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대홈페이지 '중앙인문학관' 임하연의 글방 <숲새네 노란벤치>의 작품들을 다시 정리하여 올립니다. <숲새네 노란벤치>
겨울 나비
임 하 연 (시인, 작가)
한밤중이었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 섞어버릴 듯 무섭게 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겨울 날. 외출에서 뼛속까지 언 몸으로 돌아온 나는 따뜻한 잠자리를 파고들었다. 이내 곯아떨어졌지만 심한 갈증을 느끼고 중간에 잠이 깼다. 눈을 반쯤 뜨고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가려는데 문득 예감이 이상했다. 잠을 자고 있는 동안 내 집에 누군가가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젖은 솜처럼 무거운 눈을 억지로 부릅뜨고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그때 내게 보인 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성작가가 선물이라며 설치해 준 비취색 커튼의 세련되고 고아한 자태였다. 그러던 한순간, 내 두 눈은 물고기의 눈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커튼 중간쯤에 장식으로 매달아 놓은 꽃송이 위에서 노란색을 띤 작은 물체가 꼬무락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작은 나비였다!
믿어지지 않아서 안경을 찾아 쓰며 거듭 살폈다. 틀림없었다. 실보다도 가녀린 다리를 애처롭게 곧추세우며 버둥대는 모습이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창밖에서는 매서운 바람이 닥치는 대로 닦달하며 날카로운 손톱을 세워 창문을 할퀴어대는 소리가 어린아이의 미친 절규처럼 어지러웠다. 이 여린 것이 이 광풍을 뚫고 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바람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꼼꼼히 막아놓은 창틀에서 바람에 뜯긴 틈새를 어떻게 찾아냈을까? 이 삭풍 속을 도대체 무슨 힘으로 헤쳐 왔을까? 하늘 아래 수없이 많은 집들 중에서 어쩌다 하필 내 집이란 말인가? 신비로움과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줄을 잇듯 일어났다.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겨울에도 여름철 먹거리와 따듯해야만 사는 곤충을 만날 수 있는 현실이긴 하다. 그래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 밤을 휩쓸고 돌아다니는 바람의 손아귀를 벗어나 내 방으로 오기까지의 불가사의한 여정이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나비를 손바닥에 놓고 찬찬히 살펴보니 알을 벗고 갓 태어난 생명처럼 너무도 약하고 여려 보였다. 어쩌다 이 시간에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나비는 알에서 태어나므로 일찍이 어미와 멀어지는 운명인 줄 알기에, 그날 밤 내 눈에는 아기나비가 너무도 애잔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바닥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번뇌의 파도를 떨치지 못하는 한 여인이, 곤충계의 한 마리 나비와 결코 쉽지 않은 만남으로 그 밤 가슴이 젖고 있는 것은 무슨 인연인가? 실낱같은 애절함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나를 바라보던 부모의 마음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조용한 오열이었다. 안락한 삶을 눈앞에 두고도 사서 고생하는 미운 자식을 보며 부모님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지친 나비가 온몸으로 내게 전해주고 있었다.
칼끝처럼 매서운 추위/ 굳어버린 그 밤/ 그림자인 양 가물가물 스적이는 나래짓/ 꿈 떨치고 등을 밝혀 너를 만났지
세상을 에워 두른 혹독한 동토 넘어/ 고단한 내 거처 성에 덮인 창틈으로/ 잔명이나 데워볼까 찾아든 여린 생명
비칠 듯 얇은 날개 합장하며 떠는 넋아/ 너 하나 스러져도 세상은 무심하련만/ 먼지 같은 네 어미는 슬픈 이슬 삼킬까
네 어미 넋이 씌어 말라붙던 내 가슴/ 나 어느새 내 어머니가 되어/ 너를 나처럼 여기며 목이 메어졌느니 <졸시, 겨울나비>
긴장이 풀려서일까, 한순간 몸서리치듯 날개를 떨던 나비는 그마저도 힘겨운지 이내 동작을 멈추었다. 나비를 유리컵 안에 재우고 나도 옆에 누웠다. 새벽이 가까워지면서 바람소리도 잦아들었다. 아침이 다가오는 여명 속에서, 카메라에 잠든 나비의 가녀린 모습을 담았다.
그날로부터 고작 사흘이 흘렀다. 그리고 그 여린 나비는 내 곁을 떠났다. 나는 한참 동안 비품 상자들을 뒤져 부드러운 화선지를 찾아냈다. 가위로 가를 오리면 끝이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일 것 같아 굳이 손으로 조심조심 뜯어 구름 모양을 둥글게 오린 화선지 위에 날개 접은 작은 나비를 뉘었다. 날개에 포개 여민 화선지를 분갑만 한 알루미늄 약통에 고이 담고 뚜껑 윗면에 매직잉크로 적어주었다. ‘엄마 품에서 단꿈 꾸며 오래 깨지 말아’ 라고.
따스한 봄기운이 땅속을 푹신하게 풀어낸 어느 날이었다. 내 책상 위에서 한 철을 눈 맞춤 하던 나비의 작은 집을 관악산 아래 단풍나무 밑에 터 잡아 묻었다. 이젠 사람들의 발길에 쫓기며 떨거나, 세상의 무서운 소음에 귀 막고 뒤척이지 않아도 될 아늑한 쉼터였다. 나는 산책길을 따라 산에 오르는 날이면 잊지 않고 나만이 알고 있는 작은 유택을 찾아 참배한다. 저 하늘에서도 딸을 사랑하시는 나의 부모님이 나를 내려다보시는 그 마음처럼. 나도 부드럽고 포근한 마음으로 작은 무덤을 쓰다듬고 토닥거리며…….
『월간문학』 수필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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