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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에서 일관됐던 비폭력 저항의 뿌리는 3·1운동에 맞닿아 있다
평화공존 지향이야말로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오늘 한반도에 가장 필요한 지침 


스웨덴 출신 인류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2000)는 퍽 인상적인 책이다. ‘오래된(ancient)+미래(futures)’란 형용모순의 제목부터가 그렇다. 호지는 인도 북부 히말라야의 산골 외진 마을 라다크에서 20여년을 지내면서 주민들의 삶을 기록했다.

특히 1980년대 후반 이후 근대화 물결 속에서 망가져가는 라다크의 아픔, 즉 서구형 개발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한다. 동시에 그는 과거의 라다크, 가난하고 불편했지만 활기가 넘쳤던 모습에서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한다. 과거 회귀나 전통 고수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누구도 불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얘기할 뿐이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다. ‘오래된 미래’를 거론한 까닭이다. 호지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미래를 과거에 근거해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이제 곧 맞을 3·1운동 100년의 과거는 무엇이고 이후 추구돼 왔던 미래는 또 무엇인가. 그저 세월이 쌓여 50주년, 100주년을 맞는 것을 기념한다면 그건 역사에 대한 무례함이다.

3·1운동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선 자주독립을 앞세운 비폭력 저항운동이자 일제 강점기 최초의 범 민중운동으로 평가된다. 비록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으나 결코 실패한 역사가 아니다. 또 역사학계에서는 주권재민을 주창했다는 점을 들어 3·1운동을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기점으로 삼는다. 임시정부가 표방한 자유·민주 공화주의의 전통도 3·1운동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 중대한 의미는 인류공영의 평화정신이다. 어쩌면 이 평화 지향성이야말로 100주년을 맞는 오늘의 한반도에 가장 필요한 지침이 아닐까 싶다. 대립과 분단으로 이어져온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를 위한 진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평화공존은 동아시아 전체의 시대적 요청으로 거론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3·1독립선언서는 독립 염원으로 가득하지만 일제 침략에 대한 울분과 저주는 담고 있지 않다. 참 이해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3·1운동이 나약한 비폭력 독립청원이었고 그런 탓에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친일로 돌아선 훼절자가 나온 게 아닌가 하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이는 역사 자학 행위에 다름 아니다. 관련된 독립선언서 일부를 살펴보자.

“…일본을 믿을 수 없다고 비난하는 게 아니다.…일본의 의리 없음을 탓하지 않겠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도 바쁜 우리에게는 남을 원망할 여유가 없다.…지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이지 남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이 정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는 것인 동시에,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세계평화와 인류 행복의 중요한 부분인 동양평화를 이룰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이 어찌 사소한 감정의 문제인가!….”(‘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

3·1운동의 지향점은 자주독립을 넘어 세계평화에까지 이른다. 감정적인 증오나 저주만으로 어찌 조선의 자주독립과 인류공영을 향한 도도하고 거대한 정의와 인도의 물결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호기로 가득하다. 2016~2017년 촛불시위에서 일관됐던 비폭력 저항의 뿌리가 3·1운동에 맞닿아 있음을 실감한다.

이렇게 보면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가뜩이나 악화된 한·일 관계가 더욱 극단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안팎의 예상은 틀렸다. 일제 강점기에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을 각별하게 기념하는 해에 일본 이슈가 우호적으로 거론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은 3·1운동의 본질을 잘 모르는 지적이다. ‘오래된 미래’로서의 평화공존 지향성을 감안해 실행한다면 3·1운동 100주년은 오히려 한·일 관계의 새 장을 열어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평화공존은 이미 100년 전부터 한반도가 추구해야 하는 과제요 지침으로서 선포됐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길을 좇지 못했다. 남북은 대립하며 전쟁까지 치렀고, 주변국과도 이데올로기 문제로 또는 과거사를 둘러싸고 갈등의 역사를 이어왔다. 반전을 위한 노력이 전혀 없지 않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화해와 공존은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렀다.

독립선언서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세 가지 약속’을 거론하고 마무리한다. 그 내용은 ‘배타적 감정으로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마지막 한순간까지 정당한 뜻을 드러내라’, ‘질서를 존중하고 떳떳하게 임하라’로 요약된다. 이는 지금의 국내 정치 갈등, 남북 문제, 미·일·중을 포함한 주변국들과의 외교 관계 등 모든 분야에서 꼭 명심해야 할 우리의 원칙이다.

3·1운동은 미래의 꿈을 담은 빛나는 과거다.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온다’고 믿었던 조상들의 미래, 아니 오늘 이 시대의 ‘오래된 미래’다. 100년이 지난 지금 ‘오래된 미래’가 실현될 날을 거듭 고대한다.

대기자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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