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9.06.09 03:07
박용성 중대(中大)이사장 '폭탄선언' '학과 전면 구조조정'
"대학이 학기당 400만~500만원씩 받으면서 사회 나가 밥도 못 벌어먹을
것들을 가르쳐"19개 단과대·77개 학과싹 잊어버리고 완전히
새로 그리겠다 이번 대학 평가로 내년 교수평가 땐'으악' 소리가 나올 것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두산중공업 회장)은 본지 인터뷰 도중 갑자기 백지를 꺼내 들더니 폭탄선언을 했다. "중앙대의 19개 단과대학, 77개 학과를 싹 잊어버리고 백지 위에 완전히 새로 그릴 생각이다. 내년 서울 캠퍼스 신입생부터 여기에 맞춰 뽑겠다."미래에 필요한 학문 수요에 맞춰 전면적인 '학과 구조조정'에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국내 대학 역사상 가장 큰 실험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내가 50년 전 대학(서울대 경제학과 59학번) 들어갈 때는 잠사학과·광산학과가 최고 인기였다. 앞으로 50년은 산업구조가 더 빨리 변한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는데 대학은 옛날 가르치던 학과 그대로다."
그는 "그동안 대학들의 학과 구조조정은 (음식점으로 치면) '신장개업' 식이었다. 명칭만 근사하게 바꾸고 옛날 것 그대로 가르쳐왔다"며 "우리는 완전 '폐업'하고 새로 '개업'하는 방식으로 할 것"이라고 했다.
"자동차 시대에서 대학은 여전히 '마차'를 가르친다. 대학이 등록금을 400만~500만원씩이나 받고도 학생이 사회에 나가 밥도 제대로 못 벌어먹는 교육을 시키고 있다."
그는 대학 졸업생을 데려다 쓰는 기업 입장에서 볼 때 대학이 정작 필요한 공부는 안 시킨다고 지적했다.
"내가 우리 학교 교양과목 리스트를 보고 '여기가 구청 문화센터냐?'라고 했다. 골프며, 축구며, 온갖 취미생활을 다 가르친다. 학부모들이 어렵게 빚내서 등록금 냈는데 대학이 그런 걸 가르쳐 내보내? 내 양심상 그렇게는 못한다. 교양과목도 뒤집겠다."
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을 인터뷰한 것은 두산그룹의 중앙대 인수가 오는 10일로 만 1주년이 되기 때문이었다. 기업인의 입장에서 대학경영을 해본 감상이 듣고 싶었고, 지난 5월 12일 발표된 조선일보·QS의 '아시아 대학평가'에 대한 반응도 궁금했다.
지난 1년간 중앙대는 대학가(街)에서 '개혁 아이콘'이 됐다. 최대 5000만원까지 차이 나는 교수 연봉제가 도입됐고, 속속 새 건물이 올라가느라 캠퍼스 전체가 온통 공사판이 됐다. 박 이사장이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소비자 관점의 대학개혁'은 철밥통으로 불리는 교수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반면 그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박 이사장은 양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기업 같으면 서너 달에 끝냈을 일도, 여기선 절차가 복잡하고 명분부터 따지니 의사결정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며 "답답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 ▲ 박용성 이사장의 바람은 간명했다. 그는“중앙대 졸업생 데려다 쓰니 일 잘한다는 소리듣는 게 가장 큰 목표다. 노벨상도 안 바란다”고 했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학과 구조조정이 과연 교수들 간에 합의될까.
"전쟁 한번 치러야 할 거다. 교수들이 '내 과는 절대 안 된다. 다른 과 없애라'는 식으로 나오면 아예 외부 컨설팅 회사에 맡길 생각이다. 이미 국내 대학들은 입학생이 모자라 중국 학생 데려다 정원 채우고 있다. 언제까지 그런 비정상적인 걸 할 텐가. 원가(原價) 1000원도 안 되는 졸업장만 찍어줄 게 아니라 학생들에게 정말 도움되는 일을 해야 한다."
박 이사장은 대학에 와보니 급여·승진과 연결되는 교수 평가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교수들 반발이 워낙 거셌다는 것이다.
"이거(실적 연계 교수평가) 안 하면 나 학교 못한다고 했다. 교수들과 두어 달 씨름했다. 아무리 연구업적 나빠도 매년 월급을 올려줘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왜 제대로 일 안 하는 교수들까지 올려줘야 하나. 기업 같으면 실적 나쁜 직원 당장 월급이 깎이는데."
그는 일련의 개혁 작업 덕분에 이젠 교수들이 '내가 연구 안 하고 제대로 안 가르치면 이 대학에서 못 견뎌내겠구나' 생각하기 시작했다며 "이건 도서관 새로 짓는 것보다 더 큰 변화"라고 했다.
