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들이 그리는 자화상>울음보다 강한 웃음 |
〈29〉김종광 ‘불혹의 나’ |
내 얼굴은 진지하다기보다는 멍청해 보이고 대단한 것을 고뇌한다기보다는
삼불혹(술ㆍ여자ㆍ재물)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반년 후면 마흔살, 마흔이 4대강처럼 두렵다.
더 웃기는 소설을 써야겠다.
위로 받아서 웃고 깨쳐서 웃는 그런 소설을…
얼떨결에 불혹을 눈앞에 뒀다. 내 얼굴 괴발개발 그리며 되짚으니, 생전 처음 그려보는 게 아니다. 청소년시절에 내 얼굴이 무슨 원수 표적인 양 그려놓고 볼펜으로 찍어대는 빙충맞은 짓을 일삼았던 듯싶다. 습작 시절에 되우 써도 늘지 않는 문장실력과 되우 읽어도 늘지 않는 소갈머리를 한탄하며 내 얼굴 그려놓고 빨간색으로 난도질하기도 했던 듯싶다.
![]() |
이왕이면 웃는 얼굴을 그려보려고 했다. ‘너는 웃는 얼굴이 참 예쁘다’고 말해준 분들이 많았다. 칭찬 같아서 은근히 듣기에 좋기는 했는데 어깃장 놓는 생각으로 너는 진지하거나 우울한 표정 짓고 있으면 보는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얼굴이란 소리 같기도 했다. 주제 넘게도 벌써 소설책을 열권이나 냈는데 덕분에 사진 찍힐 일이 많았다. 사진 찍는 분들이 수십 방 찍은 뒤 최종 선택해 지면에 내보내는 사진도 결국엔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진지하게 작품을 구상하거나 고뇌하는 얼굴은 몇 번 찍더니, “역시 웃는 게 잘 받네요!’하고 계속 웃는 얼굴만 요구하고는 했다.
웃지 않는 내 얼굴 사진은 보기 안쓰러운 측면이 있다. 긍정적으로 봐주면 짜증과 울화와 노기와 불만에 가득 차 있으니 젊은이답게 패기가 넘쳐흐르는 것 같다는 흰소리라도 갖다 붙이겠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보면 진지하다기보다는 멍청해 보이고 대단한 것을 고뇌한다기보다는 삼불혹(三不惑ㆍ혹하여 빠지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술, 여자, 재물을 이른다)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스스로 사람들과 있을 때 웃지 않고 있으면 죄스럽고 독자에게 뵐 사진 한 장이라도 웃고 있는 게 아니면 겁난다. 낙서 말고 폼 잡고는 첨 그려보는 터수에, 제 얼굴에 웃음까지 담아내려니 이것 참 쉽지가 않다.
요새 자꾸만 괴란쩍다. 선배들이 마흔 살 앞두고 방정 요란하게들 티내는 것 보면서,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했었는데, 역시 사람은 지가 닥쳐봐야 아나 보다. 나도 반년만 더 먹으면 마흔 살인데, 마흔 살이 4대강처럼 두렵다. 사실 불혹의 경지는 꿈도 꾸지 않는다. 나 같은 소심한 것이 무슨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는 경지를 이루겠는가. 아니, 미혹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소설가니까.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도를 닦아 도인이 되었다는 소리 아닌가. 도인이 되면 참으로 잡스러운 소설 따위는 쓸래야 쓸 수 없을 거라는 게 나의 짐작이다.
내 소설쓰기가 먹고 사는 일, 그 이상이 될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 이상’에 해당하는 것이 그냥 소설이 아니고 ‘좋은’ 소설이라는 것인데, 솔직히 ‘좋은 소설’이 무엇인지 이젠 자신이 없다. 소설을 꿈꾸고 공부하던 이십대 때는 알았다. 소설가가 되는데 성공해서 나름 어쭙지 않게 소설가 행세를 해온 삼십대에는, 여전히 소설을 꿈꾸고 공부하고 있지만, 잘 모르겠다. 대관절 좋은 소설이란 무엇인가? 독자는 안 읽어주고 평론가는 몰라주고 나만 잘났다고 욱대기는 소설이 무슨 좋은 소설일 수 있는가? 자위 소설이지. 아무래도 ‘좋은’이라는 종잡을 수 없는 수식어를 조금은 구체적인 것으로 바꿔야겠다.
‘웃기는’이 좋겠다. 이제까지도 웃기는 소설을 써왔지만, 내 웃음과 독자의 웃음이 상통하지 못한 듯 내 소설에 웃는 독자가 드물었으나, 불구하고 더욱 웃기는 소설을 써야겠다. 절로 웃을 수밖에 없는 소설. 위로 받아서 웃고, 짠해서 웃고, 기가 막혀 웃고, 분해서 웃고, 절묘해서 웃고, 깨쳐서 웃는, 가진 자들의 체제와 권력에 대하여 날이 바짝 서 있으면서도 울음보다 강한 웃음기를 머금은 그런 웃기는 소설.
나의 미혹을 애증한다. 내가 웃기는 소설에 대한 미혹을 집어치우는 순간, 그러니까 불혹의 경지에 다다르는 순간, 무슨 활기로 견디겠느냔 말이다. 다짐 삼아 얼밋얼밋 그려진 웃는 내 얼굴 보고 주문을 읊어본다. 웃어라, 내 얼굴! 웃어라, 내 소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