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경제78) 칼럼] 歸省, 다시 시작하기 위해 돌아가는 것
“남북관계가 최악일지라도 우리는 다시 돌아가 살피고 새로 시작할 계기 찾아야”
입력 : 2016-09-11 17:57
긴 추석연휴를 앞뒀는데도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북한이 지난 1월에 이어 또 핵실험을 벌인 뒤끝인지라 넉넉함은 고사하고 불안감을 감추기 어렵다. 그나마 만연된 안보불감증 덕분(?)에 별 혼란은 없었으나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벌써 무너져 내리고 있다.
게다가 경기 침체 탓에 추석 상여금을 주겠다는 기업도 작년보다 줄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조사 대상기업 상위 373곳 중 30%가량은 상여금 지급계획조차 없다. 이런 경우도 보너스는 고사하고 월급이라도 제때 받았으면 하는 이들, 아니 월급이나마 받게 일자리를 달라는 이들에는 배부른 얘기다. 명절이 더 서러운 사람들, 마음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귀성(歸省)을 계획한다. 국토교통부는 올 귀성인파가 3752만명으로 작년보다 조금 늘 것이라고 한다. 이런 모양 저런 처지로 힘들지만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는 점은 퍽 다행이다. 귀성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귀성’은 ‘귀향’과 좀 다르다. 귀성은 ‘귀(歸·돌아가다)+성(省·살피다)’인데, ‘돌아가 살피는’ 대상은 부모님과 조상님이다. 귀성의 핵심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귀향에 있지 않고 고향에 계신 부모·조상님의 안위를 살피는 것이다. 또한 귀향이 돌아온다는 데 초점을 둔 것이라면 귀성은 일시적인 귀향 이후 곧바로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돌아가 살피고 다시 돌아오는 귀성 행위에는 비장함이 담겼다. 그것은 마치 다시 돌아가 자신이 맡아야 할 일들, 피하고 싶지만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을 위해 준비하는 의식(儀式)과도 같다. 그 밑바탕에는 너무 멀리 흘러가버린 자신에 대한 돌아봄을 전제해야 한다. 어쩌면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처지를 위해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기최면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우리는 참 멀리 와 있다.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사회적·국가적인 틀에서든 초심을 잃고 아주 먼 곳으로 온 듯하다. 소녀·소년시절 배웠던 ‘나보다 우리’의 기억들은 아스라이 사라졌고, 배려와 공감을 중시해야 한다던 사회와 국가는 새로운 것을 좇는 데 여념이 없고 애오라지 권력과 금력의 향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이번 추석 귀성은 오래 잊고 지냈던 우리의 첫 마음을 다시 새겨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기를 쓰고 고향길을 재촉하는 것이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 위한 첫걸음이라면 그에 걸맞은 의식의 환기(喚起)로도 이어졌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오랫동안 우리의 삶과 현장에 매몰돼 있는 가치들을 다시 끌어내서 먼지를 털고 반듯하게 각을 잡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좋겠다.
남북관계도 너무 멀리 와버렸다. 돌아가야 할 텐데 극단이 거듭되다 보니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다. 분명한 것은 북한의 5차 핵실험 도발에 대해 군사적인 대응만을 추구한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뿐이라는 점이다.
도발 대응태세를 확고하게 구축하는 일 이상으로 남북 공존, 나아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방안도 꼭 점검해야 한다. 남북관계가 최악일지라도 우리는 돌아가 살피고 새로 시작할 계기를 찾아야 맞다.
성서는 일관되게 돌아오라고 가르친다. ‘탕자의 비유’를 담아낸 애창 찬송가 ‘어서 돌아오오’(전영택 시·박재훈 곡)의 호소도 같은 맥락이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2절)
올 추석에 우리는 반드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자면 그 길밖에 없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게다가 경기 침체 탓에 추석 상여금을 주겠다는 기업도 작년보다 줄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조사 대상기업 상위 373곳 중 30%가량은 상여금 지급계획조차 없다. 이런 경우도 보너스는 고사하고 월급이라도 제때 받았으면 하는 이들, 아니 월급이나마 받게 일자리를 달라는 이들에는 배부른 얘기다. 명절이 더 서러운 사람들, 마음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귀성(歸省)을 계획한다. 국토교통부는 올 귀성인파가 3752만명으로 작년보다 조금 늘 것이라고 한다. 이런 모양 저런 처지로 힘들지만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는 점은 퍽 다행이다. 귀성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귀성’은 ‘귀향’과 좀 다르다. 귀성은 ‘귀(歸·돌아가다)+성(省·살피다)’인데, ‘돌아가 살피는’ 대상은 부모님과 조상님이다. 귀성의 핵심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귀향에 있지 않고 고향에 계신 부모·조상님의 안위를 살피는 것이다. 또한 귀향이 돌아온다는 데 초점을 둔 것이라면 귀성은 일시적인 귀향 이후 곧바로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돌아가 살피고 다시 돌아오는 귀성 행위에는 비장함이 담겼다. 그것은 마치 다시 돌아가 자신이 맡아야 할 일들, 피하고 싶지만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을 위해 준비하는 의식(儀式)과도 같다. 그 밑바탕에는 너무 멀리 흘러가버린 자신에 대한 돌아봄을 전제해야 한다. 어쩌면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처지를 위해 궁극적으로 우리는 자기최면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우리는 참 멀리 와 있다.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든 사회적·국가적인 틀에서든 초심을 잃고 아주 먼 곳으로 온 듯하다. 소녀·소년시절 배웠던 ‘나보다 우리’의 기억들은 아스라이 사라졌고, 배려와 공감을 중시해야 한다던 사회와 국가는 새로운 것을 좇는 데 여념이 없고 애오라지 권력과 금력의 향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이번 추석 귀성은 오래 잊고 지냈던 우리의 첫 마음을 다시 새겨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기를 쓰고 고향길을 재촉하는 것이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 위한 첫걸음이라면 그에 걸맞은 의식의 환기(喚起)로도 이어졌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오랫동안 우리의 삶과 현장에 매몰돼 있는 가치들을 다시 끌어내서 먼지를 털고 반듯하게 각을 잡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좋겠다.
남북관계도 너무 멀리 와버렸다. 돌아가야 할 텐데 극단이 거듭되다 보니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다. 분명한 것은 북한의 5차 핵실험 도발에 대해 군사적인 대응만을 추구한다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뿐이라는 점이다.
도발 대응태세를 확고하게 구축하는 일 이상으로 남북 공존, 나아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방안도 꼭 점검해야 한다. 남북관계가 최악일지라도 우리는 돌아가 살피고 새로 시작할 계기를 찾아야 맞다.
성서는 일관되게 돌아오라고 가르친다. ‘탕자의 비유’를 담아낸 애창 찬송가 ‘어서 돌아오오’(전영택 시·박재훈 곡)의 호소도 같은 맥락이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2절)
올 추석에 우리는 반드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자면 그 길밖에 없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