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대홈페이지 '중앙인문학관' 임하연의 글방 <숲새네 노란벤치>의 작품들을 다시 정리하여 올립니다.
버스공주 설아
임 하 연 (시인, 작가)
“아니? 뭐 저런 버스가 다 있어? 정류장에서 서지도 않고 지나가? 에잇 참! 저렇게 제멋대로인 기사는 따끔하게 혼쭐이 나야 해. 출퇴근 시간은 아니지만 십 분도 넘게 기다린 사람들이 눈에 뵈지 않는단 거야?”
나는 얼른 핸드백에서 수첩을 꺼내 사라져가는 얄미운 버스의 번호판을 옮겨 적었다. 내 뒤에 줄을 서있던 사람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가 모두를 대표하여 버릇없이 지나가버린 버스의 무정차 통과를 신고해 통쾌하게 응징해줄 것을 다짐하고 응원하는 눈빛에 더해 옅은 미소까지 보내왔다. “아가씨, 꼭 신고해? 저런 사람은 버스기사가 되면 안 될 사람이야!” 내 앞에 서 계시던 은발의 어르신도 돌아보며 당부하신다. “예…!” 나도 노기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음 버스를 타자, 출구 위에 비치된 신고엽서를 한 장 뽑아서 챙기고, 무시당한 분함이 아직도 남아 씩씩거리는 숨을 고르며 창밖의 풍경에 주의를 집중시켜보고자 하였다.
‘앗! 그 버스 아냐’ 아까 그냥 지나쳐 갔던 버스가 ‘서울병원’ 입구에 멈추어 있고 몇 사람의 승객들이 버스로 돌아와 승차하는 중이었는데, 막 병원 문을 나서 버스로 달려오는 사람은 우리 옆집 아주머니였다.
‘무슨 일이지? 혹시?’ 내 머리엔 벌써 삼 년 전 어느 날 버스 안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해 첫눈이 내리던 날!
나는 책을 몇 권 사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었다. 도착할 시간이 정해진 경우엔 전철을 타는 것이 안심되지만, 운전 때문에 여유롭게 차창 밖을 볼 수 없는 승용차 대신 버스를 타기도 한다. 영화처럼 펼쳐지는 창밖의 볼거리를 즐기거나, 그것들이 이끄는 생각에 젖어드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햇빛을 반짝이며 흐르는 한강이나, 길가 가로수들의 변화, 빌딩 숲과 그사이에 내려앉은 다양한 하늘의 표정, 버스전용차선에서 내려다보이는 혼잡한 승용차들의 행렬, 인도를 메우는 서울 시민들의 활기와 개성들……! 달리며 내다보면 마음속의 걱정도 잊고, 답답했던 기분도 어느새 풀린 것을 느끼게 된다.
그날 나는 창밖에 날리는 첫눈의 눈발에 취한 듯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강남터미널을 지나 오 분쯤이나 달렸을까? 앞자리의 여자 승객 한 분이 갑자기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기사님이 속도를 낮추고, 버스 안의 모든 시선이 그 여성에게 집중된 순간, “으... 아, 아기가 나올 것 같아요. 병원... 도와주세요! 아 아 아..,!” 배가 남산만 한 만삭의 새댁이 버스 안에서 갑자기 진통을 맞은 것이다. 절박하게 배를 감싸 안은 새댁은 버스 바닥에 떨어지다시피 내려앉더니,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 벌렁 누워버릴 것 같았다. 중년 아주머니 두 분이 달려와 새댁을 부축하며 진정시키고, 앞좌석의 할머니는 기사님에게 병원으로 급히 갈 것을 명령하고, 기사님은 ‘긴급상황’ 이라 버스가 노선을 벗어나 병원으로 가겠으니 양해 바라며, 급히 내릴 분은 내리시라” 안내하고 병원을 향해 정류장을 그냥 통과해 달렸다. “남자 분들은 창밖으로 고개 돌려욧! 힐끔거리면 내가 혼낼 것인께!”
할머니의 고함에 남자 승객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앞쪽에 있는 산부인과가 있는 병원을 핸드폰으로 검색해, 응급환자가 가고 있으니 준비해달라고 연락을 취했다. 버스 안에서 발생한 긴급 상황에 승객들이 한 식구인 것처럼 호흡을 맞춰 자기 몫의 힘을 합해 위기를 풀어냈던 그 날의 기억은 언제 생각해도 뿌듯하다. 그날 버스에서 처음 만난 초면들이었지만, 즉시 한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신기하고 든든하다. 출산하러 친정을 찾아오던 새댁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귀여운 공주님을 순산했고, 우리는 모두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벅찬 기분을 느꼈다. 버스는 사회의 축소판이고, 우리는 꽤 멋진 서울 시민들이어서 좋은 일과 행운을 스스로 만들어 낼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일로부터 며칠 후, 나는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하나는, 첫눈과 함께 세상에 온 그 공주의 아빠가 병원에 적었던 임시보호자들 전화번호를 보고 한 고맙다는 인사였다. 급히 일본 출장을 다녀와야 했기에 부인 혼자 친정을 가는 길이었는데, 버스의 여러 분이 도와 아기와 엄마 모두 무사하고 건강하니 저녁 초대에 응해 감사를 받아달라는 정중하고 진심어린 전화. 첫눈 오는 날 태어나‘설아’로 이름 지었다며……. 또 하나는, 그날 같은 버스에 탔던 한정훈이란 청년이라며 너무 좋은 인상을 받아 만나고 싶어서 병원에 가 설아 어머니에게 며칠을 사정해 겨우 오늘에야 연락처를 알았다는 데이트 신청. 내 입가에는 어느새 행복한 웃음이 피어오른다.
“!” 나는 아파트관리소에 전화해서 옆집 아주머니 핸드폰 번호를 알아내, 아까 버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아! 어느 어르신이 갑자기 뇌졸중이 와서 돌아가실 뻔했어. 조용히 버스 좌석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누우셔서 처음엔 술 취하신 줄 알았었지. 마침 의사가 한 분 있었기에 뇌졸중인 것을 알고 급히 병원으로 가 생명을 구했어. 버스였기에 정말 다행이었어!”
“그래서 정류장을 서지 않고 통과했군요...” “그랬지.”
나는 아주 기분 좋게 신고엽서를 찢어 휴지통에 넣었다.
<조선일보 등 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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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 김성민 기자 내 기사.jpg (File Size:5.90MB/Download: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