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약국, 밤에는 공부방으로 변신
영어를 가르치는 시골 약사 김형국씨
성적뿐만 아니라 자존감·희망 찾은 시골 아이들
어둠이 내리면 경남 의령에 있는 부림약국은 동네 아이들의 영어 공부방으로 변신한다. 이름은 ‘오뚝이 공부방’. 김형국 약사가 시골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마음을 먹고 2009년 시작했다. 아이들은 약국에 딸린 작은방으로 모인다. 교재비와 학원비는 없다.
2015년 1기 학생들이 공부방을 졸업했고 지금은 2기 학생들이 공부를 한다.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13명이다.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난 후 공부방에 스스로 찾아온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한다. 김 약사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시간은 오후 8시부터 1시간 정도다. 영어 공부에서 자신감을 얻은 아이들은 국어·수학 등 다른 과목 성적도 올랐다.
김 약사는 1996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불혹을 넘겨 타국 생활을 시작한 그는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도 말하지도 못해 애를 먹었다. 한국어와 영어의 발성법이 다르다는 점을 깨닫고, ‘의성어식 발성법’이라는 자신만의 영어 학습법을 만들었다. 한국에 돌아와 공부방을 열었다. 최근 ‘나는 영어를 가르치는 시골 약사입니다’라는 영어 공부법에 관한 책도 냈다. 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약사가 된 이유와 오뚝이 공부방에 대해 물었다.
◇오뚝이 공부방의 비결 ‘오뚝이처럼’
오뚝이 공부방이 소문나자 사람들은 김 약사에게 비결을 묻는다. “특별한 교재를 쓰거나 특수한 교육법이 있는 건 아닙니다. 아이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부방에 와서 공부합니다. 오뚝이가 넘어져도 계속 일어나지 않습니까. 오뚝이처럼 힘들어도 굴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꾸준하게 여러번 반복할 뿐입니다.”
공부방 철칙은 ‘스스로 하는 오뚝이 정신’이다. 김 약사가 매일 해야 하는 공부량을 정해주면 아이들은 스스로 단어를 외우고 영어 동화책을 읽는다. 모르는 게 있으면 서로 물어보고 가르쳐준다. 아이들이 알아서 한다고 두루뭉술하게 대충 가르치는 공부방이 아니다. ‘어휘 외우기’와 ‘말하기’ 두 가지가 핵심이다. 우선 공부방에 들어오려면 영어 동사 1000개를 외워야 한다. 동사 3단 변화까지 외워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3000개에 가까운 단어를 외우는 셈이다.
1단계-2단계-3단계로 나누어 학습한다. 나이에 따라 나눈 단계가 아니다. 공부방에 처음 들어오면 1단계다. 중학교 과정 어휘를 모두 외우면 2단계, 고3 어휘까지 외우면 3단계다. “1단계 아이들에게는 문장 하나를 20번씩 써오라고 합니다. 2단계 아이들은 한 문장을 의문문-부정문-과거형 등 6시제로 응용해 씁니다. 3단계 아이들은 진행형-완료형-현재완료형 등 12시제를 씁니다.”
김 약사가 유학 시절 연구한 ‘의성어식 공부법’으로 말하기를 공부한다. 눈으로만 읽지 않고 복식호흡을 하면서 소리 내어 읽는다. 마치 기합 소리처럼 단어 하나하나 앞에 힘을 주어 읽는다. 언뜻 들으면 '얍', '쿵', '킥'같은 의성어로 들린다. “태권도 기합을 넣거나 군가를 부를 때 입으로만 소리를 내지 않고 배에 힘을 줘 소리 냅니다. ‘쾅’ 소리를 입으로 낸다고 생각하면서 각 단어를 끊어 읽습니다. 처음에는 느리게 읽다가 속도를 점점 빨리해 읽습니다.”
불시에 시험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시험이 경쟁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험을 보기 전 김 약사가 “왜 시험을 보는 걸까”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모르는 것이 뭔지 알기 위해서요”라고 답한다. 채점도 아이들이 스스로 한다. 경쟁이 없기 때문에 커닝을 하지 않는다. 김 약사는 못한다고 야단을 치거나 혼내지 않는다. 대신 틀린 것은 반드시 다시 외워 완벽하게 이해하도록 한다.
아이들의 영어 실력은 오뚝이 정신이 몸에 밴 결과다. “아이들이 한 전화 영어 회사에서 하는 레벨테스트를 본 적이 있습니다. 대학 나온 직장인들이 대상인 테스트입니다. 중학교 2학년인 유빈이가 평균 이상이었습니다. 대부분 아이들도 평균이었어요.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이 정도면 유의미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법만이 아니라 가치관을 배우는 곳
중앙대 약학대를 졸업한 김 약사는 캐나다에서 공부하는 큰아들을 위해 이민을 결심했다. 당시 미국에서 한의학이 주목받고 있을 때라 한의사가 유망하다고 생각했다. 1996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사우스 베일로 한의대에 입학했다.
