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2.0 2006-10-24 23:06]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주자로 잠실 메인스타디움에 들어온 손기정 옹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트랙을 돌았다.(사진 제공=한국체육인 동우회)
베를린올림픽 제패의 지명도로 손기정만큼 국내외에서 광범위한 교제를 가진 인물도 드물 것이다. 일본 메이지대학 유학시절, 손기정은 ‘동양의 무희’라고 일컬은 최승희(崔承喜)와 가까웠고 일본이 자랑한 세계적인 테너 후지와라 요시에와도 친했다.
8∙15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는 환국하자 한시(漢詩)를 지어 손기정 때문에 세 번 울었다고 읊었다. 한국 청년이 올림픽을 제패했다기에 감격하여 울었고 그가 일제의 포악으로 태평양전쟁터에 내몰려 전사했다고 들어 슬퍼서 울었고 환국하여 그가 내 앞에 나타났기에 기뻐서 울었다는 내용의 것이었다.
이렇듯 손기정은 거물 정치가들과의 교분도 두터웠는데 그들 중 특히 가까웠던 인물은 건국 후 초대 상공부장관을 지낸 임영신(任永信) 여사였다. 그가 손기정을 친히 알게 된 것은 1947년, 미국의 보스턴에서였다. 마라톤 보급회의 우등생, 서윤복(徐潤福)이 그해 4월, 전통의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다. 당시의 감독이 손기정이었고 일행은 보스턴에서 콩나물을 키워 팔던 백남용(白南鏞)이라는 교포집에 합숙소를 차리고 대회에 대비했다.
대회에 하루 앞서 임영신이 합숙소를 찾아 손기정 일행에게 분전하라고 당부했다. 38선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통일 독립은 힘들어 보이니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라도 추진하자고 대UN외교를 펴기 위해 임영신은 뉴욕에서 장면(張勉), 조병옥(趙炳玉) 등과 함께 활동해오던 터였다.
서윤복은 악전고투 끝에 우승을 일궈냈다. 그러자 미지의 나라 ‘코리아’의 서윤복은 하루아침에 유명해지고 그가 머문 백남용의 집엔 동네 백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을 본 백남용은 벌레 씹은 얼굴로 “저 사람들, 어제까지는 내가 인사해도 받지도 않던 친구들입니다.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멸시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던 것이 서선수가 우승하니 이렇게 몰려오는구려”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임영신이 무릎을 치면서 손기정에게 “손선생, 한국에 바로 돌아가지 말고 뉴욕에 먼저 들르고 다음에 한국인들이 사는 곳을 찾아 사기를 올려주고 귀국하세요”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백남용과 같은 어려움은 당시의 임영신도 겪고 있었다.
남한 단독 정부수립의 불가피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아직 소련의 입김이 강한 UN에서는 좀처럼 통하지 않아 고전하고 있는 터였다. 관심을 끌어보려고 파티를 열어도 초청객의 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뉴욕에서 보스턴마라톤 우승의 영웅 환영 파티에 와달라고 하자 불청객까지 몰려들어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개설 이래 가장 성대한 파티가 되어 임영신 등은 외교사명달성에 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이래 손기정과의 사이는 허물없이 가까워졌고 그의 아들, 딸은 모두 임영신이 세운 중앙대학교에서 수학, 졸업했다. 1958년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 마라톤을 우승하는 이창훈(李昌薰)은 손기정의 사위가 되는데 그도 중앙대 졸업생이다. 베를린에서 3위를 한 남승룡의 사위는 이창훈과 동시대 선수인 김연범(金蓮範)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둘은 1960년 로마올림픽에 함께 출전한다.
마라톤 보급회를 운영하다 6∙25를 만난 손기정은 남하하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다 저명인이 겪어야 하는 말 못할 고초를 경험했는데 요행히 고비를 넘겨 특무대 마라톤부의 감독이 됐다. 1950년대의 육군특무부대장은 훗날 불의의 암살을 당하는 김창룡(金昌龍) 소장이다. 그는 특히 축구, 배구, 마라톤 등을 장려했는데 스포츠에 관한한 무소불위의 ‘일류병’자이어서 마라톤부에 내로라하는 육상선수를 모았고 그 우두머리에 손기정을 앉혔다. 손기정 지휘 하에 육군특무부대팀은 1955년에 시작된 부산~서울간 대역전경주를 3연패했다.
만년의 손기정에게 최고 영광의 날은 1988년 9월 17일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열린 최초의 올림픽대회의 개막일. 성화계주의 최종주자는 손기정이었다. 성화봉을 치켜든 그는 온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잠실 주경기장의 트랙을 달려 성화대로 돌진했다. (끝)
SPORTS2.0 제 21호(발행일 10월 16일) 기사
조동표(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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