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인터뷰는 2011년 10월 중대신문 인터뷰 '중대신문이 만난 사람'에서 전재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서른 살이 지나면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안정을 찾을까 고민한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쫓기고 현실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겁 없는 한 사람이 있다. 바늘 구멍 뚫기도 어렵다는 신의 직장을 포기하고 야생의 길로 뛰어들었다. 거친 세상을 모험하고 있는 불혹(不惑)의 김성주다.
인터뷰를 위해 찾은 상암동의 한 스튜디오. 촬영이 아직 한창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넓은 무대에 홀로 앉아 카메라와 교감하고 있는 낯익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손짓 하나, 말 한마디에도 진중함이 묻어났다. 바쁜 일정에 몸살이 났다고 들었는데 힘든 기색 하나 없다.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단박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너무 행복하기만 하단다. 말을 하면서도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김성주 이 남자, 웃음에 헤프다.
슈퍼스타K, 기적을 노래하다
- 아무래도 요즘 이슈는 단연 슈퍼스타K다. 탈락자와 합격자를 발표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는데 어깨가 무겁겠다
생방송이기 때문에 더 부담된다. 현장에는 관객 4000명이 앉아 있다. 만약 실수를 한다고 해도 다시 찍을 수 없고, 잘못 뱉은 말은 돌이킬 수도 없다. 경쟁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중립적으로 진행을 해야 하고 더불어 재미도 줘야 한다. 시청자들의 긴장감도 쥐락펴락 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것저것 신경 써야할 게 많다. 만만한 프로그램은 아니다.
- 슈퍼스타K는 케이블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케이블이 가진 한계를 부수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시즌1부터 함께하고 있는 김성주에게 슈퍼스타K는 특별한 의미일 것 같다
공중파에 입성하기 전에 케이블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프리를 선언하고 케이블에서 일하게 됐을 때 부담은 없었다. 대신 케이블의 한계인 ‘공중파만큼 주목받지 못한다’는 점, 그래서 프로그램이 선정적이고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극복해야 했다. 다행히 슈퍼스타K를 만나고 나의 능력과 가능성을 새롭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정확한 판단, 신뢰, 재미를 한꺼번에 줄 수 있는 MC는 누가 있을까’하고 생각해봤을 때 그런 쪽에서 내가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다. 또 슈퍼스타K 덕분에 사람들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케이블 방송에서도 대박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구나’하는 꿈 말이다. 기존에는 케이블 방송이 공중파 방송을 따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공중파에서 케이블 방송을 따라하니 자부심이 대단하다.
- 예능은 적성에 잘 맞는 편인가
예능 프로 어렵다. 하지만 개그 DNA는 있는 것 같다(웃음). 예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보니 나는 예능의 고수들에게 상대가 안됐다. 백전백패였다. 처음 시작할 때 ‘나도 웃겨야 되나, 까불어야 하나’ 하는 압박도 있었다. 그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빨리 찾아야 했다. 그게 너무 힘들었다. 사실 지금도 크게 자신은 없다. 배워가는 과정이다.
지금은 캐스팅이 들어오는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개그맨 출신 진행자들이 하면 의심이 들 수 있지만 내가 하면 믿을 수 있다는 점을 시청자들은 원했던 것 같다. 화성인 바이러스를 진행할 때도 이경규씨와 김구라씨가 웃겨주면 내가 중간에서 무게를 잡아주는 식이고. 지금은 ‘무조건 웃겨야지’ 이런 생각보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면서 동시에 신뢰를 주고 싶다. ‘김성주가 진행하면 믿을 수 있다’하는 신뢰를.
아나운서 시험 7번의 낙방,
김성주를 만든 장본인
- 사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아나운서 시험에 7번이나 낙방하기도 했고. 그런 어려운 시절을 거쳐 MBC의 간판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때 돌연 ‘프리’를 선언했다.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나
주로 메인뉴스 진행은 기자 출신의 아나운서가 많이 했다. 순수 아나운서 출신이 할 수 있는 뉴스나 일이 정해져 있었고 거기서 한계를 느꼈다. ‘내가 이 조직에서 정년 때까지 어떻게 보내야 하나’ 하는 고민도 있었고.
