번 국도나 온양에서 공주나 부여로 가다보면 빤히 올려다 보이는 산이다. 5개 봉우리들이 붓끝처럼 생겼다 하여 문필봉이라고도 하고 오봉산이라고도 부른다. 금북정맥 줄기에 놓인 이 산은 남쪽으로 천안 광덕산(699.3m)과 맥을 같이 한다. 그 기세가 매우 독특하여 문필가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이곳에는 칠승팔장지지의 명당이 있어 예로부터 투장이 성행하여 가뭄이 들면 투장한 곳을 찾아 파헤치고 기우제를 지내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다. 이른 겨을철부터 늦은 봄철까지 눈이 덮여 장관을 이룬다 해서 설화산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화산 서쪽과 동쪽 기슭은 풍수지리상 길지로 알려져 고려 말부터 반가(班家)의 고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동남쪽 기슭에는 조선조 청백리인 맹사성 집안이 살던 고택이 있고, 서남쪽 기슭에는 조선조 명조(1545 - 1567) 때부터 예안 이씨들이 세거지(世居地)로 살았다. 그 후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많은 인재들을 배출해, 이간(李柬)이 설화산의 우뚝 솟은 영봉의 정기를 따서 외암(巍巖, 우뚝 솟은 바위라는 듯)이라 호를 지었는데, 마을 이름도 외암이다. 그러나 한자가 너무 복잡해 간단히 외암(外岩) 이라 고쳤다. 당시의 초가들이 밀집되어 있는 민속마을을 둘러보는 것도 설화산 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산행은 사방에서 오르내릴 수 있다. 어느 코스를 택하던 외암리 민속마을은 꼭 둘러봐야 한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다음부터 더욱 상업화되어 옛 정취를 잃어버린 안동의 하회마을과 달리 외암리 민속마을은 옛것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어 마을 전체가 민속박물관이다. 산 너머 배방면 중리의 맹씨 행단도 빼놓을 수 없다. 이래서 설화산 산행은 아늑한 고향의 정취도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산행이 된다.
외암리 민속마을 : 道 민속마을(1978년)과 전통 건조물 보존지역 제2호(1988년)로 지정된 옛 전통 가옥과 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장소다. 한국민속촌이나 낙안읍성 등은 그 유명세만큼이나 꾸민 게 많고 새로 지은 게 많은 곳이지만, 이곳 외암리는 예전의 마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곳의 특징은 무엇보다 나지막한 돌각 담장과 마을 구석구석으로 파고드는 냇물이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계속 이어지는 허리를 구부린 낮은 돌담들은 집과 길을 구분하면서도 집과 집을 연결하여, 종래에는 마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틀로 감싸 안는다. 규칙 없이 아무렇게나 쌓아 올려 자연미가 충만한 이 담장은 총 5.3km에 달한다. 담 너머로 엿보이는 소박한 마당에는 감, 살구, 앵두, 호두, 모과, 대추, 은행 등의 과실수가 풍성한 초록빛 몸을 단장하고 섰고, 담 밑에는 온갖 야생화가 자라고 있다. 이곳을 찾은 대부분의 건축가들이나 조경업자들이 이곳만큼 아름다운 돌담길을 본 적이 없다 할 정도이다. 외암리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대로 살고 있지만, 어느 집에나 들어가 구경할 수 있다. (사전양해를 구하고 정숙을 유지해야 예의겠지요) 물은 맑고 시원하게 마을의 피가 되어 순환한다. 마을의 배산인 설화산이 불기를 내뿜는 형상이라 이를 잠재우기 위해 개울을 집집마다 끌어들여 인공 조성한 것으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양반 댁으로는 중요민속자료 제195호로 지정된 ‘참판댁’이 대표적. 마을 동쪽의 참판댁은 조선 말기 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이 고종에게서 하사받아 지은 집으로, 동남향의 큰 집과 서남향의 작은 집이 독립성과 더불어 일체성을 느끼게 하고, 집안 곳곳에서는 삶의 실용성과 여유를 함께 추구하고 있다. 이밖에도 아름다운 정원을 보여 주는 영암군수댁을 비롯하여 병사댁, 감찰댁, 참봉댁, 종손댁, 송화댁 등은 격식과 너그러움을 갖춘 조선의 선비 정신을 그대로 대변한다.
맹사성 고택 : 고려 말의 무신 최영이 지은 집으로 그의 손자사위인 맹사성의 부친 맹희도가 물려받은 후 수백 년간 대를 이어 살아오며 보존되었다. 신창맹씨 종중 소유로 후손 맹흥렬이 관리하고 있다. 고택은 설화산을 등지고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ㄷ자형 맞배지붕집이다. 뜰에는 맹사성이 심은 수령 600여 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마주 서 있으며, 은행나무 아래서 강학(講學)했기 때문에 맹씨행단이라고도 불렸다. 이 고택과 구괴정, 은행나무를 포함하여 아산맹씨행단이라 불리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고택 뒤에는 맹사성과 부친, 조부 등 맹씨 3위의 위패가 봉안된 사당 세덕사와 정각이 함께 있으며, 맹사성의 유물을 모아 전시하고 있는 유물 전시관이 세워졌다. 이곳에 고불맹사성유물일괄(중요민소가료 225)이 보관되어 있다. 맹사성은 고려 우왕 때 장원 급제하고 청렴하면서도 강직한 관직생활로 선비정신을 드높였는데 세종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며 태종실록을 편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