영어의 벽은 높았다. “영어로 된 한의학 전공 서적을 보며 수업을 들어야 했어요. 실제 환자를 돌보는 임상 인턴 시기에는 영어로 진찰하고 차트를 작성해야 했습니다. 영어로 면허시험을 봐야 했고 영주권을 받기 위한 인터뷰도 해야 했어요. 누구보다 영어를 잘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잘 해야만 했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큰 아들과 현지인들을 보니 영어는 한국어와 발성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영어로 말할 때는 우리말을 할 때보다 묵직하게 들렸습니다. 억양도 우리말보다 변화가 컸어요. 영어는 강세 언어이고 우리말은 음절 언어입니다. 소리 내는 법이 다르면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오뚝이 공부방 아이들이 하듯 틈나는 대로 말하기를 연습했다.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고 말도 트였다. 영어 공부에 대한 각종 논문을 섭렵했다. 자신만의 공부법인 ‘의성어식 발성법’을 만들었다.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2005년 한국에 돌아왔다. 약국을 운영하다 보니 생각보다 시골과 도시의 교육격차가 심하다는 걸 알았다. “동네에 인문계고가 없습니다. 아직 농사를 짓는 집도 많았어요. 보습학원을 빼고는 이렇다 할 학원도 없습니다. 저는 마산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영어 공부로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첫 제자는 중학교 1학년이던 김홍식씨다. 매일 약국에 아버지의 약을 처방받으러 오는 단골손님이었다. 아버지가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형편이 어려웠다. 공부보다는 농사일에 더 익숙한 아이였다. ‘함께 공부하자’는 김 약사의 제안을 처음엔 거절했다가, 홍식씨 아버지가 그를 설득했다. 머지않아 홍식씨의 친구 공홍모씨도 합류했다.
학교가 끝나면 공부방으로 와서 숙제를 하고 자율학습을 했다. 저녁에는 김 약사가 공부를 가르쳤다. 토요일에는 김 약사 집에서 집중 학습을 했다. 그는 매일 아이들에게 '네가 원하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조금씩 성적이 오르더니 고등학교에서는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특성화고 학생이지만 인문계 학생들과 겨루는 영어 모의고사에서 1등급을 놓친 적이 없다. 전국 영어 대회에 나가 우수한 성적을 냈다. 홍모씨는 전교 5등 안에 들었다. 두 사람의 성적이 오르자 오뚝이 공부방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오뚝이 아이들에게 칭찬과 용기를
홍식씨는 2013년 고2 때 KBS ‘스카우트’ 방송에서 우승해 일찍이 여행사 취업에 성공했다. 최근 군대를 다녀와 담배 회사로 이직했다. 홍식씨는 ‘사부’라고 부르는 김 약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부님이 가르쳐주신 건 공부법만이 아닙니다. 힘든 시절 올바른 가치관과 자존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틈날 때마다 공부하는 사부님을 보며 시간의 중요성을 배웠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유명한 사람보다 유익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잊지 않겠습니다.”
다른 1기생들도 사회에 진출하거나 대학에 진학했다.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김 약사도 성장했다.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더이상 아마추어일 수 없어 교육학을 공부했다. 2015년 경남대 영어교육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오뚝이 공부방 2기 문을 연 학생은 최유빈양이다. 영재 소리를 듣는 동생 원빈이에게 밀려 잔뜩 움추려 있던 아이였다. 유빈양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오뚝이 공부방에 들어왔다.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김 약사 덕분에 유빈양은 자신감을 얻었다. 활발한 성격으로 변했고 지금은 매년 교내영어경시대회에서 상을 받는다. 최근 기말고사에서는 전교 1등을 했다.
최유빈·원빈 어머니 김정리씨는 “약사님은 부모들에게는 육아 멘토”라며 “학원에 자주 가고, 과외나 학습지를 많이 하면 될 줄 알았지 유빈이와 원빈이의 차이점을 보려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유빈이는 느리지만 꾸준히 하는 거북이이고, 원빈이는 다재다능한 토끼라고 약사님이 말씀하셨다. 서로 다른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한다. 또 (나도) 아이들이 공부하는 책을 함께 보면서 공부한다”고 설명했다.
김 약사는 자신보다 공부방 아이들을 주목해달라 했다. “공부는 아이들이 스스로 합니다. 저는 동기만 줬을 뿐이에요. 아이들이 따라오지 않았으면 공부방도 없었을 겁니다. 저보다는 아이들에게 한마디씩 용기를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