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경제78) 칼럼] 사회변혁 열기가 종교개혁 불렀다
“개혁의 기운은 이미 무르익어… 교회와 사회 두 영역에서 함께 진행돼야”
국민일보
입력 : 2016-10-23
“독일 농민은 뿔 없는 암소, 씨를 뿌려도 수확물은 사제들의 몫일 뿐.” 16세기 독일 농민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로마의 암소’ 같은 존재로 비하하면서 아픔을 노래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통일국가를 이뤄 자국 내 교회령에 대한 교황청의 정치·재정적 압박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일은 300여개의 영방(領邦)으로 쪼개져 있었기에 로마의 압력에 취약했고, 교황은 이전보다 더 집요하게 독일 농민을 수탈 대상으로 삼았다.
교황 레오 10세는 교회령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한편 더 많은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다.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배경이다. 사실 중세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한 움직임은 이전에도 있었다. 전(前)종교개혁으로 불리는 14세기 영국의 존 위클리프, 15세기 체코의 얀 후스 등도 ‘오직 성경으로’를 앞세운 마르틴 루터의 주장과 비슷했지만 시대적 변화기운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수탈에 반발하는 민중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결탁에 반발하는 독일 영방영주들, 드디어 현실은 변혁의 열기로 충만했다. 그때 가톨릭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나왔다. 그 주장이 변혁의 논거가 되면서 혁명적 기세가 전 유럽을 휩쓸었다.
루터의 주장은 흔히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요약된다. 그것은 성(聖)과 속(俗)의 반전을 뜻한다. 성직자와 수도원에만 맡겨두는 가톨릭의 격리된 거룩 추구를 넘어서 생활 속에서 일상적으로 거룩을 실행하라는 주장이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팎에서 언제나 일상의 성화(聖化)를 이루자는 얘기다.
독일 작센지방의 향토사학자 칼하인츠 브라슈케는 종교개혁 450주년을 기념해 내놓은 저서 ‘루터시대의 작센-종교개혁의 사회·경제·문화사’(1970) 서문에서 종종 일반인들이 종교개혁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단지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거나,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변혁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개혁이 교회 내부의 문제로써만 시작된 것이 아니며, 그럼에도 그것이 교회를 끊임없이 개혁해가는 시작점이 됐다는 점에 주목한다.
사실 종교개혁이 성과를 낼 때까지는 무수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예컨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 공존하게 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조약도 어디까지나 영주들의 종교적 자유를 허락한 것에 불과했다. 일반 민중들은 지배 영주에 종속된 존재에 불과했다. 당초 독일 농민들이 바랐던 개개인의 권리가 관철될 때까지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럼에도 종교개혁을 중시하는 것은 개혁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도 매년 10월 31일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킨다. 개혁의 의미가 해마다 달라질 리는 없지만 올해는 조금 각별하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그날 국민일보와 CBS는 각 교단들과 더불어 대대적인 개혁 캠페인을 시작한다. 슬로건도 ‘나부터 ∼’로 정했다.
중요한 것은 개혁의 실행이지만 ‘나부터∼’는 좀 아쉽다. 정확하게는 ‘성직자부터∼’ 혹은 교회의 주요 직책을 맡은 목사 장로 권사를 포함한 ‘중직자부터∼’로 했으면 더 좋았겠다. 종교개혁의 배경은 교회와 성직자들의 일탈 때문이었지 민중 탓이 아니지 않았나.
분명 개혁의 기운은 무르익었다. 얼마 전 한 공직자가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고 지적할 정도이고 보면 한국에서도 ‘로마의 암소’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듯싶다. 게다가 일부 성직자들을 포함한 사회의 상층 엘리트층의 끝없는 일탈은 이미 극에 이를 정도가 아닌가. 개혁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개혁은 교회와 사회 두 영역에서 함께 진행돼야 한다.
조용래(경제78) 편집인 jubilee@kmib.co.kr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통일국가를 이뤄 자국 내 교회령에 대한 교황청의 정치·재정적 압박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일은 300여개의 영방(領邦)으로 쪼개져 있었기에 로마의 압력에 취약했고, 교황은 이전보다 더 집요하게 독일 농민을 수탈 대상으로 삼았다.
교황 레오 10세는 교회령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한편 더 많은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다.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배경이다. 사실 중세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한 움직임은 이전에도 있었다. 전(前)종교개혁으로 불리는 14세기 영국의 존 위클리프, 15세기 체코의 얀 후스 등도 ‘오직 성경으로’를 앞세운 마르틴 루터의 주장과 비슷했지만 시대적 변화기운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수탈에 반발하는 민중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결탁에 반발하는 독일 영방영주들, 드디어 현실은 변혁의 열기로 충만했다. 그때 가톨릭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나왔다. 그 주장이 변혁의 논거가 되면서 혁명적 기세가 전 유럽을 휩쓸었다.
루터의 주장은 흔히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요약된다. 그것은 성(聖)과 속(俗)의 반전을 뜻한다. 성직자와 수도원에만 맡겨두는 가톨릭의 격리된 거룩 추구를 넘어서 생활 속에서 일상적으로 거룩을 실행하라는 주장이다.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안팎에서 언제나 일상의 성화(聖化)를 이루자는 얘기다.
독일 작센지방의 향토사학자 칼하인츠 브라슈케는 종교개혁 450주년을 기념해 내놓은 저서 ‘루터시대의 작센-종교개혁의 사회·경제·문화사’(1970) 서문에서 종종 일반인들이 종교개혁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단지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거나,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변혁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개혁이 교회 내부의 문제로써만 시작된 것이 아니며, 그럼에도 그것이 교회를 끊임없이 개혁해가는 시작점이 됐다는 점에 주목한다.
사실 종교개혁이 성과를 낼 때까지는 무수한 시행착오가 있었다. 예컨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이 공존하게 된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조약도 어디까지나 영주들의 종교적 자유를 허락한 것에 불과했다. 일반 민중들은 지배 영주에 종속된 존재에 불과했다. 당초 독일 농민들이 바랐던 개개인의 권리가 관철될 때까지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럼에도 종교개혁을 중시하는 것은 개혁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도 매년 10월 31일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킨다. 개혁의 의미가 해마다 달라질 리는 없지만 올해는 조금 각별하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그날 국민일보와 CBS는 각 교단들과 더불어 대대적인 개혁 캠페인을 시작한다. 슬로건도 ‘나부터 ∼’로 정했다.
중요한 것은 개혁의 실행이지만 ‘나부터∼’는 좀 아쉽다. 정확하게는 ‘성직자부터∼’ 혹은 교회의 주요 직책을 맡은 목사 장로 권사를 포함한 ‘중직자부터∼’로 했으면 더 좋았겠다. 종교개혁의 배경은 교회와 성직자들의 일탈 때문이었지 민중 탓이 아니지 않았나.
분명 개혁의 기운은 무르익었다. 얼마 전 한 공직자가 ‘민중은 개·돼지와 같다’고 지적할 정도이고 보면 한국에서도 ‘로마의 암소’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듯싶다. 게다가 일부 성직자들을 포함한 사회의 상층 엘리트층의 끝없는 일탈은 이미 극에 이를 정도가 아닌가. 개혁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개혁은 교회와 사회 두 영역에서 함께 진행돼야 한다.
조용래(경제78) 편집인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