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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두면 일본인은 한국인을 오해한 채 마음을
닫아버릴 것 같아 걱정이라는 한 일본 언론인의 이야기

양국에서 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 적지 않지만
서로를 이어줄 소통의 다리는 아직 많이 부족한 듯


“그는 불안해서 도무지 잠을 잘 수 없다고 해요. 잠이 깨면 그냥 있을 수가 없어 걷는데요. 걷기 시작하면 그저 걷고 있을 수만 없어 달리고. 달리기 시작하면 언제 멈춰야 할지 모르겠고. 멈추지 않는 건 좋은데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질 테고. 그 이후를 상상하게 되면 두려워진답니다.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나쓰메 소세키(1867∼1916)의 장편소설 ‘행인’(1914)에서 주인공 이치로의 불안증에 대해 그의 부인이 시동생 지로에게 얘기하는 대목이다. 이치로는 교수인데 모든 것을 너무나 깊이 생각하는 고독한 인물이다. 상대 의중을 제 맘대로 상상하며 늘 불안해한다. 소세키 소설에 종종 나오는 고뇌하는 지성의 모습이다. 소심하고 병약한.

일본의 마이니치신문 후세 히로시(布施廣·64) 전문편집위원은 그 이치로에 주목한다. 그는 2015년 말부터 매주 1회 ‘후세 히로시의 지구의(地球議)’라는 고정 칼럼을 맡아왔는데 최근 4회 연속 ‘한국은 싫습니까’라는 제목으로 한·일 관계를 다뤘다. 지난 9일자에는 한국학자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의 해석을 인용, ‘행인’의 이치로에 비해 한국인들은 개인보다 민족을 중시하는 것 같다고 썼다. 개인 문제에 관심이 쏠려 있는 일본인들의 특성을 잘 모른 채 한국인들은 종종 역사 문제를 내세운다는 것이다.

병적으로 보일 만큼 개인 내면의 문제로 전전긍긍하는 이치로를 일본인 대표로 내세우는 게 조금 과장된 듯 보인다. 민족과 국가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의 역사인식도 마찬가지로 조금 지나친 것 같다고 후세씨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국과 일본은 그만큼 다른 존재이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란 참 쉽지 않다.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한·일 언론 간부 세미나’에서 처음 후세씨를 만났다.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간 그는 자신의 칼럼에서 ‘역지사지의 정신’이란 제목으로 한·일 양국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그가 지난달 말 갑자기 이메일을 보내왔다. ‘한국은 싫습니까’ 시리즈가 두 번째 나간 직후였다.

이메일 편지에서 그는 최근 한·일 관계가 악화되고 있고, 이대로 두면 일본인은 한국인을 오해한 채로 마음을 닫아버릴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다. 극복 방안은 없겠는지, 어찌 하면 좋겠는지를 물어왔다. 나 역시 그 문제라면 걱정이 태산인데, 해법이 안 보인다고 답했다. 그렇게 고민은 다시 시작됐고, 이어 우리는 장문의 이메일을 몇 번이고 주고받았다.

문제의 핵심은 양국이 서로를 잘 모르면서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고,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선입견으로 상대를 규정한 채 제 주장만 앞세우고 있다는 점이라고 나는 썼다. 예컨대 일본은 한국이 과거 식민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잘 모르며, 한국은 전후 일본 시민사회의 평화주의 노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요구가 번번이 달라진다며 ‘맘대로 골대를 옮긴다’는 일본사회의 비판에 대해 나는 광주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를 예로 들었다. 지난해 4차 진상규명위원회가 결성됐는데 이후로도 진상 규명이 더 필요하다면 5차 위원회가 결성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일본사회가 한국의 그런 적극적인 자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썼다.

후세씨는 한국사회도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예를 들었다. 5년 전 한 한국 언론인이 신문 칼럼에 ‘일본이 피폭 당한 것은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썼는데 그런 주장이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천벌 운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대꾸했다. 다만 일본사회가 원폭 피해의 참담함만 강조할 뿐 사태의 전말, 전쟁의 원인과 책임 등을 제대로 밝히려고 하지 않는 점은 문제라고 본다고 답했다.

그 외에도 많은 대화가 오갔는데 그중 일부가 지난 2일, 9일자 후세씨 칼럼에 소개됐다. 후세씨가 우리의 속내를 일본사회에 소개한 만큼 나 역시 일본의 동시대인들이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다. 아직 한·일 양국의 현안을 이어줄 소통의 다리는 많이 부족하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평창올림픽 개회식에 온다만다 말이 무성했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결국 참석했다. 퍽 다행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있었지만 분위기는 아직 냉랭한 듯 보였다. 물론 평창올림픽에서 한·일 문제는 곁가지일 수 있다.

하지만 평창올림픽이 추구하는 평화의 촛불은 남북뿐만 아니라 한·일 간에도 절실하다. 그러자면 상대에 대한 이해가 먼저다. 이치로와 같이 고민만 하고 있기보다 상대의 마음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배려와 관심이 더 필요하다.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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