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한국 미술 3040 기대주 ⑥ 서양화가 박현수
캔버스에 뿌리고 덮고 긁고
평론가들이 먼저 알아봤다
서양화가 박현수(42·사진)씨는 ‘신인 아닌 신인’이다.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는 본지가 처음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지 2년 남짓. 국내 개인전은 지난해 말과 2007년 화랑에서 연 것 두 번 뿐이다.
그를 먼저 알아본 건 평론가들이다. 이번 ‘3040 기대주’ 설문에서 “빛의 구조와 정신성을 개성적 형식 실험으로 표상하는 작가”(미술평론가 김영호), “광부가 탄광에서 탄을 캐듯 층층이 다양한 색채를 파고 훑어내는 체계가 뛰어나다”(미술평론가 윤우학) 등의 이유로 그를 추천했다. 시장에서는 서양화, 특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사진처럼 그린 극사실주의 회화가 득세하고 있지만 본지와 김달진 미술연구소의 조사 결과 선정된 10인 중 서양화가는 박씨가 유일했다. 그러니 궁금할 수 밖에. 서울 갈현동 작업실을 물어물어 찾아간 이유다.
◆그림 위해 공기좋은 곳에 작업실=박현수씨는 농사짓듯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다. 한적한 주택가 골목 안 상가건물 2층의 물감냄새 진한 85㎡(26평) 공간에 틀어박혀 지낸다. 여기서 붓에 물감을 찍어 캔버스에 흩뿌리고, 그 위를 다시 균일한 붓질로 덮고, 이후에 고무판으로 부분 부분 긁어내 형상을 만든다. 이 긁어낸 자국은 문자처럼 상징성을 띠고 있다. 작업실에선 천장까지 오는 대형 캔버스 여러 개가 건조되며 화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농부가 씨를 뿌렸으면 수확할 때까지 돌봐야 하듯, 일단 시작한 그림은 3∼5일씩 물감이 마르는 일정에 따라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자연의 시간이 쌓이듯 흩뿌린 물감이 캔버스 바닥에 쌓이고, 자유롭게 색깔들이 올라가는 거죠.”
당산동 집에서 꽤 먼 갈현동에 작업실을 두고 ‘외박’을 일삼는 것은 공기 좋은 곳을 찾아서다. 건조 중인 캔버스에 먼지가 앉아선 안 되기 때문이다. 창문을 한껏 열고 작품을 건조시킬 수 있는 여름철은 그에게 농번기다. 이때 뿌리기 작업을 많이 해 둬야 한 해가 편하다.
◆“그림은 내 천직”=박씨는 “그림을 그리면 시간이 잘 갔다. 이게 내 천직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이지 않으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들에 관심이 많았다. 유학 시절, 그림이 잘 안 풀리면 차를 몰고 미국 각지의 협곡을 찾아 다녔다. 일출·일몰 때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빛과 색이 그의 추상화 속 기본 재료가 된 이유다. “색이 뿌려지는 과정이 재미있고, 색을 배열하면서 색색끼리의 에너지 충돌을 즐깁니다.”
그가 줄기차게 붙잡고 있는 화두는 이중성. 물감을 자유롭게 뿌리는 행위와 이를 다른 물감으로 덮고, 세세히 긁어내는 절제된 행위를 한 화면에 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올 여름 미국 새너제이 미술관에서 전시가 예정돼 있다.
권근영 기자
◆서양화가 박현수는= 1967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중앙대 회화과와 동대학원,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트인스티튜트 대학원을 졸업했다. 오랜 유학 생활 중 현지에서 느끼고 체험한 동서문화의 융합과 괴리감을 상징화한 작품들은 미국서 먼저 소개돼 현지서 호평을 받아왔다. 빛과 색을 기본 재료로 뿌리고 덮고 긁고 말리는 추상화를 통해 다양한 형상을 보여주는 추상화를 그린다. 작품값은 현재 100호(130×160㎝)가 1500만원 정도다. 미국 새너제이 미술관과 연세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지난해 그린 ‘싱글’ 시리즈 1번(캔버스에 유채, 91.5×122㎝).
가까이 들여다보면 표면이 3층이다. 자유롭게 물감을 뿌린
표면을 노랑·회색으로 덮고, 문자를 닮은 형상들로 긁어냈다.
[박현수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