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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가 황재형
탄광촌을 그리기 위해 화가 황재형(55)은 아예 탄광촌으로 이사를 갔다. 1983년부터 24년째, 강원도 태백시의 주민이 되어서 그곳 사람과 풍경을 그렸다. 그가 16년 만에 개인전 ‘쥘 흙과 뉠 땅’(1월 6일까지 가나아트 갤러리·02-720-1020)을 열고 있다. 한밤에 통근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부터 을씨년스럽게 변해 가는 폐광지역 모습까지, 탄광촌의 무채색 정서가 섬뜩할 정도로 리얼하게 담겼다.
서울대 정영목 교수는 황재형의 작품에 대해 “우리 미술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진정한 리얼리즘”이라 평가했다. 우리미술은 일제시대를 겪으며 겸재와 단원의 사실주의 전통이 단절됐고, 광복 이후엔 서양미술 영향으로 추상회화가 대세였다. 1970년대 이후 리얼리즘이 유행했으나 대상의 극사실 묘사에 집착했기에 엄격한 의미의 리얼리즘은 아니라는 것이다. 1980년대의 민중미술은 정작 표현방법은 비사실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탄광촌의 삶을 소재면에서나 표현방법에서나 사실적으로 담아낸 황재형의 작품은 리얼리즘 회화의 본령으로 평가 받는다.
“브레히트가 그랬죠, 시대가 진실을 가리고 은폐할 때 예술가는 그것을 까 보여줘야 할 임무가 있다고.” 황재형이 까 보이고 싶은 진실은 ‘땀 흘리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였다. 노동 현장을 그렸기에 민중미술 화가로 불리지만 그의 그림에 정치적 색채는 없다. 사람의 냄새만 짙다. 하지만 진실을 그리기 위해 꼭 탄광으로 몸소 들어가 살아야 했을까?
“1980년대 초까지는 한두 달씩 단기간 광부로 일을 하면서 체험을 했어요. 어느 날 한 광부의 집에서 같이 라면을 끓여 먹게 됐지요. 그런데 아내는 도망을 가서 없고 아이들만 나뒹구는 집 마루에서 고춧가루 때가 낀 밥상에 차려준 라면을 먹으려니 갑자기 토역질이 나는 거예요. 아, 나는 여전히 관찰자일 뿐이구나, 그때 깨달았어요.”
- ▲ 캔버스 위에 이쑤시개를 붙이고 그 위에 석탄가루를 개어 발라 그린 황재형의‘기다리는 사람들’(74×117.5㎝·1990년작). 한밤에 탄광촌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나아트갤러리 제공
그래서 1983년에 짐을 싸서 가족과 함께 태백으로 이사를 했다. 24년 동안 얻은 것은 “나를 실현한 것”, 잃은 것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장성해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아들(26)과 고3 딸에게는 늘 미안했다. “좀더 좋은 교육환경을 주지 못해 마음 아파요. 하지만 진정 탄광촌 사람이 되려면 그들의 교육환경 고민도 함께 안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이런 치열함은 그의 그림 소재에서도 볼 수 있다. 석탄, 황토, 백토 등을 개서 발랐기에 질감이 진진하게 표현됐다. “재료의 물성(物性)이 탄광촌 삶의 진실을 드러내기 좋거든요. 생선비늘처럼 반짝거리는 석탄은 탄광의 빛깔을 그대로 보여줘요.”
그는 직접 광부로도 일을 했고, 마을 장애 어린이들과 교사들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지금도 연 2회씩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전국의 미술교사 30~40명을 모아 놓고 ‘그림 바로 알기’라는 지도자 교육을 하고 있다.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 세상에 참여하는 그에게 지인인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도록에 쓴 글을 통해 “현장을 택한 화가”라는 딱 어울리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황재형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강요배, 민정기, 임옥상 등과 함께 1980년대 민중미술을 이끌었다. ‘현실과 발언’과 함께 민중미술의 중요한 그룹 중 하나였던 ‘임술년(壬戌年)’을 1982년에 조직했던 그는 탄광촌 삶에 직접 뛰어들기 위해 1983년 태백으로 들어가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 때문에 대중에 노출이 덜 됐지만, 관찰자로 그린 화가들과는 남다르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탄광은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을 극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게 탄광을 택한 그의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