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경제78) 국민일보 편집인
[조용래(경제78) 칼럼] 당신의 기억은 안녕하십니까
“봄마다 고난·부활 그리고 영적 각성이 한 묶음으로 펼쳐지는 대서사시를 기억하라”
3월 달력은 2011년 것과 똑같다. 5년 전 3월 11일도 금요일. 거대한 검은 죽음이 밀려온 그날, 모처럼 휴가를 얻어 봄맞이 산행 중이던 나는 늦은 오후에야 일본의 지진·쓰나미 장면을 접했다. 쏟아지는 공포, 일본의 친구·지인들은 어찌됐나 하는 불안감에 떨었다.
이튿날 벌어진 후쿠시마원전 폭발로 사태는 급반전됐다. 원전 주변 폐쇄 이후 현장 취재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됐다. 현장에서 느끼기로도 3·11 동일본대지진에 대한 일본 정부·미디어의 관심은 이미 원전사고 쪽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5년, 3·11은 주로 원전사고로만 기억되는 모양새다. 1만8000여명의 사망·실종자, 후유증·자살 등 관련 사망자 3500여명, 여전히 외지를 떠도는 수십만의 이재민들이 있지만 그들의 아픔보다는 다들 당장 내게 미칠지 모를 방사능 오염에만 신경을 곤두세운다.
일본 정부는 사고 직후 탈원전을 거론하더니 슬그머니 원전 재가동으로 돌아섰고 이제는 그저 안전성·경제성 등을 강조한다. 한국정부도 빠르게 반응했다. 그해 10월 원자력안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원전 전체에 대한 안전점검을 이전보다 강화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여기에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문제 제기가 끼어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OECD 원자력기구(NEA)가 지난달 내놓은 보고서 ‘후쿠시마로부터 5년’은 나름 의미가 있다. 원전 안전의 전제로 규제기관의 독립성, 원전 관련 정책결정의 투명성을 꼽았다. 뒤집어 말하면 3·11 이후에도 원전 안전성은 여전히 우려된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흔히 남은 자들의 관심과 기억은 온통 제도와 그 운영에 쏠린다. 어려움에 빠져 있는 소수 약자에 대한 인식은 자꾸만 뒷전으로 내몰린다. 일본의 경우 수십만명의 이재민보다 총인구 1억2700만명의 안전을 앞세울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을 터다. 한국사회도 3·11 피해지역에서 묻어올 수 있는 방사능 오염에 관심을 쏟는 것은 일견 당연하겠으나 그곳 사람들, 이재민들에 대해서는 무관심에 가깝다.
우리의 기억은 거기까지다. 일본 정부가 원전의 안전성, 후쿠시마 주변 지역에서 출하된 해산물의 안전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우리의 기억은 그 자리에서 멈춰서고 만다. 늘 그렇듯 우리는 강자의 주장을 그저 추종하거나 혹은 반발을 위한 반발에 매몰돼 있거나, 그러는 가운데 실체는 차츰 잊혀지고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당초 기억하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그만 잊어주기를 바란다. 기억은 공감을 낳고 공감은 문제의 본질을 파고드는 지혜와 용기를 준다. 그때 비로소 문제 해결의 실천단계에 들어서는데 우리는 늘 기억의 초입에서 배제되는 꼴이다. 그러곤 일상으로 떼밀리고 만다.
이 모두는 우리의 기억이 안녕하지 못하기 때문에 빚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세월호, 천안함, 일본군위안부의 기억이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각각의 실체가 확인되고 드러남으로써 펼쳐지고 기억되기보다 가물가물 잊혀져가고 있다. 우리는 기억하려는데 한사코 주변에서는 ‘잊어라, 망각하라, 생각을 비워라’는 그럴싸한 메시지가 우리를 지배하려 든다.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우리는 그 주장에 짐짓 편승하고 대강 기억하면서 세월에 모든 것을 맡기려 든다. 하지만 성서는 우리에게 기억의 진수를 가르쳐 보여준다. 매년 봄 사순절을 맞아 고난과 부활 그리고 영적 각성으로 이어지는 대서사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어 성서는 이 대서사시를 늘 기억하라고, 잊지 말라고 요청한다.
기억을 다시 다져야 할 사순절이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진다. 일상으로 떼밀려가지 않을 제대로 된 기억을 붙들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당신의 기억은 안녕하십니까.”
조용래(경제78) 편집인 jubi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