2000년에 입사해서 불과 7년 만에 회사를 나왔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나를 아끼던 주변 분들은 ‘아직 이르다, 더 배우고 나가라’며 말렸다. 사실 그때의 나는 약간 교만했던 것 같다. 자신감도 있었고, 내가 여기서 더 배울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뉴스도 해봤고 교양프로, 라디오DJ, 예능프로, 스포츠 중계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니까.
거기서 내가 더 할 수 있었던 건 아나운서 국장이 돼서 조직을 관리하는 일 밖에 없었다. 하지만 관리자보다 무대 위, 카메라 앞에서 방송을 하고 싶은 욕심이 더 많았다. 회사를 등지고 나올 때 두려움은 없었다. 근데 막상 나와 보니까 두렵더라. 어디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한 곳에 정체되어 안주하는 것 보다 차라리 모험적인 삶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신문사 기자를 꿈꾸던 평범한 대학생
천직을 찾기까지
- 우연히 치른 아나운서 시험에서 800:1의 경쟁률을 뚫고 최후 5인까지 남았다. 어떻게 보면 아나운서에 천부적인 재능도 있는 것 같은데
원래 대학시절 꿈은 신문사 기자였다. 정경대 편집부장을 맡아서 논문집을 내는 일도 해보고 학술부장도 하면서 신문사 기자에 대한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아나운서 지원서를 넣었다. 아무 준비없이 했는데 최종심까지나 갔다. 어떻게 보면 운명인 것 같기도 하다. 신기했다.
그렇게 처음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접하고 실제 아나운서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케이블 방송을 전전하면서 힘든 스케줄을 소화할 때도 육체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재미 있었다. TV에 잠깐씩 나오는 내 모습이 너무 좋았고 돈을 많이 못 벌어도 행복했다. 지금도 그렇다.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 방송을 하면서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고 수다도 떨었는데 돈도 주고. 얼마나 좋나(웃음).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이 이 일이 맞는 것 같긴 하다.
- 대학시절 과대표도 했다고 들었는데 적극적인 학생이었나
우리 때는 대학교 3학년 때 수학여행을 꼭 가야 했다. 그 당시 우리 과 대부분이 남자였다. 90%이상이 남자였고 과에 여자라곤 3명밖에 없어서 무조건 여대와 조인트를 해야 했다. 그래서 내가 과대표로 뽑혔고(웃음). 그렇게 해서 덕성여대 경영학과 학생들과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학부생 때 나는 적극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학점에 신경을 많이 썼고 대학이라는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중대신문사에도 지원할까 고민한 적도 있다.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공간에서 왜 학점만 따려고 노력했는 지 후회가 남는다.
특히 91학번 세대는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많이 방황했다. 학생운동이 절정에 이르던 때가 80년도 후반이었는데 우리 때까지도 학생운동이 심했다. 93년에는 학생운동이 사라져 가고 대학생의 사고, 문화가 바뀌는 과도기였다. 가치관의 혼란을 많이 겪었다. 서로 생각이 다른 친구들도 많았고 정치외교학과이다 보니까 수업시간에 정치적인 발언, 궤변도 많이 했다. 또 우리가 졸업할 때는 IMF가 터졌다. 취업이 너무 어려워졌다. 이도저도 아닌 과도기에서 많이 힘들었다.
- 최근 한 방송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1992년으로 꼽았다. 어떤 의미가 있나
내가 제대한 해이다. 처음에는 신입생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려면 군대를 다시 가야 하더라(웃음). 그래서 제대한 직후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면 내가 원하는 꿈을 향해 지름길로 빨리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야 사는 방법을 좀 알 것 같다.
- 그렇다면 김성주의 현재 목표는 무엇인가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 나는 쓰일 수 있을까’ 계속 생각하는 중이다. 대학 졸업을 앞둔 학생처럼 아직도 혼란스럽다(웃음). 사실 뭘 해야 되겠다는 구체적인 생각은 없다. 뭘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져도 막상 해보면 안되는 일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고 벌써 포기한 것도 몇 가지된다.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서서히 보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방송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악착같이 하고 45살에는 내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하고 싶다. 나는 아직도 꿈꾸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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