―교수 각자가 최고의 지성인데,
너무 밀어붙이는 것은 아닌가.
"밀어붙인 게 뭐 있나. 당신은 당신 역할, 나는 내 역할 다하자는 것이지. 급여는 조직에 대한 그 사람의 공헌을 보상하는 것이다. 생활비 대주고, 나이 쉰 살이라고 주는 게 아니란 얘기다. 지금까지 그래 왔다면 그건 잘못된 것이니 고쳐야 한다."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이 조사한 대학의 사회요구 부응도(대학교육이 경제·사회적 변화나 요구를 따라가고 있는지) 조사에서 한국은 55개국 중 53위로 거의 꼴찌였다. 박 이사장은 "회계·한문·영어처럼 사회에 나가서 쓸 수 있는 걸 더 가르쳐야 한다"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공계 출신이 상경계 출신과 현장에서 부딪치면 첫날부터 밀리기 시작한다. 이공계라고 회계를 하나도 안 가르쳤으니 들어온 돈을 왼쪽에 쓸지 오른쪽에 쓸지도 모르는 거다. 최소한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밥은 먹게 해줘야 할 것 아닌가."
그는 앞에 있던 물컵과 컵 받침을 양손에 들더니 "소비자는 이걸(물컵) 원하는데, 이거(납작한 컵 받침) 주면서 '난 이것밖에 못 만드니 여기다 물을 담아 먹든 말든 알아서 해라' 하는 게 말이 되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무 '기업식 경영'이란 불만도 있다.
대학은 상아탑이고, 기업과는 다른 것 아닌가.
"누가 연구하지 말랬나. 기업이든 대학이든 투입한 자원에 비해 가장 큰 효과를 내는 것이 경영이다. 다를 게 없다. 학생이 400만원 냈으면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을 400만원어치 이상 전수하는 게 대학의 목표다. 누가 대학이 직업 훈련소냐며 따지기에 당신 자식이라면 그렇게 가르치겠느냐고 했더니 아무 말 못하더라."
그는 입시를 포함한 정부의 각종 대학 규제도 답답하다며 특히 '3不(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은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에선 좋은 물건 만들려고 전 세계 돌아다니며 좋은 재료 다 찾아 사는데, 대학의 원자재인 학생을 대학이 원하는 대로 못 뽑으면 어떻게 운영하나. 기여입학제도 무조건 못하게만 할 게 아니라 그 돈을 대학이 투명하게 쓸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면 된다. 그 학생이 공부 안 하면 졸업 안 시키면 되고."
―총장 직선제 때문에 대학 개혁이 더디다는 얘기도 나온다.
"그건 정말 법으로라도 못하게 해야 한다. 환자가 병원장 뽑고, 공무원이 장관 임명하나. 직선제 없애고, 잘하는 총장은 수십년 동안 소신껏 하게 해야 한다. 대학처럼 설득할 대상 많고 시간 많이 걸리는 데서 임기 4년 동안 아무것도 못한다."
―중앙대는 이번 조선일보·QS 아시아 대학평가 결과(국내 22위)와 관련해 총장이 사과문을 게재하는 등 학내 파장이 컸다.
"중앙대처럼 이공계 비중이 작은 대학은 연구 중심의 평가에서 구조적으로 불리하다. 그렇다 해도 '교원 1인당 논문 수'가 경쟁 대학들에 비해 적은 것은 확실히 문제다. 교수들이 나한테 할 말이 없다."
기대에 못 미친 이번 대학평가 결과로 인해 향후 중앙대 교수평가 기준이 더 강화되겠느냐고 묻자 박 이사장은 "아마 내년 교수평가에서 무지무지하게 (강화될 것이다)…. 그때 가서 보면 아마 교수들 입에서 '으악' 소리 나올 거다"라고 했다.
박용성 이사장은
인터뷰가 있던 지난 3일 오전, 박용성(69) 중앙대 이사장(두산중공업 회장)은 현장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넥타이를 매고 안전모에 눌렸던 머리를 빗으로 다듬은 뒤 취재진 앞에 섰다.
그는 원래 소탈한 스타일에 눈치 보지 않는 직설 화법으로 유명하다. 2003년 대한상의 회장을 지내며 정부·노조 등에게 쓴 말을 쏟아내 '재계의 쓴소리'로 불렸다. 국제 체육계의 인맥이 넓으며, 현재 대한체육회장도 맡고 있다. 박 회장의 스타일은 오너라기보다는 부지런한 CEO에 가깝다고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이메일을 확인하고 실무자에게까지 답장을 보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